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40화 (740/917)

#740

1.

때때로 인간은 너무도 거대한 것과 마주했을 때 존재의 왜소함을 느낀다.

이를테면 해일.

수톤에 달하는 방파제를 뿌리째 뒤흔들며 도시를 쓸어내는 자연재해.

이를테면 핵무기.

언젠가 인류 문명을 원시 수준으로 퇴보시키리라 예측되는 인재.

그러나 일신의 힘이 자연법칙을 거슬러 역천의 경지에 닿은 대마녀 쯤 된다면.

그런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다.

대마녀란 자연재해로부터도, 핵폭발로부터도 무리 없이 살아남는 초월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시우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건 오랜만이었다.

까마득한 격차와 벽을 느꼈을지언정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력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반경 수 킬로미터에 가까운 둥근 하늘을 가득 메우는 형형색색의 마력장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력감을 일깨운다.

저 하늘엔 헥센나흐트의 핵심전력이 모여있다 봐도 좋았다.

1대1로 상대한다 해도 진땀을 빼거나 패배할 가능성이 농후한 인물들이다.

설령 스승님이 옆에 계신다고 해도 뾰족한 답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이런 상황에서 시우 혼자 뭔가 할 수 있긴 한 걸까?

저항이니 도주니 운운할 상황이긴 한가?

붉은가지를 쥔 손에 힘이 절로 빠져나간다.

운석 충돌을 기다리는 최후의 인류처럼.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파멸의 빛 무리를 망연자실하게 올려보고 있을 따름이다.

그때.

-빡!

“정신 차려라.”

뼈마디가 뻐근해지는 등짝 스매시가 정신을 일깨웠다.

뒤를 돌아보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는 린네가 검을 뽑아든 채 서 있다.

“이대로 포기할 셈인가?”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의지가 서린 말은, 곧 듣는 이의 냉철함까지 얼마간 되찾아준다.

패닉에 빠져서 입만 벌리고 있던 즐라타도 입가로 흐르던 침을 쓱 훔쳐냈으니 말이다.

“그럴 리가요.”

느슨해졌던 손아귀에 다시 힘을 준다.

포기? 당치도 않다.

견습마녀 수준의 마법만을 간신히 구사하던,

심지어 낙인도 없어 마력수를 활용해야 했던 노예 시절에도 21 위계 에아 사달멜리크와 맞섰다.

단순한 위험도로 따지자면 그때와 크게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무모한 짓이라면 이골이 났습니다.”

게다가 시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연인도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기엔 죽음으로 인해 눈물 흘릴 사람이 너무 많다.

“뭔데뭔데뭔데!”

“보시다시피, 좆됐습니다. 튀어야죠.”

“…이거 도망칠 수 있는 건 맞지?”

“해 봐야죠.”

난데 없는 상황에 대충 옷을 갖춰 입고 뛰쳐나온 앨리스.

“언니! 진짜 제가 엄청 사랑하는 거 알죠?”

“저도 다음 생엔 언니랑 함께하고 싶어요!”

“마냐! 넌 깍쟁이지만 사실은 좋은 친구였어! 너랑 침대 위에서 보냈던 나날은 잊지 않을 게!”

“말리샤, 넌 재수 없지만 사실 나보다 쌍꺼풀이 짙어서 질투했었어! 지금까지 솔직하게 굴지 못해서 미안해!”

눈물과 콧물을 빼며 신파극을 찍는 마냐와 말리샤.

“시우 씨…. 원망 안 할게요. 그래도 마지막에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어딘가 체념한 예빈까지.

“조용.”

좌중의 소란을 한마디로 휘어잡은 린네가 시우에게 말했다.

“헥센나흐트의 대마녀는 파벌을 이루고 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 새삼스레 뻔한 말을 꺼낸다면 그 안에 함의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나름 머리가 굴러가는 시우답게 린네가 건네준 단서로 즉각 상황을 도출해냈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겠군요.”

“그래, 포기하기엔 이르다.”

확실히 아직 희망이 있다.

알다시피 헥센나흐트는 신 클리포트의 주축으로 한 강경파와 솔리두스 상단을 주축으로 한 온건파로 나뉜다.

또한 약 2할가량은 그 사이에서 적당히 중립을 지키고 있다.

그말인즉, 눈에 보이는 저 압도적인 전력이 같은 목적과 지휘체계를 갖춘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천라지망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수직 도시에서 디그니티 타운에 고립된 시우와 린네는 문자 그대로 독 안에 든 황금 쥐.

포획의 과정 자체보다는 논공에 눈이 쏠릴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파벌에 몸을 담은, 또한 그 파벌 안에서도 어떻게든 제 배를 불리려는 손익계산이 쉴 새 없이 이뤄지고 있을 터.

또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

리디아와 린네가 그랬듯 공적들은 상호 불신이 패시브로 창작된 존재다.

헥센나흐트 내부에서 폭력행위를 금지한다는 불문율이 깨졌다.

한번 깨진 규칙은 가뜩이나 만연한 공적 간의 불신을 확산하겠지.

눈 앞의 보물에 정신이 팔려 달려나가다간 등 뒤에서 날아온 광범위 마법에 우연찮게 휘말려 ‘사고사’할 수 있다는 걸 암암리에 알고 있다.

그 증거로 시우와 린네를 향한 적들의 접근은 예상보다 빠르지 않다.

오히려 빠르게 접근해오는 건 디그니티 타운에 거주하던 마녀들.

그들은 ‘한탕’을 노리며, 혹은 조금이나마 숟가락을 얹기 위해 소극적인 마법 행사로 견제해오고 있다.

-피유우우웅! 퍼벙퍼벙!

새된 소리를 내며 떠오른 불똥이 백린탄처럼 공중에서 작렬해 약재상점을 덮쳤다.

하얀 연기를 뿜으며 타오르는 불꽃은 실제로 백린이 불태워 피워낸 연금마법이다.

“칼라 저 씹년봐라? 옆집이라고 약재 싸게 해줬더니!”

즐라타가 울분의 찬 목소리로 외치는 한편.

칼라라 불린 즐라타 이웃주민의 어정쩡한 마법 사용은 훌륭한 트롤링이었다.

끽해야 16 위계 짜리 불똥은 앨리스 혼자도 떨쳐낼 수 있었고, 잔류한 연기는 골목마다 퍼져 훌륭한 연막이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물론 단순히 눈속임만으로 저만한 고 위계 마녀를 따돌리는 건 무리다.

그러나 시우 측엔 은폐 전문인 마녀와 린네의 합동 마법이 있다.

아무리 화력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자기들 도시 내부에서 시민이 바글바글한 상황.

거기에 생포해야 가치가 높아지는 시우까지 있으니 목표물도 시인하지 못한 채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건 어려울 터.

“두 분, 전에 사용했던 마법 기억하시죠? 지금 바로 사용해주세요.”

두 사람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리며 온몸을 갑주로 감싼다.

돌파를 위해 즉각적인 포메이션을 검토한다.

고화력 투사와 전방위 수호가 가능한 앨리스가 전위.

보호받아야 할 역할이자 서포터인 마냐, 말리샤, 예빈, 즐라타가 중위.

아마도 가장 위험할 후위는 린네가 자처해 섰다.

시우가 구상했던 차원이동식은 열쇠보다는 문에 직접 간섭하여 뚫어내는 커널에 가까웠다.

출입국 관리소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강제적으로 현세와의 통로를 구축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던 노예 시절의 구상이었던 만큼 투자 대비 효율은 높지 않았다.

‘문’은 케테르가 구축한 차원 마법의 정수인데, 그것을 보안상 취약점을 우회하지 않고 정면에서 해킹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 와서 차선책을 찾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나름 5년의 긴 시간을 들여 두었던 마법이니만큼 믿을 수밖에.

“우선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구도의 마녀가 준 식을 바탕으로 마법을 완성할 거에요.”

시우는 전화번호부 두께와 엇비슷한 두툼한 서류를 팔락팔락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본디 일주일가량을 소모할 예정이었던 작업이지만, 일이 꼬인 이상 여유는 부릴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농밀한 정보를 죄다 암기하려 노력했다.

소설책이라면 불가능에 가깝지만 마법식이라면 아니다.

마법은 일련의 흐름을 지닌 학문이다.

지엽적인 부분까지 모조리 훑을 필요는 없다.

흐름을 잡고, 맥락을 파악해 기억한다.

“정말 되겠어?”

“되게 해야죠.”

“완성한다 치고…. 문까지는 어떻게 갈 건데?”

“우선 이곳에서 시간을 끌다가 완성되는 즉시, 문 앞으로 다 같이 공간도약을 할 겁니다. 그전까지는 최대한 많은 마녀 사이에 부대껴 있는 편이 좋아요.”

곧장 문앞으로 도약해버린다면 자연스레 헥센나흐트의 최심부 선박이 오가는 바다와 접하게 된다.

그 경우 인구밀도는 대폭 낮아지고, 약간의 손실을 감수한 폭격이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

해수가 도시의 피해를 줄이는 완충재 역할을 해줄 테니 말이다.

차라리 디그니티 타운의 주거구역을 빠르게 이동하며 다른 마녀를 엄폐물로 삼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탈출할 수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더 적극적으로 나설 테니까요.”

하지만 게헨나에 빗대자면 아무리 보더 타운 격에 불과한 도시라도 마녀의 소굴이다.

그들은 가만히 있는 기다려주는 엄폐물이 아니었고, 그 이전에 마녀다.

이만한 수가 있다면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콰앙!

응축된 공기가 약재상점을 단숨에 깔아뭉갰다.

그 어떤 철거장비를 사용한 것보다 깔끔하게 먼지가 된 약재 상점.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백린 연막과 분진 속에서 긴급 탈출을 감행한 일행의 그림자가 뒤를 잇는다.

잠시도 방심할 틈 없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마법 세례.

당장 적극적인 교전 의사를 보이는 이는 없다.

린네 하나만 해도 추방자와 공적들에게 꺼려지는 인물이니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저 먼발치에서 돌만 던져대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숫자.

종류만 해도 수십에 달하는 견제용 투사체가 쉴 새 없이 날아든다.

당장 확연한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 소모는 누적되는 법.

“무궁한 변화여!”

수은을 사용해 전방위적인 방어를 수행할 수 있는 앨리스가 아니었다면 시우는 식의 해석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한 채 쏟아지는 불똥을 쳐내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계속해야 한다.

위치가 특정되지 않게끔 분주히 디그니티 타운을 누비면서도 계산을 계속한다.

외부의 공격은 최대한 앨리스와 린네에게 일임한 채 차원이동식의 완성에 전념한다.

한계를 넘어선 계산에 뇌가 수플레처럼 뜨겁게 부푼다.

“제발 빨리해줘! 나 힘들어!”

“방해하지 마라. 내가 돕겠다.”

30초 만에 우는 소리를 하는 앨리스의 외침도.

검풍으로 마법을 쪼개며 가세한 린네의 목소리도.

지금의 시우에겐 닿지 않는다.

극한에 다다른 집중력이 시각 및 청각까지 흐릿하게 퇴화시킨 나머지, 시우의 눈에 보이는 건 검은 공간 속 떠오른 거대한 구조물뿐이다.

프렉탈 형태를 취하며 하늘을 향해 높게 뻗은 나무.

그 마법을 도로시가 건네준 ‘문’의 정보에 대입한다.

-딸깍 딸깍 딸깍

옷핀으로 자물쇠를 푸는 감각.

이어 금속이 맞물리는 명쾌한 소리와 함께 열쇠를 손에 쥔다.

“이제 됐습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난 시우는 즉각 좌표이동식을 사용해 문 근처로 다가서려 했다.

현세로 빠져나가 깨끗한 수면 근처로 갈 수만 있다면 시민증을 통해 게헨나로 도주가 가능할 터.

도로시가 준 이 좌표라면 아마 태평양 섬 어딘가 쯤이니 곧장 튈 수 있을 것이다.

-구구구구구구궁!

그러나.

세계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이변이 시작되었다.

굉음의 근원지는 핵센나흐트의 둥근 바다를 감싸는 거대한 문.

평소엔 반쯤 가라앉아 실루엣만을 보이던 황금빛 문의 테두리가 진하디진한 검은색으로 물든다.

동시에 그 여파에 휘말린 거대한 선박들이 격렬하게 들끓는 바닷물 위에서 조각조각 난다.

“…….”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시우의 눈에는 보였으니까.

주머니 차원을 만들고, 세계의 근간을 유지하는 차원 마법의 정수.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닫힌 적이 없는 문이 지금 이 순간 닫혔다.

도로시가 기껏 구해준 마법식은 휴지쪼가리가 되었고, 시우가 기껏 만들어낸 차원이동식 역시 전제를 뒤집어 계산해야 하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이제 정말 끝이라는 이야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