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3
1.
잠깐 기다리라던 린네는 예빈과 함께 1층으로 향했다.
절대 나오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며 말이다.
잠시라기엔 살짝 긴 시간.
영문을 알 수 없으면서도 잠자코 기다리고 있자 린네가 돌아왔다.
손에 일식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찬합을 들고 말이다.
“이게 뭔가요?”
시우가 린네의 무의식을 들여보긴 했으나, 그 기억은 대체로 그녀의 불행한 과거사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이 장어덮밥과 키모스이라는 것까진 눈치채지 못했다.
“열어봐라.”
돌고 돈 끝에 드디어 시우의 손에 들린 린네 수제 정성 듬뿍 신부 장어덮밥.
“와.”
뚜껑을 연 시우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뚜껑이 열리자 단숨에 코를 자극하는 향긋한 짚불 내음.
잔뼈를 곱게 다져 잘라낸 장어가 달콤함과 짭조름함을 겸비한 간장 소스로 때깔 고운 화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만 보아도 매우 먹음직스럽다.
그러나 얼핏 너무 느끼하고 헤비 해 보일 수 있는 장어 덮밥을 플레이팅이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잘게 다진 우엉과 차조기, 홍초로 절임 한 생강까지.
낙엽이 진 가을녁 정원을 보는 것 같은 화사함이 보는 맛까지 꼼꼼히 챙기고 있다.
“정말 예쁘네요.”
“그런가?”
린네는 무덤덤하게 답하며 함께 들고 온 찻잔에 키모스이와 녹차를 나눠 따랐다.
알다시피 영체는 굳이 식음을 필요치 않다.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린네의 아래 잡혀 살며 먹은 음식이라곤 디그니티 다운의 바에서 마신 모스크 뮬이 전부였다.
그런 시점에서 감칠맛 쫙쫙 돌 것 같은 장어의 빼어난 자태가 어찌 감탄이 나오지 않겠는가?
“맛있어 보입니다.”
“편히 들어라.”
본디 정통 일식에선 젓가락만을 사용하지만, 조선 출신인 낭군을 위해 수저까지 알뜰살뜰하게 건넨 린네.
시우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
그리고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게 부담스러웠던 시우는 아무 생각 없이 같이 먹을 것을 제안하려다 아차 싶었다.
그리곤 이내 결심했다.
갑자기 말을 꺼내기도 곤란한 주제이고 우선은 식사가 먼저이겠지만 말이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기다려라.”
“네?”
대망의 첫술을 뜨려는 때 린네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느리지만 아주 능숙한 손길로 시우의 손에 들린 숟가락을 빼내가는 린네.
잠깐의 고민 후 장어와 밥이 고루 담기게 한 스푼을 떠낸다.
놀랍게도 그 숟가락의 머리가 가리키는 곳은 시우의 입이었다.
“아, 해라.”
“아?”
린네가 보여준 갭에 여전히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입을 벌린 시우.
그 안으로 쏙 밥을 떠먹여 주는 린네.
맛있다.
따끈하고 고슬고슬한 쌀밥과 이로 씹는 순간 탱글함이 느껴지는 장어의 식감.
너무 달거나 짜지 않고 감칠맛을 최대로 이끌어낸 양념과 숯불의 조화를 음미하고 있자면, 어느새 넘쳐흐른 장어 육즙과 기름기가 혓바닥을 매끈하게 코팅한다.
동시에 밥알 사이로 톡톡 씹히는 초생강의 산미가 느끼함을 느낄 새도 없이 중화한다.
얼떨떨한 상황에도 조금도 무뎌지지 않은 훌륭한 맛이다.
“이건 키모스이다. 장어의 간을 맑게 우려낸 육수니 함께 즐겨라.”
“아, 네네, 감사합니다.”
다 씹고 넘기자 이번에는 린네가 싹눈파와 팽이버섯이 동동 떠있는 찻잔을 건네준다.
기본 베이스는 소금.
장어 덮밥과 달리 기름기가 거의 없어 정갈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이것도 맛있습니다.”
“그런가.”
조신하게 소매를 걷고 다시 수저를 움켜쥐는 린네를 보고 나서야 시우는 현재 상황이 완전히 파악되었다.
이거 완전 그거 아닌가?
어지간히 닭살 돋게 붙어있는 커플도 쉽사리 시도하지 못한다는 ‘어미새 식사법’.
그걸 린네가 시우에게 행한 것이다.
“자, 아.”
이게 참, 싫은 건 아닌데 엄청 부담스럽다.
게다가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도 없을 진데 부끄러움은 시우의 몫이다.
“스승님, 괜찮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겠다.”
“아닙니다.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결국 두 입째를 먹자마자 조심스레 사양하고 말았다.
이렇게 한 끼를 통째로 먹는다면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겠다.”
하지만 린네의 충격적인 행보를 확인하는 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널 위해 만든 요리니 직접 대접하고 싶었다.”
“원래 요리 잘하셨나요?”
“얼마 전에 배웠다.”
“…….”
이게 정말 같은 사람이긴 맞는 건가?
다시 말하지만 시우가 린네를 한층 이해하게 되었다 한들, 또 그녀로부터 지아비로 섬기겠다는 말을 들었다 한들 이러한 행동이 단숨에 납득될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은 서릿발처럼 싸한 시선을 보내던 매도 모드 린네다.
또 가장 많이 보았던 모습은 연무장에서 죽어라 시우를 두들겨 패던 야차 모드 린네였다.
그랬던 그녀가 다시 만나자마자 수제 요리까지 대접하고 손수 먹여주려고까지 한다면 적응 안 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3분의 1 정도는 남겨서 녹차를 말아먹으면 더 좋다고 배웠다.”
장어덮밥을 끝까지 맛있게 먹는 법에 대한 강의까지 듣고 난 이후 식사가 끝났다.
2.
린네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시우도 원치 않게 그녀의 비밀을 파헤친 셈이 되었다.
그렇다면 시우 역시 숨겨두어야 했던 사실을 밝혀야 할 때이다.
“스승님, 사실 제가 한 거짓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라.”
“성교 시 마력 증폭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기만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만도 아니다.
린네는 결핍의 저주를 안고 태어났고 이 저주는 낙인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낙인의 치유에만큼은 정평이 난 매직스틱을 이용한다면….
어쩌면 린네가 견습마녀가 된 이후 차게 된 목줄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발상 때문이었다.
손수 만든 장어덮밥을 먹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건, 강해지는 것 이외에 아무런 실감을 얻을 수 없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니 말이다.
만약 시우가 그녀의 목줄을 풀어줄 수 없더라도 딱히 손해는 아니다.
리디아와 격전을 벌이며 대량 소모된 린네의 마력 회복은 회복될 것이며.
시우는 그녀의 자성마법 중 한 가지를 새로이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밑져야 본전인 양자이득의 선택지인 것이다.
“말해라.”
린네의 귀가 솔깃하는 모습을 보니 기껏 식사로 데워두었던 속이 싸해졌다.
“실은요….”
그걸 알면서도 식사 이후까지 미뤄둔 건….
사실 조금 쫄렸기 때문이다.
이제껏 시우는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든 낮추기 위해 마력 증폭의 조건을 숨겨왔다.
그 결과 린네는 시우 앞에서 온갖 수치스러운 행동을 해야 했다.
만약 상기 결과물들이 기만에 의한 것이라는 걸 알면 린네가 정말 화를 내진 않을지 살짝, 아니 많이 걱정된다.
“그 전에,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너를 지아비로 섬기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답을 듣지 못했지. 강요할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지만 알 수 있다.
“누구보다 순종적인 아내가 되겠다. 그대를 나의 반쪽 삼고, 나는 그대의 반쪽이 되어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널 낭군으로 섬기겠다.”
린네는 지금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마녀의 몸이라 건강한 아들을 안겨줄 수는 없겠지만, 그 빈자리만큼 헌신하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더욱 노력하겠다.”
“…….”
왜냐하면 언제나 똑바로 바라봐오던 눈동자가 침착함 없이 이곳저곳을 방황했으니 말이다.
이건 린네에게 있어 고백을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시우로선 곧장 답하기 힘든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부디, 내 가족이 되어주길 소망한다.”
이 순간만큼은 올곧게 바라보는 린네의 시선.
하지만 시우는 즉답하지 못했다.
“저는…. 당장은 답해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시우가 알던 린네와 실제 린네가 같은 사람이 아니듯.
린네가 아는 시우와 실제 신시우는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것도, 의도적으로 기망한 것도 많다.
이대로 얼씨구나 린네를 보쌈하는 게 사기꾼의 소행밖에 더 될까.
그 전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
“우선 저는 강함 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삶도 아니고…. 싸움을 막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알고 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답하는 린네지만….
“게헨나에 연인이 많습니다. 티페레트 공작님 역시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게헨나로 돌아가야 해요.”
린네는 이 부분에선 조금 망설였다.
허나 결코 길지 않은 시간 만에 스스로 이해할 답을 찾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상관없다.”
“그렇게 쉽게 단언할 문제인지 잘….”
“그대는 애인들에게 차등한 사랑을 나누나?”
차등한 사랑?
그렇지 않다.
게헨나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연인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소중하다.
페리윙클 누님이 조언해 주었듯 영생을 다해서 아낌없이 사랑할 연인이었다.
“그렇지 않겠지. 나 역시 그와 동등한 애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첩으로도 충분하다. 속박하려 들지도, 구속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가끔 만나러 와주는 것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그럼 아까 말하려던 것까지만 말씀드리고 그때도 스승님 생각이 같은지 여쭤도 될까요?”
“좋다.”
마침내 시우는 속에 담아두었던 비밀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자칫 엄청난 비난을 받을까 어꺠를 움츠리고 있던 그때.
“그렇군.”
린네는 아까 먹은 키모스이보다 훨씬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속았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모습도 없었다.
동시에 목줄을 풀 가능성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없어 보였다.
전자는 린네가 말한 대로 순종적인 아내의 길을 택했기 때문일 것이고,
후자는 아마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400년의 세월 동안 괴로워하게 했던 목줄이다.
갑자기 나타난 낭군이 그 목줄을 풀어준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기엔 린네는 현실주의자였다.
“하나만 확인하겠다.”
“네.”
“그렇다 해도 조금 난폭하고 변태적인 성행위가 취향인가?”
“음….”
핀트에선 약간 어긋났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린네는 그런 그를 힐난하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나 역시 그렇다.”
그저 스르륵 옷고름을 풀고 기모노를 벗었다.
“그대가 날 힘으로 제압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던 마지막 날 밤에 가장 큰 기쁨을 느꼈다.”
시우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왜냐하면 매끈한 린네의 나신 중 유달리 뽀얗고 부드러운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끈끈한 애액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 그대와 단둘이 방에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되어버렸다.”
어찌나 양이 많았는지 둔덕에 찰싹 달라붙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팬티까지 끈을 풀어 벗는 린네.
평소의 무표정과 침착함을 가장하려하지만….
얼굴이 벌겋게 변하다 못해 목덜미와 가슴께까지 분홍빛이 된 린네가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식사를 끝내셨다면…. 후식으로 절 먹어주세요.”
마무리 대사까지 완벽한 린네의 교태.
일전 시우가 시켰던 존댓말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