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
1.
검의 광채와 마법의 불똥이 난무하는 전장.
그리고 그에 비견할만한 긴장감이 감도는 장모님의 청문회.
피고인 신시우는 억하심정이 가득해 보이는 검은 재판장 앞에 직각으로 바로 섰다.
“시우 군, 전체적인 상황은 미스 메리골드로부터 들었어요.”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간단한 확인 절차이니까요.”
드르륵 의자를 건네는 데네브는 예상과 달리 어째 재판장의 포스 대신 변호인의 온화함이 묻어나오는 태도이다.
“앉긴 뭘 앉아. 뭘 잘했다고.”
“그렇다고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세워둔다고? 언니가 사람이야?”
덤으로 변호인과 재판장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어항에 갇혔던 이후 작은 장모님이 사정을 많이 봐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몇 번의 감사를 표해도 모자라겠지만….
“애초에 이 시간에 가문의 손님을 집무실에 들여놓고 홍차 한 잔 대접하지 않는 것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까?”
“...뭐?”
“어디 사는 누구누구 씨가 누누이 강조했잖아. 어떤 상황이건 예법과 격식은 중요한 거라고.”
“데네브, 다시 말해봐.”
“응, 다시 말할게. 고상함과 품위는 의복과 마찬가지라 그 둘을 챙기지 않는다면 벌거숭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어디사는 누구누구 백작이.”
부탁이니 가뜩이나 심기 불편한 큰 장모님의 복장을 긁어놓는 것은 자제해 주었으면 싶다.
변호인이 재판장에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초유의 엑시던트가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데네브 님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목도 마르지 않고 서 있는 게 더 편합니다! 아무렴요!”
결국 시우는 무리하게 끼어들어 씩씩하게 말했다.
데네브를 노려보며 쌍심지를 치켜세우던 알비레오는 시우의 대답에 한숨을 탁 쉬고 손을 휘적였다.
“후우, 편히 앉아요. 마실 건…. 저 선반에서 아무거나 주워 마시던가 말던가.”
아무튼 이러한 소란을 애피타이저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알비레오는 테이블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시우 군, 이게 보이나요?”
“네 보입니다.”
아무런 마법적 장치도 되어있지 않은 백지.
“이건 신뢰에요.”
“네?”
알비레오는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 와그작 구겨 보았다.
꽤나 과격한 퍼포먼스와 함께 매우 차가운 시선을 쏘아보내는 재판관님.
그렇게 종이 뭉치를 꾸욱 움켜쥐었던 알비레오는 그것을 시우의 앞에 펼쳐 보였다.
“자, 이제 어떻게 됐나요?”
“잔뜩…. 구겨졌네요?”
“그래요,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구겨진 흔적이 지워질 리는 없겠죠. 이렇듯 한번 무너진 신뢰는 쉽사리 되돌릴 수 없는 법이에요. 애석하게도 말이죠.”
등에서 식은땀이 뻘뻘 났다.
‘신뢰’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부터 제 발이 저렸던 처지다.
한 번만 더 마녀를 꼬셔오면 끝장을 보겠다고 엄포를 놓던 알비레오.
그런 큰 장모님 앞에 무려 공적인 도로시와 린네를 딸랑딸랑 데리고 게헨나로 돌아왔으니, 그녀가 할 말이 다 예상이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듯 궁지에 몰렸으니 이제 변호인이 나설 차례였다.
자신의 역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여는 작은 장모님.
“뭘 그렇게 빙빙 돌려 어렵게 말해? 아까운 종이까지 구기면서.”
아니나 다를까 챌 서폿급 이니시에이팅을 걸어버렸다.
제발요! 작은 장모님! 이러다 저 진짜 죽어요!
라고 열심히 눈빛을 보내도 알아듣지 못하는 데네브.
시우는 작은 장모님의 열의가 재판을 망치기 전 자백과 속죄를 통해 자비를 구하길 택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곧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죽을죄를 졌으니 사형만을 봐달라는 전략으로 나서기로 한 것이다.
“알비레오 님의 말씀을 어기려고 한 게 아닙니다!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하려다 보니, 딱한 사정도 알게 되었고 일이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
“하지만 오딜 님과 오데트 님 만큼은 제가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제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까지만 말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 전에 알비레오가 끼어들었다.
“시우 군. 고개 들어요.”
“아닙니다! 저는 이 자세가 가장 어울리는 죄인입니다! 죽여 주십시오!”
“…진짜 죽여줄까요? 말하던 도중이니까 고개 들어요.”
“넵.”
두통이 이는지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을 잇는 큰 장모님.
“저도 사건의 발단이 저의 안일한 판단과 강압에 있음을 인정하는 바에요.”
“강압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하기로 결정했는걸요.”
“단순 인과 관계를 놓고 말한 거에요. 누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기나 했겠어? 라고 천연덕스럽게 굴기엔 아무래도 여파가 컸으니까요.”
“쉽게 말해,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언니라도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시우 군.”
빈정대는 작은 장모님의 말투에 눈썹을 꿈틀하면서도 토를 달지 않는 걸 보면 진실인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라 놀랐다.
“그러한 이유로 시우 군을 엄히 책망할 생각은 없어요. 그럴 자격도 없다고 보고요. 이게 가장 부아가 치미네요.”
“죄송할 따름입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당신이 쌍둥이를 교묘하게 꾀고 있는 것도 아니죠. 오딜과 오데트가 좋다고 당신을 따라다니는 건 시우 군의 여성편력을 알면서도 하는 일이고, 거기부터는 남녀의 관계이지 어미인 제가 나서 오지랖 부릴 부분은 아니라고 봐요. 물론 화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요.”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는 듯한 큰 장모님의 말을 듣고 시우는 조금 놀랐다.
말만 듣자면 그럴듯한 말이긴 하다.
그러나 시우가 입에 올렸다간 당장 목이 달아나도 할 말 없는 극강의 합리화였다.
어찌 이상과 감정이 늘 평행선상에 놓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도 냉정히 사정을 헤아리는 큰 장모님의 아량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시우 군을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앞으로 더 연인군단을 늘렸다간…. 그땐 저도 극단적 조처를 할 예정이니 알아서 잘 사리세요.”
알비레오는 테이블을 쾅 내려치려다 다 부질없음을 깨닫고 재차 힘없는 한숨을 쉬었다.
열이 오르다 못해 맥이 빠진 모습이다.
“아무튼. 지금 당장 시우 군을 지탄하려는게 아니었어요. 게헨나에 대한 이야기기를 하려했죠.”
“게헨나요?”
“시우 군은 게헨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마법인가요?”
“아까 말한 신뢰에요.”
이어지는 설명.
“마녀는 원한다면 영생을 살아요. 설령 계승을 한다 해도 그 이름은 대대로 견습마녀에게 물려지죠. 은원 관계가 후대에 걸쳐 이어진다는 걸 인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에 게헨나는 신뢰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가령 시우 군에게 제가 무한한 인내를 보이며 융숭히 대접하는 것 역시 시우 군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죠.
제가 베푼 신의에 대한 보답은 게헨나의 다른 마녀에게도 보여질 것이고, 훗날 오딜과 오데트가 마녀가 되었을 때 제머나이 가문이 증명한 신뢰를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올 테니까요.”
“그것과 별개로 언니와 제가 시우 군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도 맞아요.”
“…지금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데네브 말도 옳아요.”
그렇게 말한 알비레오는 아까 구겼다 편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추방자는 주어진 신뢰를 구겨버린 자에요. 본디 다시는 종이를 펼 수 없는 자들이죠.”
이제야 알비레오의 말이 가닥이 잡히기 시작한 시우.
여기부터가 본론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당신이 잡혀간 이후 게헨나도 사정이 많이 바뀌었어요. 헥센나흐트가 공적을 비롯 추방자를 대거 흡수하기 시작했고, 게헨나도 더는 엄벌주의만을 고집할 순 없게 되었죠.”
“아직 공표하지 않았지만, 곧 게헨나도 심사 기관을 설립해 대대적인 추방자 면책 사업을 시작할 거에요. 이대로라면 헥센나흐트의 폭발적인 성장을 바라봐야만 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 첫 번째 대상은 ‘자유의 마녀’ 즐라타 유스티치아, 그리고 ‘수은의 마녀’ 앨리스 이븐 하이얀. 그 외에 둘이 될 거에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걱정하던 부분에서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즐라타와의 약속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이 이행됐으니 다른 건 시우가 발품을 팔면 될 일.
앨리스 3인방이 무사히 게헨나에 돌아오게 된 것도 희보다.
앨리스에게 무사히 돈을 받아낼 수도 있게 되었고 말이다.
“그러나.”
알비레오의 손에서 불길이 일더니 구깃구깃하던 백지가 화르륵 타올랐다.
마술 소품처럼 재조차 남지 않고 깔끔하게 사라진 종이를 두고 큰 장모님은 말했다.
“다시는 복구될 수도, 돌이킬 수도 없게 된 종이. 이게 바로 공적의 신용이에요.”
이번만큼은 작은 장모님의 의견도 일치하는지 두 쌍의 자색 눈동자에 엄격함이 깃든다.
“절대 인정할 수 없어요. 제머나이 가문의 사위가 공적과 연관이 있는 자라니. 심지어 그 중 하나는 그 사위를 보며 낭군낭군거리고 있다니…. 야! 신시우! 너! 제정신이야?!!!!!”
뭔가 잘 풀려가는가 싶더니 역대 초단기 급발진을 선보이는 큰 장모님의 샤우팅에 시우는 몸을 떨었다.
“언니, 진정해 진정. 이미 끝난 이야기잖아.”
“후우, 후우, 후우………. 알아. 난 머리 좀 식힐 테니까 네가 얘기해.”
데네브조차 적대 행각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만류하는 이 상황.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상당히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다.
마녀 사회에서 은원이 중요하다지만, 꼭 계승이니 뭐니 이야기가 없어도 은혜를 갚는 건 당연 중요한 덕목이다.
비록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다 한들 시우를 위해 몇 차례고 목숨을 건 린네도, 굳이 휘말리지 않아도 됐을 일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준 도로시도 포기할 수 없다.
“당연히 시민권 취득까지 바라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두 분이 무사히 게헨나를 나서실 수 있게….”
“시우 군, 제가 먼저 말해도 될까요?”
“네.”
목청을 가다듬은 데네브는 한껏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언니와 전 시우 군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어요. 저희 가문의 귀한 손님이기도 하고요. 시우 군이 데리고 왔을 정도면 아무리 공적이라도 마냥 악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그들의 조력이 시우 군 구출에 아주 큰 협력이 되었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고요.”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건 제머나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어요.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시우 군은 지금 공적을 둘이나 게헨나에 들인 거에요. 지금은 인맥과 자금을 동원해 입막음 중이지만 시간이 더 지난다면 제머나이 가문으로선 죄인을 지하감옥에 감금하고 정식 재판에 회부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알고는 있었지만 공적이라는 낙인은 마녀들이 쉽게 용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제머나이 백작 가조차 감당할 수 없다는 문제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기선….”
데네브가 말꼬리를 흐렸다.
명확한 답은 있되, 그것을 전달해도 좋은지 망설이는 눈치이다.
“데네브 머뭇거려서 어쩌려고. 본인이 원한다잖아.”
“그치만…. 알겠어. 시우 군.”
“네.”
“티페레트 공작과 대화를 나눠보세요. 그녀라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을 테니.”
그렇다.
스승님 역시 엄연히 게헨나의 공작이며 많은 마녀의 지지를 받고 있다.
어쩌면 활로를 찾아 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승님은 시우가 깨어날 때 옆에 없었다.
아멜리아에게 거취를 물어도 표정이 어두워질 뿐이었다.
작은 장모님마저 저렇게 망설일 정도면 시우가 예상할 수 있는 이유로 문제가 생긴 것이겠지.
“그럼 제가 직접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추천드리진 않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즉, 여기서부터는 시우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애초에 그러길 각오했던 부분이었다.
“그전에….”
린네와 도로시가 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