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
1.
닫혀버린 문.
기껏 완성해낸 열쇠는 쓰임새를 다했다.
연막은 더는 시우 측의 위치를 가려주지 못했다.
마냐와 린네가 구축해낸 은폐장 역시 분석이 끝난 것인지 위에서 상황을 관망하던 대마녀들이 직접 손을 쓰기 시작한다.
-쾅! 쾅! 쾅!
하늘에서 떨어진 쇠말뚝이 지면을 파고들어 우뚝 선다.
말뚝과 말뚝 사이는 긴 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과 마법을 구성한다.
주위의 마력을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인 말뚝이 빛과 함께 폭발하려는 순간….
-철컹!
다른 마녀가 날린 기요틴의 날이 절묘하게 말뚝 사이에 매여있는 사슬을 끊어내었다.
말뚝과 사슬이 구축하던 마법이 헝클어지며 이명 소리를 닮은 초고주파를 단말마처럼 내질렀다.
누군가 거대한 불을 피워올리면, 누군가는 물의 장벽을 세워 상쇄한다.
누군가 그물과 올가미를 만들면, 누군가는 바람의 칼날로 올을 잘라낸다.
앞서 예측했던 대로 서로 간의 방해 공작이 펼쳐지는 것이다.
직접적인 공격은 거의 없었으나 마법과 마법이 부딪치는 여파는, 그조차도 궤멸적이다.
-쾅! 콰과광! 콰광!
런던 대공습이 이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디그니티 타운.
빗발치는 포화 속을 구르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본격적인 공세의 시작에 디그니티 타운의 저위계 마녀들이 혼비백산 도망치는 것이 보인다.
“시우.”
굳어버린 시우의 앞으로 린네가 걸어 들어온다.
시우의 표정을 보고 일이 틀어졌다는 걸 눈치챈 까닭이다.
린네뿐만이 아니라 이 도주극의 모든 참가자가 끝을 직감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라.”
눈앞이 깜깜한 상황에서 막연한 희망을 붙잡는다기보다는 확신이 느껴지는 린네의 말투.
희망을 품었던 시우는.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린네의 말에 다시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 이상은….”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주인공 형편 좋은 대로 돌아가는 소설이 아니며,
기적은 필요할 때 찾아와주는 편리한 장치가 아니다.
모든 걸 포기한 시우에게 린네는 말했다.
“비루한 삶이었다.”
“…….”
“여태 많은 생명을 빼앗았다. 독선과 오만에 갇혀, 눈을 감으면 칼끝에 고혼이 된 놈들의 단말마가 끊이지 않았다.”
“…….”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몸부림치며, 망자처럼 살아있을 뿐인 나날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시우의 손등을 덮는다.
“그리고 너를 만났다. 따뜻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함께 있어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유언과 비슷한 형태를 취했다는 걸 시우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널 만나지 않았다면 가슴에 벅차오르는 두근거림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숨을 헐떡이는 것조차 지쳐버린 늑대처럼. 한 마리 짐승으로 죽었겠지.”
잠시 머뭇거리던 린네는 처음으로 시우를 보며 웃어 보였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간지러운 듯한 미소였다.
“널 사랑한다. 이 덧없는 목숨을 다 바쳐.”
기나긴 린네의 삶에 시우와의 만남은 찰나였을 뿐이다.
인생을 24시간에 비유하자면 몇 초조차 되지 않는 순간이었겠지.
그럼에도 행복했다.
그를 위해 죽어야 할 이유가 될 만큼이나.
“그러니 이곳은 내가 맡겠다.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 널 기다리는 연인의 품으로 돌아가라. 그게 너에게 남기는 마지막 부탁이다.”
“스승님…!”
린네는 대답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았다.
여태껏 쫓기던 처지에서 벗어나 적들에게 돌진한다.
저만한 강적을 향한 무모한 도전.
삶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기에 몸은 온전치 않다.
예빈 스미르나의 말마따나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몸이 부서지는 통증이 느껴지는 처지였다.
아마도 10초도 버티지 못하겠지.
그러나 어떻게든 1분 이상의 시간을 벌어 보일 것이다.
“베어라.”
그런 미래가 선연하게 그려짐에도 가슴에 번져오는 감정은 엉뚱하게도,
린네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지금껏 느꼈던 아집과 독선에서 비롯한 환희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마지막 할 일이 남았다는 기쁨이다.
그와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있음에도 마치 심장에 붙어있는 듯한 따뜻한 온기.
혼자가 아니라 말해주는 온기는 린네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2.
린네가 벌어준 마지막 시간.
린네의 주위로 흑백의 마력장이 넓게 펼쳐졌다.
이제껏 완벽한 흑백 대비를 남기던 흑백세계는 그 성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 많은 수가 발하는 마력의 색채를 죄다 앗아가기엔 불가능한 까닭이다.
만약 이곳에 있는 게 시우 혼자였더라면 손을 놓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망연자실하게 남아 납치 감금을 기다렸겠지.
그러나 시우는 혼자가 아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여섯이나 있다.
“…….”
최후의 도주로가 닫혔고, 마지막 열쇠는 사라졌다.
적은 강대하고, 시간은 부족하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래 시발, 지금까지는 쉬웠나?”
린네의 말대로다.
포기하기엔 이르다.
반드시 린네까지 구해내어 도주해야 할 역할이 시우에게는 남아 있었으니까.
전제를 다시 짜 가용한 모든 능력을 검토한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찰나를 쪼개어 폭발적으로 가속하는 사고력은 체감 시간을 느릿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우의 아인에는 방도가 없다.
5년간 구상 및 제작한 차원이동식은 ‘문’이 닫힐 경우를 가정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건 붉은가지의 존재, 그리고 리디아.
더 정확히는 그녀가 발휘하는 관념 계통의 마법.
시우는 여태 붉은가지의 왜곡장을 ‘마법적으로 치명적인 방사성 역장’으로만 사용해왔다.
그러나 붉은가지의 원소유자인 적기사가 보여준바 관념을 다루는 ‘왜곡’의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생과 사의 묘리를 뒤섞어 죽어도 부활하는 불사의 군세를 만들 수 있었다.
좁디좁은 빗물터널을 대광장에 필적한 넓이로 만들 수 있었다.
엘로아와 시우 사이의 간격을 왜곡해 이격해 낼 수 있었다.
활용의 범위만 넓힌다면 모든 것을 이뤄낼 수 있는 만능의 예장.
시우가 다루고 있는 붉은가지는 본 성능의 50%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시우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 왜곡 능력을 활용하려던 시도를 몇 차례고 해보았다.
문제가 되는 건 관념 계통의 마법이 시우의 기존 스타일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계산과 이성의 영역이 아닌 직관과 감각의 영역.
수학자 출신인 시우의 체계화된 마법과 모호한 관념을 다루는 방법은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지금의 시우는 린네와 리디아의 전투를 보았다.
물론 23 위계의 마법을 얼핏 보았다고 해서 깨달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관념을 다루는 방법론의 골조를 목격했다는 건 중요하다.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왜곡이란 관념을 전부 자유자재로 다룰 필요는 없다.
가령 본디 닫혀있는 문을 ‘열려 있는 상태’로 잠시만 왜곡할 수 있다면?
“이건….”
자신만의 세계에 파묻히던 시우는 전율을 느꼈다.
초유의 위기를 목전에 두고 맞이하는 새로운 경지를 향한 깨달음.
격변을 이룩한 ‘아인’이 뒤흔들리며 위태로워 보이는 계단이 시우의 앞에 놓인다.
저 하늘까지 맞닿은 금빛 계단은 아인에 투영된 시우의 심상이자 철학.
무모할 지라도, 강대한 적에 비하면 미력한 약자의 처지일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몸부림치는….
삶을 향한 투쟁.
시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계단은 위험하다.
오르다 발을 헛디디거나, 계단이 바스러지는 순간 저 황금빛 계단 아래 펼쳐진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발을 뻗고 달려나간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짙은 안개에 덮인 지평을 넓히듯 사고가 확장된다.
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없었기에 무의식 속으로 파편이 되어 사라졌던 영감과 깨달음이 망각의 어둠을 뚫고 부유한다.
그것은 인간의 정보 여과 능력을 아득히 초과하는 농도였다.
시냅스가 불타오르는 듯한 두통에 고통받고 있자면 어느새 자신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평지를 내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불분명해져 갔다.
3.
싸움이 시작된 지 고작 1분.
“후우…. 후우….”
린네의 몸은 만신창이었다.
사실 이 자체도 린네가 풍부한 전투 경험을 살려 만들어낸 기적에 가까웠다.
폭발적인 추진력을 바탕으로 강경파와 온건파, 그 사이에 미묘한 알력이 감도는 중립지대를 파고들었다.
강한 마법을 행사하면 자칫 타 파벌에 피해가 가게끔 교묘한 사선을 유도하며 시간을 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어디까지나 시간 벌이.
-쐐애애액!
눈꺼풀 위의 피가 딱딱히 굳어 제대로 뜨지 못하는 린네의 옆구리로 날카로운 창이 날아든다.
식별했으나 움직이지 않는 두 팔.
최소한 일격에 즉사하는 걸 피해 보기 위해 몸을 비틀려던 린네.
-콰과광!
벼락이 치는 듯 거대한 소리와 함께 창날이 번뜩이며 빗겨나간다.
설마하니 조력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던 린네의 눈에 비치는 건 수녀복을 입은 구도의 마녀.
“도로시…?”
“하나 빚 진 거다? 갚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녀는 가볍게 윙크하며 대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로시는 곧장 검을 휘둘러 집결된 창을 흘려낸다.
절대적인 수비를 자랑하는 도로시라면 린네보다는 오래 시간을 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구도의 마녀?”
“도로시 언니가 왜…?”
“상관없어, 둘 다 죽여!”
갑작스러운 배신에 술렁이는 마녀들이지만, 그럼에도 중과부적인 것은 명명백백하다.
도로시와 린네는 나란히 수세에 몰렸다.
“멋지게 등장하자마자 궁지에 몰리는 건 모양이 안 사는데~”
쇄도하는 마법과 그 마법을 위해 무방비하게 등을 내어준 대마녀들 사이로.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렸다.
이따금 소나기처럼 내리는 헥센나흐트의 호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빽빽한 물줄기.
호흡만 해도 입과 코에 물이 차는 두꺼운 커튼 같은 폭우가 디그니티 타운 전체를 덮는다.
“이건 뭐야?”
“마력장이…?”
게다가 그것은 단순한 빗방울이 아니었다.
살상력은 전무하다시피해도 한 방울 한 방울이 강력한 마모 능력을 지닌 입자 마법.
맞닿을 때마다 뜨거운 커피에 녹아내리는 각설탕처럼 방어 체계가 망가진다.
그것은 자율방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20 위계에 갓 걸친 자부터 23 위계의 몇몇 마녀까지 예외 없이 자율방어가 깎여나간다.
이는 보기보다 심각한 혼란을 일으켰다.
신원 불명, 정체불명의 마법이 방어 능력을 무력화했다.
이는 온건파, 혹은 강경파, 혹은 내부 배신자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서로를 날카로운 눈으로 경계하던 공적들 사이의 긴장감을 최대치로 증폭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좋아! 이제 튀자!”
그 틈을 탄 도로시는 린네의 허리를 감싸고 수직 강하한다.
그 뒤를 따르는 금발의 마녀가 있다는 사실을 공적들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