#745
1.
시우는 편두통을 호소하는 큰 장모님을 뒤로하고, 작은 장모님과 함께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괜찮습니다. 길은 알고 있는 걸요.”
“알아요, 시우 군을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가는 길에 이야기나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안내역을 자처한 데네브는 먼저 제 방에 들려 간단한 치장을 끝냈다.
거창할 건 없다.
오랫동안 갈아입지 않아 잔뜩 구겨진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시 묶고, 청결의 마법을 연신 사용한 이후 향수를 뿌렸을 뿐이다.
낙인과 함께 백작의 작위를 계승 받은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던 몸치장이 이토록 새로우며.
또 간질간질한 감정을 일으킬 수 있음을 데네브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건 자각이 있다.
이 감정이 억눌러야 하는 부류라는 것도, 언니를 얼마나 화나게 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검기만 한 미래와 불안이 눈앞을 가리고 있을지라도 애절히 붙잡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있다.
달콤한 어구로 점철된 로맨스 소설이나 극적인 연극 따위에서만이 아니다.
이 현실에 정말로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살짝 빙 둘러가는 길.
데네브는 시우의 옆얼굴을 힐끗거리다가 문득 말했다.
“시우 군에게는 억누르지 못하는 게 있나요?”
데네브에게 이 재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매일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고 병나발을 불고 언니를 원망하는 와중.
다시 한번 그의 옆에서 산책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데네브의 발걸음도 자연 가볍다.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요?”
“네, 아. 책망하려는 건 아니에요. 간신히 무사히 돌아왔는데 언니가 좀 심했죠?”
“아닙니다. 만약 저에게 오딜 님과 오데트 님처럼 귀여운 딸이 있다고 가정해보면 알비레오 님이 화내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긴, 저도 그랬네요.”
차마 그 언니의 분노 유발 요소 중 데네브의 그릇된 연심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데네브.
신시우는 얼핏 난봉꾼으로 보이지만 나름의 확고한 선이 있다는 걸 안다.
어항에 잡혀갔을 때 그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데네브와 관계를 피하려 들었다.
또한 이후에 데네브가 시우를 속여 동침했을 때도 한 치의 의심 없이 그것이 ‘연구’를 위해서라고 믿었다.
뭔가 음흉한 추측을 내세워 데네브와 계속 끈적한 관계를 이어가려 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에게 진실을 전했다간 이 소박한 시간마저 물거품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리겠지.
시우는 자연스럽게 데네브와 거리를 두게 될 것이 뻔했다.
하긴 사위에게 연심을 품은 장모라니.
삼류 야설에서나 나올 법한 패륜 중의 패륜이 아닌가.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음,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 있다.
체취를 맡았을 때 치솟는 성욕이다.
작은 장모님에게 말하고 싶진 않은 주제였기에 조용히 주제를 넘긴 시우.
“그렇네요.”
사실 대답이 나온 시점에서 데네브의 신경은 이미 시우와 맞닿는 소매를 향해 있었다.
의도적으로 슬쩍 좁힌 거리.
소매가 스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릴 때마다 고민한다.
조금 더 가까이 붙을까?
너무 가까이 붙었다고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까?
이 고민은 마치 가라앉는 돌처럼 금방 깊은 곳까지 잠긴다.
혹시 지금 그를 안아도 될까?
무사히 재회한 사위를 반기는 장모로서 그 정도의 반가움은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이미 늦었을까?
“데네브 님.”
“네?”
“길이 여기가 맞나요?”
깊은 생각에 잠겨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저택의 호젓한 정원길에 들어서 있었다.
잘 관리되어 있긴 하지만 미로처럼 관리된 관목 탓에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그렇기에 야밤엔 인적이 없는 정원길.
“시우 군.”
데네브는 술렁이는 가슴을 느꼈다.
인간에겐 모두 자기 파멸적인 욕구가 내재해 있다고 한다.
가령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든다든가.
달리는 차나 트럭을 볼 때 ‘저기에 치이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이라던가.
물론 건강한 정신 상태를 지녔다면 이런 자기파멸적 욕구는 아주 간혹 생기는 호기심의 선에서 그친다.
그러나 데네브는 지금 온전치 않았다.
누구보다 제 감정이 그릇된 일이란 걸 알고 있는 데네브.
죄책감과 죄악감, 후회와 자기혐오, 애를 끊어내는 듯한 연심, 그걸 표현해서는 안 되는 현실은 그녀를 지치게 하기 충분했다.
아마 끝까지 달려나갈 수 없을 것이 뻔한 살얼음이 낀 호수 위를.
계산도, 뒷일도 잊어버린 채 달려보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네, 데네브 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시우를 보자 데네브는 뒤늦게 이성을 되찾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저를 안아줄래요?’ 같은 망측한 대사를 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달은 데네브.
하지만 이성과 달리 몸은 사고의 관성을 억제하지 못해 고목처럼 선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쿵 대고 말았다.
“데네브 님? 괜찮으신가요?”
데네브가 어지럼증을 느꼈다고 생각한 건지 재빨리 등과 허리를 받쳐 드는 시우.
“잘 돌아왔어요.”
역시나 조금의 사심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에 데네브는 안도 반 서글픔 반을 느꼈다.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모양이 어설프긴 해도 그토록 원하던 그의 품에 안길 수 있던 산책이었다.
2.
여전히 스산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감옥이었다.
제머나이 가의 지하 감옥에는 등급이 있다.
호텔처럼 스위트니 슈페리얼이니 이런 등급이 아니라 죄질과 위험도에 따라 옥호(獄號)가 나뉘는 것이다.
지하1층부터 3층까지 총 세 단계로 나뉘게 되며 번호가 높아질수록 더욱 깊은 감옥에서 엄중한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도로시는 1번 층, 린네는 3번 층이었다.
굳게 잠긴 문을 살피던 데네브가 말했다.
“선객이 있네요.”
“스승님이신가요?”
“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티페레트 공작님께선 거의 이곳에서 머무세요. 당신께서 직접 감시하시겠다는 거죠.”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왜 그녀가 시우의 침대 옆을 지키지 않고 이 칙칙한 감옥에 들어서 있는지.
굳이 말을 듣지 않아도 예상 가능했던 것이다.
-철컥!
육중한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데네브는 아쉽지만 물러섰다.
“용무가 끝난다면 문만 닫고 나오시면 돼요.”
“데네브 님은 함께 안 가시나요?”
“저도 바쁜 몸이라구요.”
아무리 그와 있는 시간이 좋다고 해도 연인의 만남을 방해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은 까닭이다.
조금 전 그의 품에 안기기도 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시우는 짧은 인사를 나누고 지하 감옥에 들어섰다.
이곳에 찾아온 건 3번째다.
최초는 쌍둥이와 관계를 나누던 모습이 들켜서 작은 장모님에게 끌려왔었고, 두 번째는 사고를 일으킨 아멜리아가 갇혔을 때 면회를 왔었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진 않은데 그때와 비교하면 이것저것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마주한 건 수녀복이 아닌 파자마를 입고 침대 위에 누운 도로시였다.
사실 지하감옥인 만큼 시설이 좋다고 말하긴 어렵다.
침대도 구색을 갖추는 정도에 가까웠고 당장 그녀의 발목은 무거운 사슬로 묶여있다.
“도로시 님, 저 왔습니다.”
“달링~ 보고 싶었잖아.”
그럼에도 제집 안방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책을 읽던 도로시는 시우를 보고 화색이 되어 철창 앞으로 달려나왔다.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도로시를 보자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이번 탈출에 있어 도로시의 공로는 단연 1순위였다.
시우가 탈출 마법을 완성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며, 엘로아와 르뤼에가 탈출 장소에서 대기할 수 있게끔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멜리아와 밀입국하여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 문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합류했다.
그녀가 해주었던 일 중 단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탈출은 요원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 이 정도까지 해주는 건지 당장 시우부터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말이다.
“아냐~ 아냐~ 나 게헨나 여행 오는 게 일평생 소원이었거든. 그런데 이 호텔 진짜 별로야. 룸 컨디션도 별로고 뷰도 안 보인다니까?”
익살스러운 도로시에 말투에 웃고만 시우.
어차피 이 장소에선 마법 활용이 불가능하기에 철창도 그리 촘촘하지 않다.
도로시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철창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나 잘했지? 잘했으면 뽀뽀.”
“네네, 그 정도는 당연하죠.”
가볍게 입을 맞추려는 거니 했는데 시우가 철창에 다가서자마자 도로시의 손이 덥썩 시우의 멱살을 잡았다.
이게 탈출 액션극이었다면 무방비하게 다가선 간수 신시우는 목이 꺾여 죽고, 더불어 열쇠도 빼앗겼겠지만….
도로시는 그저 끈적끈적한 키스를 퍼부을 뿐이다.
“츄릅…. 쭈웁…. 하아…. 아…. 키스했더니 너랑 하고 싶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도로시.
이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한다.
“아하! 내가 뒤돌아서 엉덩이 바~짝 붙일 테니까 너가 밖에서 할래? 여죄수와 간수 플레이. 어때?”
“아하하, 그건 좀….”
“아니면 입으로 해줄까?”
“여기 감시 카메라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
시우가 복도 천장에 붙은 영상기록 수정구를 가리키자 도리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도로시.
이내 장난이었다는 듯 철창에서 살짝 떨어져 팔짱을 낀다.
“너~무 감사해 하며 쩔쩔맬 필요 없어.”
“아뇨,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난 너에게 잔~뜩 진 빚을 갚았을 뿐인걸. 무사히 돌아가게만 해준다면 여한이 없겠어.”
“당연하죠. 제가 어떻게든 책임지겠습니다.”
“후후, 믿음직한걸?”
시우는 호언장담하며 도로시를 안심시켰다.
그 밖에 근황 토크를 얼추 끝낸 시우는 3번 층 즉, 린네가 갇혀있는 뇌옥을 향했다.
여기까지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다.
그나마 관리한 흔적이라도 보이는 1번 층과 달리 여기는 정말 낙후된 시설 그 자체다.
그만큼 린네가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
깊게 지하로 파고든 계단을 거쳐 1자로 늘어선 복도 한가운데, 낡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은 채 감옥 내부를 감시하는 스승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눈빛은 스승님이 검을 빼 든 채 ‘적’을 바라볼 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나마 정상참작의 이유가 여럿 있는 도로시와 달리 린네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는 공감할 수 없는.
공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리라.
시우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오랜만에 뵙는 두 스승님을 향해 발길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