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
1.
“후우….”
2층의 허름한 방을 숙소로 배정받은 시우는 형사 드라마에서 하듯 블라인드 사이로 손을 넣어 거리를 내다보았다.
게헨나 이민 패키지를 미끼로 즐라타의 협력을 약속 받은 지 어언 이틀이 지났다.
꽤 이것저것 제안한 것 같은데 그나마 말이 잘 통하는 마녀인 건 정말 다행이었다.
큰 장모님의 분노가 벌써 두려워지긴 하지만 그건 잠시 잊어두기로 했다.
빚이야 할부로나마 갚으면 그만이지만 목숨은 일시불로도 갚을 수 없으니.
이 상황에선 불가피한 협력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력이 필요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드나드는 마녀들.
당장 지금 눈에 보이는 마녀와 다닥다닥 붙어있는 옆집의 마녀가 시우 일행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밀고가 들어올 것이다.
따라서 외출은 당연히 무리고 헥센나흐트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즐라타 하나뿐이며, 그녀가 해줄 일은 아주 많다.
당장 안정적으로 도로시와 접선할 수 있는 인물도 그녀가 유일하다.
“언니, 거기 간지러운데….”
“아흥….”
그때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무덤처럼 솟아오른 이불 아래 꿈지럭거리는 실루엣이 보인다.
그 아래는 교미 중인 민달팽이처럼 끈적끈적하게 얽힌 여체의 향연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쮸웁, 쮸웁.”
바로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마냐와 말리샤 그리고 앨리스의 애정행각이다.
즐라타의 공방은 각종 약재를 쌓아두는 것만으로 벅찰 만큼 협소했다.
그 와중에 린네와 예빈이 치료를 목적으로 가장 넓은 방을 사용 중이니 시우를 비롯한 셋은 같은 방에서 지내야 했다.
문제는 사생활이 있을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앨리스가 시도때도없이 연인과 사랑을 나눈다는 점이다.
재회의 기쁨이 성애의 욕구로 전환된 양 말이다.
인간의 번식본능은 생존의 위기에 가장 왕성해진다고 하던가.
전쟁 직후에 베이비붐이 이는 것도 그렇고, 실제로 시우도 치열한 전투가 끝나고 나면 성욕이 폭발하던 경험이 몇 번 있다.
내일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상황 속 일분이라도 연인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다.
하긴 했는데….
그래도 정도가 있지.
온종일 불이 날 때까지 보비는 소리가 들리니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
“거 적당히 좀 합시다.”
성충이 부화 중인 고치처럼 꿈틀거리던 이불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이불 밖으로 머리칼이 땀에 젖고 뺨이 벌겋게 상기된 앨리스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미안, 시끄러웠어?”
양 옆으로 마냐와 말리샤도 고개를 든다.
“그러지 말고 시우 님도 함께하실래요?”
“저도 괜찮아요!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
“전 됐습니다.”
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담배를 물자 뒤에서 도도도 두 쌍의 발소리가 들린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이 뒤통수에 얹혔다.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온 손이 시우를 잡아끌었다.
“아잉, 그러지 말고 말리샤랑 같이 놀아요.”
“마냐가 화끈하게 서비스할게요.”
말본새가 꼭 술집 언니들 같다.
“시우 님도 심심하지 않아요?”
“어차피 당분간은 할 것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사실 마냐와 말리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비단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뿐이 아니었다.
탈출의 주도권을 잡고 있을 그의 호의를 얻고 싶다는 계산적인 생각도 아니었다.
시우의 외모는 동성애만 즐겨온 두 사람이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잘생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몸도 좋고, 대마녀급 능력자에 인맥도 빵빵한데다가 마음씨도 좋다?
생전 처음 남성과 관계를 한다면 이보다 좋은 상대는 없으리라 판단한 것.
“저희 언니도 시우 님이랑 노는 건 괜찮다고 허락해 주셨어요.”
“이렇게 빼기만 하면 저희도 섭섭해요.”
“에잇, 저리 가라니까요.”
서큐버스처럼 양옆에서 교태를 부리는 마냐와 말리샤를 손을 휘저어 쫓아낼 때.
-똑똑
노크와 함께 즐라타가 들어왔다.
예빈과 린네가 3층, 시우와 앨리스네가 2층 골방을 차지하고 있다면 즐라타는 1층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 대뜸 문을 걸어잠그거나 영업중지를 한다면 불필요한 의심의 눈길을 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몸인 마냐와 말리샤 사이에 부대낀 시우를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불만을 입으로는 읊지 않았다.
제안을 받아들인 뒤로는 제법 성심성의껏 시우를 돕고 있었으니 말이다.
예빈이 치료에 사용하는 약재 역시 무상으로 한껏 공급해주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치료는 애진작 불가능했으리라는 게 예빈의 의견이다.
“담배 말고 더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들어줄 수 있으니까 말해.”
어차피 즐라타의 역할은 은신처와 약재 제공, 도로시의 접선까지다.
적당히 사양하려는 때 불쑥 끼어드는 마냐와 말리샤.
“그러면 딜도 있어요?”
“기왕이면 앞뒤로 머리 달린 거, 뭔지 알죠?”
“그딴 거 없어! 뭔지도 몰라!”
노골적인 19 콩트를 관람하고 있자니 위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기진맥진한 예빈이 방문을 열었다.
“치료가 끝났어요.”
2.
린네는 검은 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무의식과 조각난 기억의 편린이 별의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소우주.
-딸깍
오래된 브라운티비의 채널을 바꾸듯 린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뒤바뀌었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난세 속 번성한 세력을 이룬 다이묘의 막내 따님으로 사랑을 듬뿍 받아왔던 린네.
아들을 제 소유쯤으로 생각하고 딸은 귀하게 팔아넘길 수 있는 상품쯤으로 여겨지던 당시 시대관에 비추어보자면 이례적일 만큼 화목한 가정이었다.
엄하고 권위적이지만 가족을 향한 사랑만큼은 한이 없던 아비.
전쟁터를 오가며 용훈을 세우면서도 늦둥이 린네를 어여삐 여겼던 첫째 오라비.
짓궂은 구석이 있었지만, 신항로를 따라 들어온 서양 상단의 진귀한 물품이 성내로 반입될 때면 언제나 선물을 사오던 둘째 오라비.
본디 첩실이었으나 린네를 낳고 타계한 어미를 대신하여 성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서모(庶母).
마지막 구성원은 꽤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흑발이긴 하나 저 멀리 서대륙 출신인 그녀는 여자라곤 믿기지 않는 훤칠한 키와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예쁘다 해도 골격자체가 동양계와 다르니 외국인을 처음보던 린네에겐 도깨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린네, 나는 사실 마녀란다.’
새어미는 낯선 외형 탓에 잔뜩 경계하는 린네를 불러 소근소근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 진지한 고백에 철없고 멋모르던 어린 시절 린네도 꺄르르 웃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새어미를 향한 경계심은 흥미와 이상한 친근감으로 대체되었다.
어쩐지 무서운 사람에서, 이상하지만 재밌는 사람쯤으로 말이다.
실제로도 그녀는 재밌는 사람이었다.
늦은 밤까지 린네를 위해 인형극을 해주었으며, 손을 맞잡고 시장에 나서거나, 뒤뜰에서 공놀이에 어울려주곤 했다.
얼굴도 모르는 친모의 빈자리를 채워준 그녀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은 계속되었다.
석성(石城) 밖으로는 전화의 불길이 치솟고, 산간벽지와 들판마다 시체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메케하게 물들였지만.
견고한 성에 둘러싸인 린네 일가는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단란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행복한 순간일지라도 끝이 있는 법이다.
한잠의 꿈과 같은 평화 린네의 열한번째 생일과 함께 끝을 맞았다.
전기가 보급되지 않은 시대의 하루 시작은 현대인의 것보다 훨씬 이르다.
그러나 린네가 정체불명의 소음에 눈을 뜬 시각은 그것보다도 훨씬 이른 인시(寅時).
날짐승조차 몸을 웅크리고 잠든 야심한 새벽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단말마.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욕설을 동반한 고함이 메아리쳤다.
창밖으론 비가 내렸다.
그리고 거센 빗줄기조차 감당할 수 없는 불길이 성 곳곳을 불태우고 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것은 적대 세력의 야습이었다.
내통자가 성의 뒷문을 열어준 덕분에 빠르게 석성의 심장부인 고텐(御殿)까지 도달한 무사들은 출병 탓에 텅 비어버린 성내를 굶주린 짐승처럼 헤집었다.
린네가 장지문을 비집고 나왔을 땐 이미 사방이 피와 진흙 그리고 시체로 즐비한 상태였다.
수발을 들어주던 시종들은 옷이 벗겨진 채 죽어있다.
고텐 내부에 거주하며 호위와 안전을 책임지던 무사들은 검도 뽑지 못한 채 목이 달아나 있다.
처음 보는 갑옷을 입은 무사들도 그 위로 포개지듯 쓰러져 있다.
‘어머니, 어머니….’
린네는 눈물을 흘리고 때때로는 토악질하며 아수라장이 된 마루를 버선발로 달렸다.
어머니에게 가야 한다.
린네에게 주술사라고 말했던 어머니라면 이 지옥 같은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마음은 허황하고 황당무계했던 농담에 매달릴 만큼이나 간절해져 있었다.
‘린네, 괜찮니?’
누구와도 마주치는 일 없이 어머니의 안채에 닿았을 때.
그녀는 생전 처음보는 형태의 무복을 입은 채 부드러운 미소로 린네를 반겼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양 평온한 말씨와 행동거지는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았다.
‘어머니, 눈이….’
등잔불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한 묵빛으로 일렁이는 것에 놀란 린네.
‘이리 오너라. 함께 갈 곳이 있으니.’
자리에서 일어나 소풍을 제안하는 것처럼 느긋한 말투로 권하는 그녀의 태도에도 린네는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뿜어지는 어머니의 여유와 관록은 어린아이 특유의 낙관적인 환상을 가속하기 충분했다.
그녀라면 정말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정말로 어머니는 마녀였던 것이라고.
부질없이 기도했다.
‘자, 이러면 조금 낫니?’
어머니는 복도를 거닐 때마다 마주할 끔찍한 풍경을 가려주기 위해 린네의 뒤에 바짝 붙어선 채 다정한 손길로 눈을 가려주었다.
‘네, 어머니.’
간혹 발치에 차이는 딱딱한 고깃덩어리와 코를 가득 메우는 시취.
버선을 적시는 뜨거운 채액을 무시하고 린네는 되뇌었다.
이건 놀이를 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눈 감고 걷기 놀이를 하는 것이다.
‘잘 보고 잊지 말고 명심하거라.’
갑자기 멈춰선 그녀가 말했다.
거기에 부드럽고 따뜻한 말투는 없었다.
‘삶은 나약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속을 파헤쳐 잡아먹고 요괴가 들어앉은 것처럼.
무겁고 딱딱하며, 그렇기에 이질적인 음색만이 있을 뿐이다.
‘어머니…?’
‘모든 비극은 나약함이 불러온 부산물일지니.’
린네의 눈가를 덮던 손이 치워졌다.
어찌 된 일인지 적막이 깨어지고 다시금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드는 소음.
린네는 보았다.
그곳엔 아버지가 있었다.
항문부터 입까지 창대에 꿰뚫어져 허수아비처럼 우뚝 선 아버지가.
그곳엔 첫째와 둘째 오라비도 있었다.
난도질당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오라비가.
공을 나누기 위해 신체 부위를 잘라가려 각축을 벌이던 도당의 시선이 일제히 린네와 어머니를 향한다.
피맛을 봐 흥분한 채로 마주한 먹음직스러운 여체는 먹어치울 전리품의 하나에 불과했다.
환호를 지르며 앞다투어 달려드는 그들의 앞에 나선 것은 린네의 서모이자, 스승인 ‘검의 마녀’.
-스릉
‘자, 보아라.’
태생부터 영민한 직감을 지닌 린네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녀의 스승이 린네의 가족으로 들어온 목적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그것을 린네의 앞에서 깨뜨리기 위해서였음을.
행복하던 나날이 연기에 불과했다는 것마저도.
‘이것이 앞으로 네가 나아갈 길이니라.’
그러나 린네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스승의 뒤를 이었다.
도당들 사이에 휘몰아치는 비틀린 나선.
그 위로 얹히는 하나의 삶과 하나의 죽음.
아버지와 오라비를 욕보인 도적을 도륙해나가는 스승의 검무는 실로.
실로 아름다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