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30화 (730/917)

#730

1.

반나절.

어머니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갑옷을 입은 자들과, 또 검과 창으로 무장한 병졸과, 또 혼란을 틈타 도적질을 일삼는 무리를 소탕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린네는 새끼 오리처럼 어미의 뒤를 쫓으며 그 모든 광경을 눈에 새겼다.

“이제 내가 너의 스승이니라. 앞으로는 날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승이라 불러라.”

일대의 소탕을 끝내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아비와 오라비, 그리고 식솔의 시신을 한데 모아 태우며 어미는 말했다.

어머니이자, 원수이자, 마녀인 그녀는 린네의 스승이 되었다.

실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참상을 야기한 장본인이 린네가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던 여자의 짓이라는걸.

왜 이런 짓을?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러나 린네는 그것에 의문을 품기 전에, 만행에 분개하기 전에 순종과 순응을 택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보인 강함은 린네가 당장 이겨낼 수 없다고 겁을 먹었기 때문일 수도.

험난한 세상 속 홀로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리라 어린 마음에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아무리 비정한 짓을 저질렀다 한들 린네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자 어머니는 그녀뿐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외도 아닌. 사랑도 아닌.

증오도 아닌. 원망도 아닌.

하얗지도 까맣지도 않은 회색 지대의 어딘가에 선 린네는 스승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릇을 하사받은 린네는 견습마녀가 되었다.

2.

선대의 훈육법은 흡사 사자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새끼를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뜨리고 기어오르지 못하면 버리고 간다는 냉혹한 속설을 말이다.

‘이건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거라. 그래야 내가 널 다시 찾을 수 있으니.’

스승은 갓 견습마녀가 된 린네에게 선물을 주었다.

옥을 가공하고 금을 씌워 만든 값비싼 곡옥이 4개나 달린 목걸이였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비탄을 곱씹을 새도 없이 하룻밤 만에 단도 한 자루와 함께 야산에 버려졌다.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

달도 뜨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속에 홀로 남겨진 린네는 추위와 외로움에 홀로 떨었다.

주위로는 시체를 뜯어먹고 살을 찌운 들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어죽지 않기 위해 나무구덩이 사이에 몸을 웅크린 린네는 두려워질 때마다 어머니가 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행여 울음소리를 듣고 들짐승이 몰려들까 숨을 죽이며 울고 또 울었다.

3.

기본적인 마법적 지식과 함께 그릇을 하사받는 여타 견습마녀와 달리 린네에게 주어진 건 너무도 별 볼 일 없었다.

평범한 성인 남성 수준의 완력, 먹지 않아도 되는 튼튼한 반영체.

앞으로 지독히도 린네의 삶을 망가뜨릴 결핍의 저주뿐.

인육 맛을 알게 된 짐승을 피하고, 밤에는 토굴 속에서 몸을 웅크리며 어머니가 데리러 오길 기다리던 린네 앞에 나타난 건 죽창을 든 화전민이었다.

사흘만에 처음 마주하는 사람.

린네는 화색이 되어 달려나갔다.

어머니가 왜 여기에 린네를 홀로 남겨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저 농민의 도움을 받는다면 조금 더 나은 처지에서 어머니를 기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린네는 피에 절은 갑주를 엮어 등에 주렁주렁 매단 화전민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우뚝 굳어버렸다.

‘야, 이거 횡재했네.’

그는 몇 개 남지 않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죽 웃었다.

바야흐로 전쟁의 시대.

힘없는 민초는 전화의 불길에 휩싸여 덧없이 타오르는 시대이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땅을 잃고, 미래를 잃은 농민은 기꺼이 앙상한 손에 무기를 들고 잔당 사냥꾼이 되는 쪽을 택했다.

패주하고 낙오한 패잔병들을 사냥해 무구를 빼앗는 것은 언제 약탈당할지 모르는 밭을 일구는 것보다 생산적이었고.

더불어 빼앗긴 자가 빼앗는 것으로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잃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설파하는 도덕과 정의는 공허함 울림일 뿐.

잔당사냥꾼의 눈에 홀로 야산을 떠도는 어린 소녀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 그뿐이리라.

하물며 그 소녀가 귀해 보이는 패물을 몸에 지니고 있다면 더욱이 그렇다.

세상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린네가 그런 사정까지 알고 있을 린 없다.

사랑받으면서 자란 아이일수록 세상의 비정한 면은 뒤늦게 들추는 법이고 그 점에서는 린네도 다를 바 없었으니.

그러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영양실조 탓에 흰자에 탁한 회색빛이 도는 이 남자는 린네를 아주 위험하게 만들 인물이라고.

‘거기서라!’

곧바로 등을 돌려 도망치는 린네와 뒤쫓는 화전민.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그는 전리품마저 내던진 채 죽창 한 자루만 들고 린네를 뒤쫓았다.

반영체가 되어 신체 능력이 약간 향상되었다 한들 규중처녀로 자란 린네와 산을 들쑤시고 산 화전민의 속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쫄래쫄래 잘도 뛰는구나.’

폭포가 쏟아지는 절벽 끝에 내몰린 린네는 오도 가도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추례한 행색이라도 감출 수 없는 고귀함.

밭이나 일구던 때는 감히 바랄 수도 없는 미인의 등장은 선량함을 잃은 농부를 홀리기 충분했다.

인육 맛을 알게 된 짐승만이 인간을 잡아먹는 게 아니다.

유사 이래 가장 많은 인간을 먹어치워 온 존재는 같은 인간이다.

‘신령님이 보내주신 색시인 게 틀림없다. 감사합니다 신령님 감사합니다.’

‘하아…. 하아….’

‘자, 그 위험한 건 내려놓고 나와 같이 가자.’

린네는 군침을 흘리며 다가서는 그의 모습에서 저택에서 보았던 도당 무리를 떠올렸다.

그들의 무도함을 검 한 자루로 단죄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그 뒤를 따른다.

이런 흉포한 충동을 재능이라고 불러도 좋은 걸까?

갑자기 뒤바뀐 세상 속에서도 린네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린네는 단도를 부서질 듯 쥐고 얼어붙은 땅을 박찼다.

‘요놈 요놈! 서방님께 안기려고 오는구나!’

소녀의 돌진이 귀엽다는 듯이 웃음 짓는 화전민의 미소는 머지않아 핏빛으로 물들었다.

린네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죽창을 놓지 않는 화전민의 가슴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단도로 난도질했다.

4.

기이한 소문이 돌았다.

토호 사(寺) 뒷산에 소녀의 형태를 한 여우 요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었다.

소녀는 인간이라 여겨지지 않는 미모를 지니고 있다더라.

목에는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곡옥 목걸이를 차고 있다더라.

농민과 낙오무사가 보이는 족족 베어 넘기는데 그 수가 족히 일백을 넘었다더라.

새로운 영주가 요괴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더라.

마지막 소문이 돌 때쯤엔 흉흉한 소문에 관심 없던 인근 마을 농민들도 좌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실제로 영주가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으며 요괴를 잡아온 마을의 세금을 영구히 감면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포획 또는 사살에 성공한 자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치하하겠다는 이례적인 특명 아래 인근 도적조차 합류하여 본격적인 몰이 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거대한 띠를 이뤄 야산을 천천히 포위해가는 가운데.

린네는 하루가 다르게 사냥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고작 한 달 사이의 경험은 린네의 의식을 뒤바꿔놓기 충분했다.

또한 그녀 안에 내재하여 있던 재능을 개화하기에도 충분했다.

입김조차 얼어붙는 극악한 추위에서 몸을 지키는 법을 배웠다.

어둠과 지형을 활용해 기습한다면 다수의 적을 상대할 수 있음을 배웠다.

살가죽이 갈라진 인간이 어떤 악취를 풍길 수 있는지 배웠다.

어느 곳을 찔러야 소리 없이 죽일 수 있는지 배웠다.

갑옷과 큰 칼을 지닌 무사를 상대하는 법에 대해 배웠다.

인자한 얼굴로 물이 담긴 표주박을 건네는 노파도 그 안에 독을 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누구도 린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이가 없었다.

어머니가 옳았다.

삶은 나약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사냥감이 되지 않으려면 사냥꾼이 되어야 했다.

린네는 해가 떠있을 때면 버려진 짐승의 굴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기고.

밤이 되면 노획한 장검 한 자루를 든 채 사냥에 나섰다.

검술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상관없었다.

몸이 가르쳐주었고, 검이 가르쳐주었다.

불과 한 달 전 온실 속 화초에 불과했던 린네는 저주받은 재능에 이끌려 검귀의 재능을 개화해 내었다.

‘끄악!’

‘요, 요괴다!’

‘잡아 잡아!’

‘도망쳐! 도망쳐!’

수풀에서 걸리적거리던 긴 머리칼을 짧은 단발로 쳐낸 린네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며 벼락같은 일섬을 휘둘렀다.

작은 체구를 활용해 경사가 가파르고 나무가 우거진 숲을 빠른 속도로 누비며 십수 명으로 구성된 수색조의 인원을 모조리 도륙 냈다.

‘…….’

불과 3분 만에 제대로 된 지원요청을 하지도 못한 채 바닥을 나뒹굴게 된 시체들.

사지 중 일부가 잘려나가거나 내장이 튀어나와 죽음을 목전에 둔 부상자들.

린네는 그 사이를 누비며 채 뒤집어진 벌레처럼 버둥거리는 농민의 목울대에 부드럽게 칼을 밀어넣었다.

날이 나가버린 장검을 버리고 상태가 괜찮은 무기를 주워든 린네는 지친 발걸음으로 미리 눈여겨 두었던 계곡으로 향했다.

-참방참방

손에 잔뜩 엉겨 붙었던 혈액이 차고 투명한 물속에 붉은 실타래처럼 풀려나간다.

일그러진 수면 위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자화상이 비친다.

‘우, 우웩!’

참지 못하고 신물을 토해낸 린네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은신처를 향했다.

제대로 된 휴식도 없는 극한의 상황 속 무리한 운동은 린네를 마모시키고 있었다.

그릇을 받았으나 그 효과는 마력을 통한 아주 기본적인 신체 강화뿐.

린네는 소녀의 몸으로 이 지옥을 거쳐 가야 했다.

낙엽을 잔뜩 채운 토굴에 털썩 몸을 눕힌 린네는 체온 유지를 위해 잔뜩 몸을 웅크리고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가장 큰 곡옥은 아버지.

제일 작은 두 곡옥은 오라버니.

두 번째로 큰 곡옥은 어머니.

‘아버지. 오라버니. 어머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물러설 곳이 없는 지금.

린네가 매달리는 건 불과 얼마 전임에도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단란한 가족의 나날이었다.

아버지의 앞에서 춤을 추며 재롱을 떨 때면, 오라버니들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어머니가 안아주던.

지극히 평범했던.

그러나 이제 돌아갈 수 없게 된 순간을.

결핍의 저주 탓에 회상한다 해도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었지만.

린네는 편집증 환자처럼 매달리듯 추억을 곱씹었다.

모든 걸 부숴버린 어머니가 밉다.

이해할 수 없다.

증오스럽다.

그러나 사랑한다.

‘어머니. 어머니…. 린네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잘하고 있어요…. 빨리 데리러 와주세요….’

린네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 함께했던 소중한 가족을 미워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따스한 품이 다시 한번 린네를 다정히 안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린네를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두 달 뒤.

마침내 린네가 모든 추격대를 죽이고 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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