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3
1.
장대한 대탈출극이 끝난 직후.
게헨나에 들어선 시우는 그대로 정신을 놔버렸다.
육체적인 소모는 거의 없을지라도 정신적인 소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흔히들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정신적 노동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
그러나 실상은 사고와 집중력 역시 체력과 마찬가지로 한계는 지닌다.
턱걸이 열 개를 버거워하는 사람에게 턱걸이 백 개를 못하면 때려죽인다고 협박을 해도 불가능한 것처럼,
일정 한도 이상의 집중은 단순히 정신력으로 커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린네에게서 받은 자성마법 ‘계단’은 그것을 강제로 가능케 했다.
무수한 불가능과 자신의 한계를 딛고 새로운 마법을 손에 쥐게끔 종용했다.
그 반작용으로 혹사당한 뇌는 휴식을 요구하고, 드디어 안전지대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이 더해지자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으어….”
편안한 잠자리에서 단잠 같은 휴식을 취하던 시우는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천장, 그중에서도 부상을 입었을 때 눕곤 하던 치료방이다.
청결한 시트 특유의 소독제 냄새, 그 사이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기분 좋은 체취들.
“움냐….”
“흐므으므….”
어쩐지 허벅지가 묘하게 무겁다 싶었는데 고개를 들자 시우의 다리 한쪽을 쿠션 삼아 코를 골고 있는 쌍둥이가 보인다.
각기 말랑말랑한 한쪽 뺨이 찌그러질 정도로 시우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오딜과 오데트.
오딜과 오데트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수 있을 줄이야.
아기 천사 같은 모습에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으며 재회의 실감을 느끼고 있자니 다리 사이가 평소보다 무겁다는 걸 느지막이 깨닫는다.
“…쿠우…. 쿠우….”
시우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자고 있는 이는 르뤼에.
모양을 보아하니 용케 쌍둥이 사이에서 중앙 자리를 따낸 모양이다.
“시우, 일어났나요?”
“아멜리아 님.”
무게감이 느껴지는 건 하반신만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잠옷차림의 아멜리아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움푹 패인 보조개와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는 무방비한 웃음은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오직 시우만 독점할 수 있는 표정이다.
“역시 시우 옆자리가 가장 잠이 잘 와요.”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자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손등에 뺨을 비비는 아멜리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우의 볼과 이마에 작게 뽀뽀를 해온다.
남자라면 그 누구라도 부러워할 법한 어마어마하게 호화로운 잠자리임은 분명하다.
남아있던 긴장까지 탁 풀렸다.
온갖 대장정을 거쳐 드디어 헥센나흐트를 벗어나 게헨나로 돌아왔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난 것이다.
“정말 돌아왔네요….”
“그럼요,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는걸요.”
“얼마나 잠들어있었나요?”
“꼬박 하루요.”
“아, 그러고 보니….”
일단 침대 위에 없는 이가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스승님, 또 한 명은 샤론.
어리둥절해 보이는 시우의 얼굴을 보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멜리아도 살짝 낯빛이 어두워졌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각기 사정이 있을 지 모르는 둘과 달리 시우에겐 당장 확인해야할 중대사안이 있다.
헥센나흐트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린네, 도로시 모두 게헨나로 피난했다.
그러나 전후 사정이 어찌 됐건 두 사람은 공적.
두 사람이 게헨나에 입국했다는 건 앨리스나 즐라타처럼 추방자가 게헨나에 발을 들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사항인 것이다.
확인해야 한다.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곧장 튀어 나갈 수는 없었다.
“저….”
이런 순간마다 참 미안해진다.
목숨까지 걸고 구하러 와준 판국에 곧장 다른 여자가 신경 쓰인다고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아멜리아는 극구 괜찮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딱 잘라 되겠는가?
어쩌다 보니 하렘군단을 꾸리게 되었음에도 내심 미안함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시우였다.
“시우,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이불을 걷고 침대 위에 앉았다.
그리고 소중한 물건을 껴안듯 시우를 끌어안는다.
“저도 시우의 다정함에 도움을 받은 사람인걸요.”
그저 이해해주고 포옹해주는 듯한 태도.
그런 아멜리아를 볼 때마다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말씀 드리기에 좋은 타이밍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정말 많이 변하셨네요.”
“관리인,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멜리아는 부교수 시절 목소리를 흉내를 내며 시우에게 장난스레 받아쳤다.
덕분에 한결 마음 편히 자리를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금방 올게요.”
“알비레오 백작을 찾아가는 편이 대화가 빠를 거에요. 지금쯤 집무실에 있겠네요.”
“네,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날리고 세쌍둥이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침대를 벗어난 시우.
슬쩍 뒤를 보자 세쌍둥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손을 흔드는 아멜리아가 보인다.
“흐뭇하고 마음 따뜻한 광경이긴 한데….”
아멜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알비레오 백작을 찾아가라고 말했지만….
시우에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죠’라는 말로 들렸다.
르뤼에를 데리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린네와 도로시를 데려왔으니.
심지어 즐라타의 시민권을 부탁할 예정이니,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가늠이 오질 않는 것이다.
저번 르뤼에 사태 때를 생각한다면 두 쪽 정강이가 부러져 한동안 목발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
“하아….”
그렇기 때문인지 멋들어진 복도를 걷고 있음에도 귀신의 집을 거니는 듯한 한기가 가시질 않는다.
순례자처럼 줄지은 촛대 사이를 지나 큰 장모님의 집무실로 향할 때마다 주마등이 스쳐 간다.
그렇게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길 무렵.
야심한 시각 복도를 울리는 대화 소리.
“언니가…! …는데! 너무하…”
“…그래서, 너…. 제정신… 잖아!”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격렬한 말다툼 쪽에 가깝다.
방음 성능 확실한 두꺼운 원목 문을 뚫고 복도까지 울릴 지경이니.
문 앞에 가까이서자 한결 큰 목소리가 들린다.
“됐어! 언니가 뭘 알아! 내가 아직도 코흘리개 견습마녀인 것 같아?!”
“너 지금 뭘 잘했다고 언성을 높여! 그럼 내가 틀렸다는 거야?!”
말다툼의 주인공은 쌍둥이 장모님.
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심각하다.
뭔가 타이밍 잘못 잡았나?
다시 와야 하나?
“…….”
그래 다시 오자.
통계상 알비레오 백작님이 가장 기분 좋으신 오후 티타임쯤에나 슬쩍 얼굴을 비치는 것이다.
그런 갈등조차 생겨날 정도로 격렬한 다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네브! 너 거기 안 서? 아직 나 말 안끝났어!”
“그래! 한번 해 봐! 막으려면 막아 보던가!”
-쾅!
거의 박차듯이 문을 열고 나온 데네브 제머나이와 우연히 맞닥뜨린 것이다.
“아….”
“아, 안녕하세요.”
깜짝 놀랐다.
단순히 이 공교로운 상황 탓이 아니다.
시우가 기억하는 한 작은 장모님은 함께 어항에 갇혔던 극한의 순간조차 몸가짐에 신경을 쓰던 사람이었다.
품위와 몸가짐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려던 교양 넘치는 백작님인 것이다.
분을 이기지 못해 맺힌 눈물과 벌게진 목덜미는 그렇다 쳐도 둥근 어깨선을 부각하는 오프숄더 드레스가 구깃구깃 구겨져 있다.
실크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서 구르다 보면 저렇게 된다는 걸 시우는 경험상 알고 있다.
저 지경이 되려면 일주일 정도는 굴러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주름이 져 있었다.
거기에 잔머리 하나 삐져나오는 일 없이 단정히 정리되곤 했던 시뇽 스타일이 지금은 성게처럼 삐쭉뾰족하다.
알비레오와 데네브가 머리채를 붙잡고 싸운 게 아닌 이상, 이 역시 머리를 손질하지 않고 일주일은 있어야 나오는 것이다.
평소하는 옅은 화장도 없고, 향수 냄새 대신 진한 술 냄새가 풍긴다.
“데네브 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시우를 발견한 데네브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려온다.
데네브의 두 손이 얼굴을 가렸다.
“나, 난 몰라…. 시우 군, 잊어줘요. 방금 제 모습은 잊어줘요….”
그 모습이 마치 원치 않게 민낯을 썸남에게 들킨 모습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는지.
데네브는 시우에게 등을 휙 돌린 채 알비레오에게 소리쳤다.
“이게 다 언니 때문이야…!”
“하아, 내가 너 때문에 미치겠다….”
사실 알비레오와 데네브가 싸운 이유는 간단했다.
시우가 헥센나흐트에 납치된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방 안에서 슬피 울던 데네브.
알비레오는 시우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곧장 데네브에게 알리지 않았다.
여동생이 미워서가 아니다.
사위가 돌아왔으니 쌍둥이가 옆에 바짝 붙어 있을 게 뻔한 상황이다.
거기에 감정이 극에 달한 데네브를 투하한다면 어떤 아수라장이 있을지 심히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알았는지 해당 사실을 입수한 주정뱅이 모드 데네브가 ‘왜 바로 말해주지 않았어!’라고 따지며 지금 당장 시우를 만나러 가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
이제 데네브가 품은 연심을 알게 된 알비레오로서는 그 자체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데네브는 데네브대로 시우가 납치될 구실을 제공한 언니가 뻔뻔스럽게 만남을 제한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결과 말싸움이 격화.
서로 할 말 못 할 말을 다하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시우로선 하필 가장 안 좋은 상황에 매를 맞으러 온 제 운명을 원망할 수밖에.
“알비레오 님도 별일 없으셨…죠?”
알비레오의 테이블은 집무실 문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제 와 도망칠 수도 없었다.
데네브와 마찬가지로 거칠게 숨을 쉬던 알비레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짓했다.
“문 닫고 들어와요.”
“넵.”
정말 고작 대면하는 것 정도로 이렇게 무서울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우는 마음속으로 유언을 남기며 문을 닫았다.
-쾅!
굳게 닫힌 집무실 문 뒤로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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