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7
1.
“아….”
린네는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팔을 느낀다.
몸을 집어삼킬 것처럼 푹신푹신한 침구류도, 등과 맞닿은 살결에서 전달되는 따뜻함도 여실히 느껴진다.
이로써 그의 품에서 일어나는 건 두 번째이다.
볕 좋고 날 좋은 날 코끝을 간질이는 산들바람에 잠깐 낮잠에서 깬 것처럼.
계속 자고 싶다는 나른한 충동은 어찌나 포근한지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는 본디 린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낙인에는 결핍의 저주가 새겨져 있었고, 이런 소박한 행복을 느낄 자격조차 앗아가 버렸으니.
시우가 마력증폭을 활용하면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도 린네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세상은 낙관적인 기적을 허락하지 않는 가혹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평안한 순간도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편히 잠든 린네는 애써 되뇌었다.
아주 잠깐 쥐었다 놓쳐버리는 행복보다는 차라리 비관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으니 말이다.
“…….”
하지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려도 포근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도 해제할 수 없던 결핍의 저주이자 목줄은 더는 린네를 속박할 수 없었다.
타인의 품이 이리도 따뜻할 수 있다니, 이불에 누워있는 것만으로 이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기쁨보다는 낯섦을 느낀다.
안도라기엔 위화감을 느낀다.
“읏.”
그때 콩 벌레처럼 몸을 둥글게만 린네가 아랫배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잠결에 무뎌졌던 성감이 정신이 맑아짐에 따라 찌르르 시간차 공격을 해온 것이다.
뭉게뭉게 떠오르는 광란의 밤.
정숙한 여인의 모습은커녕 다리 한쪽을 활짝 들고 암캐처럼 헐떡였다.
클리 딸딸이를 당하며 기절하고 깨기를 반복했다.
침대 위에서 시우는 폭군이었으며 린네는 그의 거친 손길에 희롱당하는 가련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
린네는 몸을 빙글 돌려 누웠다.
단잠에 빠진 그의 얼굴이 보인다.
저번 성교는 이번보다 훨씬 선방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나자마자 그의 가증스러움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이 가시질 않았었다.
단순히 못난 꼴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승리와 강함에만 집착하던 삶의 태도가 침대 위에서의 패배조차 결단코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리라.
그때를 1차전이라고 본다면, 이번 2차전은 실로 참패 중의 참패였을 것이다.
뜨거운 씨앗이 뱃속에 퍼질 때, 존댓말로 아기를 가지고 싶다고 아양을 떨었을 때.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결국 침대 위에 사정없이 짓눌린 채 교성과 함께 질내사정을 당할 때.
젖꼭지와 새싹을 따끔거릴 때까지 꼬집혔을 때, 또 그 탓에 무자비하게 가버렸을 때.
그 모든 순간 린네는 형편없이 패배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분한 마음이 아주 조금도 들지 않는다.
평생을 군림하며 살아온 린네가 남자 아래 깔려 계집애처럼 엉엉 울어버렸음에도.
불쑥 마음에 솟는 건 승부욕과 패배감이 아닌 달콤한 내면의 귓속말뿐이다.
‘낭군에게라면 몇 번이나 지고 싶다’라는 귓속말 말이다.
“하아암….”
린네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언제나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살아왔던 린네에겐 이조차도 생경한 경험이었다.
조금 더 그의 품에 꼭 안겨 자고 싶다.
린네는 구태여 시우를 깨우지 않고 꾸물꾸물 이불을 파고들어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쿵쿵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가 기분 좋은 달콤한 늦잠이었다.
2.
쿨쿨 자던 린네가 기상한 건 3시간 뒤.
시우가 이미 일어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푹 주무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마주친 시우의 얼굴에 깜짝 놀랐던 린네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르토닌이 왕창 분비되어 하늘하늘 떠다니는 듯했던 조금 전과 달리, 막상 깨어난 신시우와 대화를 나누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말이다.
또한 어떤 사건을 겪고 저 혼자 감상을 품는 것과 그것을 타인에게 표현하며 행동에 적용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가 린네의 낭군일지라도 어찌 됐건 여자로서 못 보일 꼴을 보인 건 사실이 아닌가?
아무리 그가 여성이 기품을 잃고 쾌락에 허덕이는 걸 좋아했다 한들 새삼 ‘너무 과하지 않았나?’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지당한 일이다.
“…….”
그런 의미에서 필로우 토크는 린네에게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입을 꾹 다물고 꽁꽁 얼어붙은 린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전부이다.
“스승님?”
“스승님은 싫다.”
그럼에도 시우의 부름에는 반사적으로 답하고 마는 린네.
잠깐 놀란 듯한 시우가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린네는 이불을 끌어올리고 시선과 대화를 피했다.
“린네 님.”
사실은 ‘님’도 싫지만 거기까지는 지적할 여력이 없는 린네였다.
그리고 이렇듯 사정없이 부끄러워하는 파트너를 본다면 놀려지고 싶은 게 남자의 마음이리라.
“그렇게 쑥스러우세요?”
“…….”
“어제는 존댓말도 잘 써주셨는데.”
“…….”
시우가 빙글거리며 놀리자 스르륵 내려온 이불.
벌게진 얼굴을 코 끝까지 겨우 빼낸 린네가 물었다.
“낭군은…. 존댓말이 좋아요?”
“…….”
이번에는 시우가 한 방 먹을 차례였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요망한 린네의 갭.
어제 5번이나 사정하고 지쳐 쓰러져 잠들었음에도 린네를 다시 덮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린네, 어젯밤에 좋았어?”
린네의 존대와 시우가 처음으로 내뱉는 반말.
여태까지와는 정반대의 상호호칭이다.
두 사람의 입장 역전과 상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흠칫 놀란 린네지만 고민 끝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만큼 그녀의 발이 괜스레 부산해지는 게 느껴졌다.
일어나자마자 모닝 정복감을 느낀 시우는 툭 무심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보여줘.”
“…그건….”
“빨리.”
괜히 엄숙히 채근하는 말투.
주저하던 린네가 허물 벗듯 이불 밖으로 나온다.
그녀의 몸 곳곳은 시우가 강하게 주무르고 끌어당긴 탓에 아직도 울긋불긋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린네는 눈을 질끈 감고 시우의 손을 이끌어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가져갔다.
어제 시우가 분명 청결 마법을 사용하고, 또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정액이 빠져나오길 기다렸다 꼼꼼히 닦아 주었는데도….
-찌걱
“이만큼…. 좋았어요.”
린네의 모찌는 온종일 애무를 한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어젯밤을 떠올리는 그 짧은 사이에 이만큼 젖어있는 것이다.
“뭐가 제일 좋았는데?”
“믓…!”
귀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옴에도 부끄러운 경험을 제 입으로 실토해야 하는 수치스러운 순간.
시우의 손끝이 린네의 쫀득한 살속을 파고든다.
“낭군님한테…. 패배할 때…. 그리고, 몸부림치다가…. 제압당해서… 안에 사정 당할 때…. 힉…!”
“또?”
“앞이랑 뒤에…. 막막 번갈아 찔릴 때…. 하아….”
어느덧 린네의 한숨도 새빨갛다.
절로 응석이 베여나오는 말투는 괴롭혀지고 싶다는 욕구를 완곡히 표현하는 듯하다.
“그리고 또…. 클리 딸딸이 억지로 시켰을 때…요.”
이정도면 당장 린네를 덮친다 해도 판사님도 정당방위를 인정할 것이다.
원고가 지나치게 요망하고 음탕했다! 라고 말이다.
“지금 또 박히고 싶어?”
“……네.”
“안가고 버티면 박아 줄게.”
-찌걱찌걱찌걱
“흐믓!”
시우의 굵은 손가락이 린네의 질 천장을 긁어내듯 자극한다.
“안대요…. 안대요…. 린네 못 버텨요….”
“고작 손가락도 못 버텨?”
“린네…. 린네…. 거기는 하응…! 너무 허접해서 손가락도 못 이겨요…. 히윽…!”
“교육이 좀 필요하겠네.”
흥분한 린네와 흥분한 시우의 대환장 콜라보.
두 사람이 정신줄을 놓고 묘한 롤 플레이로 끌려가려는 순간….
-벌컥!
“아주 난리들을 피워요.”
누군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젯밤 시우가 마력 증폭을 차단하기 위한 차폐장과 소리를 막기 위한 차음막을 펼쳤음에도 침대가 거칠게 마루를 긁는 소리에 괴로워해야 했던 집주인 즐라타였다.
앨리스와 연인들은 저들끼리 보비적대느라 며칠 전부터 난리고, 윗방 커플은 밤새 층간 소음.
꾹 참고 버티다 보고 사항이 있어 올라왔더니만 대낮부터 아주 염장질을 하고 있으니 열불이 솟은 것이다.
“여기가 러브호텔인 줄 알아? 이년이고 저놈이고 그만 좀 해! 검의 마녀! 당신은 아프다면서!”
즐라타는 린네의 어리광과 유약함이 오직 시우 한정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언제 침대에서 뛰어내렸는지, 또 언제 검집을 들어 올렸는지, 또 언제 이불로 몸을 감쌌는지 모를 사이 즐라타의 턱밑에 척 들이밀어 진 검집.
린네의 차가운 시선을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 검의 마녀라는 이명에 걸맞았다.
“부부의 사생활에 간섭 마라.”
“나도 니네 사생활 안 궁금해! 그냥 좀 살살하면 안 되나? 응?”
어지간하면 식겁했을 즐라타지만 그간 쌓인 울분은 적지 않았는지 물러서질 않는다.
사실 은신처 제안도 반쯤 울며 억지로 받아들인 것 아니던가.
다른 때였다면 겉이 번지르르해도 확실히 이행될지 모르는 불안한 계약에 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거 참…. 면목이 없네요. 스승님, 검집은 내려놓으시죠.”
시우가 정중히 사과하며 린네의 어깨에 기모노를 둘러주자 린네도 팔을 거두었다.
린네가 뒤늦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은 상황 보고를 듣는 게 먼저다.
즐라타가 전한 말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희보였다.
“구도의 마녀와 접선에 성공했어. 이게 헥센나흐트 ‘문’의 마법식이래.”
“도로시 님과 함께 오시진 않았나요?”
“괜히 이목을 끄는 것도 좋지 않고, 본인은 예비 전력으로 남아있겠다네.”
“그렇네요.”
“너랑 어떤 계약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몸 사리는 거지 뭐.”
언뜻 보기에 그렇지만 아닐 것이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도주 행렬에 끼어 있기보다는 외부에서 상황을 주시하며 변수에 대응하려는 것이겠지.
실로 도로시다운 합리적인 판단이다.
“다들 불러주시겠어요?”
아무튼 이렇게 최후 퍼즐이 맞춰졌다.
마법식을 참고해 차원이동식을 완성하기 전에 마지막 회의를 할 시간.
“예빈 씨랑, 앨리스 님이랑, 마냐, 말리샤…. 그리고 흑색의 마녀님까지도요.”
마지막 본명도 모르는 마녀를 입에 담는데 뜸을 들인 건, 텅 빈 인형처럼 온종일 피나를 안고 있는 마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까닭이다.
“잠깐만.”
시우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즐라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흑색의 마녀가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