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
1.
로지의 저택부터 즐라타의 약재상점까지 약 24시간에 걸친 잠행.
삼엄해진 경비를 뚫고 무사히 도달한 것은 천운이란 표현을 몇 번 사용해도 부족했다.
하물며 대마녀가 되지 못한 마녀 셋과 제 발로 걷지도 못하는 린네를 이끌고 도착했으니 더욱 그랬다.
물론 오직 운만으로 도달한 건 아니며, 시우의 공이 매우 컸다.
마력의 색을 지우는 린네의 마법과 ‘밤안개의 마녀’라고 불리며 은폐에 특화된 마냐의 마법을 즉석에서 엮어 합동 마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무리 성질이 비슷한 마법이라 해도 서로 다른 자성마법의 연계식은 한두 시간으로 정립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온갖 자성마법을 섞어 새로운 마법을 만드는 건 시우의 특기다.
더군다나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마안까지 존재하니 고작 15분 만에 새로운 연계식을 알려주었다.
‘시우 님, 의심하는 건 아닌데 그게 진짜 돼요…?’
‘될 겁니다. 여러 번 해봤으니까.’
‘와, 뭐야. 정말이네?’
그 결과 린네는 시우의 등에 업혀 최소한의 마법만을 뽑아내도록, 마냐는 그걸 이용해 더욱 완벽한 은폐장을 펼치도록 역할을 부여받았다.
또한 린네가 미리 설정해두었던 은신 포인트에서 쉴 때마다 린네의 상태를 살피며 마법을 재설정해 린네의 부담을 덜었다.
틈틈히 마냐와 말리샤의 경외 어린 시선을 받으며 겨우겨우 도달한 약재상점.
황급히 예빈을 불렀다.
예빈은 실로 타로 타운에서 성녀로 추앙받는 의사다웠다.
몇 개월간 예빈을 감금하고 핍박한 린네가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소매를 걷어붙였으니 말이다.
“시우 씨, 여기에 눕혀주세요.”
예빈은 하얀 시트만 남기고 치워 둔 침대 위에 린네를 눕힌 채 옷자락을 풀었다.
점점 악화하던 린네는 지금 와선 호흡조차 버거워 헐떡이며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건….”
린네의 무복이 좌우로 풀어헤쳐 지는 순간 예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시우도 놀랐다.
출발하기 전 허리띠를 풀러 살폈을 때보다 상황이 한없이 안 좋아 보인다.
더 이상 상처의 문제가 아니었다.
허리를 위주로 린네의 하얀 살결 위를 뒤덮은 보랏빛 멍이 모여 흡사 손자국을 만들고 있다.
어디론가 강제로 끌고 가려는 듯한 흉흉한 모양새다.
손에 휘감긴 곳을 위주로 울룩불룩 튀어나오기 시작한 혈관이 검게 굳어간다.
죽음의 향기가 난다.
잔에 담긴 생명이 바닥이 보일 만큼 증발하여 최후의 발버둥을 칠 때 피어오르는 향기가 지독하게 코끝을 찌른다.
시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린네와 인연이 좋은 인연이라고 말하기엔 어렵다.
그러나 그녀가 이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불길하게만 다가왔다.
“저주 계열이네요. 먼저 신체 상태부터 살필게요.”
희푸른 빛을 띤 예빈의 손이 린네의 배에 닿자마자.
“——!!!”
번쩍 눈을 뜬 린네가 포악하게 예빈을 향해 팔을 뻗는다.
상처 입은 들짐승을 건드린 것처럼 발버둥을 치며 이를 드러내는 린네.
치켜떠진 눈은 온통 붉은 핏줄이 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핏물을 뿜어낼 것 같다.
“스승님, 괜찮아요. 접니다. 치료하려는 거에요.”
시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진정시켰다.
린네의 시선이 시우를 향한다.
바들바들 떨리던 팔에서 힘이 빠진다.
독기 서린 눈동자도 다시 흐리멍덩하게 변하더니 이내 슬그머니 눈을 감고 푹 퍼졌다.
“바로 검사할게요.”
조금 전 공격당할 뻔한 예빈이지만 한치도 주눅이 들지 않는 모습.
대신 진지한 눈빛을 한 채 린네의 신체로 마력을 투사했다.
“…아….”
엉망진창이다.
숨이 붙어있는 게 용할 지경인 다발성 장기부전.
출혈과 골절이 없을 뿐 높은 곳에서 맨몸으로 떨어진 인간과 유사한 내상이다.
혈압은 마구 치솟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하고,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은 꺼져가는 촛불의 단말마를 연상케 한다.
이쯤되면 영체의 자연치유력으로도 회복할 수 없다.
당장 5분 10분 사이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어떤가요?”
“…….”
만약 여기가 향월루였더라면 힘들었겠지.
헥센나흐트엔 예빈의 치료도구도 시술 도구도 없으니 말이다.
허나 린네가 미리 안배한 것인지 우연한 일치인지 이곳은 약재 상점이다.
다소 난폭한 응급처치를 하더라도 내과적인 시술을 활용해 안정을 되찾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다.
“치료할 수 있어요.”
예빈은 마력을 거둬들이고 다부진 말투로 말했다.
2.
시우는 예빈으로부터 퇴거를 요청받았다.
민감한 작업인 만큼 사소한 마력의 흐름마저 놓치면 안 되는 상황에서 대마녀격인 시우가 옆에 있다간 괜한 노이즈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찝찝함과 부채감을 떠안고 나온 시우가 발견한 건 서로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앨리스, 마냐, 말리샤였다.
“언니,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괜찮아? 로지 그 미친년이 험한 짓 하지는 않았고?”
“그냥, 가끔 변태 같은 거 시키긴 했는데…. 의외로 취향에 맞았어요.”
사실 남이나 다름없는 세 사람이지만 그래도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좋은 일 했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아! 시우님!”
눈시울이 붉어진 채 코를 훌쩍이던 말리샤가 시우를 발견하곤 방긋 웃는다.
이젠 아예 시우님으로 고정된 호칭.
“언니도 알겠지만 시우 님이 로지 그년 뚝빼기도 깨버렸대요.”
“과연 언니가 질만 한 이유가 있구나 싶더라고요.”
“그래, 너희는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앨리스는 마냐와 말리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는 시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복도를 돌아 식당 쪽.
다른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온 앨리스는 허리를 푹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울음기 섞인 목소리와 함께 은빛 물방울이 방울방울 나무 마루 위로 떨어진다.
“이러실 거 없습니다. 아직 일이 끝난 것도 아닌데요. 나중에 돈으로 주시면 되니까 고개 드세요.”
라고 몇번이나 만류해도 못 박힌 것처럼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감사를 표한 앨리스는 벌겋게 붉어진 눈을 소매로 훔쳤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정말 날 아무렇게나 다뤄도 좋아. 아무리 부끄러운 짓을 시켜도 최대한 부응할게. 아니, 지금 당장 할까? 여기 방도 많잖아.”
“아니, 전에도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아직도 뭔가 단단히 오해한 앨리스가 주섬주섬 옷을 풀어헤치려던 찰나.
심사가 잔뜩 꼬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모텔 아니고 내 집이거든?”
히피룩이 몹시도 잘 어울리는 라틴계 누님, 자유의 마녀 즐라타 유스티치아.
그녀는 입에 달고 살던 궐련 대신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언짢음 가득한 기색으로 두 사람 사이를 갈라섰다.
우선 영업 종료 간판을 세워두고 린네를 받아주긴 했다만 즐라타의 속을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심정인 까닭이다.
“이거 어쩔 거야?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네 싹 다 쫓아내고 싶어.”
“이해합니다.”
“이해하면 제발 나가주면 안 될까? 왜 하필 내 집인데? 나 여기 입주하려고 전 재산 다 털었다고….”
시우가 보기에도 그녀는 해당 사건에서 가장 무고한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협력이 없어도 곤란하다.
공적들이 사방에서 눈을 번뜩이는 가운데 은신처를 나서 어디로 가란 말인가?
“민폐를 끼친 점은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제가 납득하실만한 보상을 할 수 있을까요?”
“보상은 무슨 보상이야. 그냥 수틀리면 패버린다고 해. 여기는 나도 있고 너도 있잖아.”
앨리스가 귓속말로 실로 추방자의 발상다운 말을 하길래 일단 마냐와 말리샤에게로 돌려보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충분히 나올 법한 말이다.
자유의 마녀는 대마녀도 아니었고 전투에 특화된 마녀도 아니다.
대마녀 격인 앨리스나 시우가 힘으로 찍어누르면 그만이라는 말.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상 꽤 오랜 시간 ‘안네의 일기’를 찍어야 할 판국에 강압적인 협력 강요는 악수이다.
아닌 말로 꼴 받은 즐라타가 위험을 각오하고 밀고를 할 가능성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현시점에서 가장 자유롭게 밖을 나돌 수 있는 협력자를 잃게 된다.
“즐라타 님.”
“친한 척해도 안 돼. 오늘 밤 내로 나가. 신께 맹세코 나도 엄청 간절해.”
협상의 여지가 없이 굳게 다문 입술.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식당 선반까지 가득 쌓인 약재가 담긴 유리병.
즐라타의 집에는 탁상 아래 천장까지 이런 약재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고작 3층짜리 목조건물인데다가 좌우 폭이 비좁은 이런 집에 공방을 차리려면 공간활용은 필연적이다.
개중에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정품 인증 마크가 박힌 상품도 여럿 있다.
“만약 무사히 탈출하게 된다면 즐라타 님께 그에 걸맞은 사례를 하겠습니다.”
“싫어. 난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해.”
“추방자시라고 했죠?”
“맞아.”
“혹시 제머나이 백작가는 알고 계신가요?”
“당연히 알지. 내가 취급하는 고급 약재는 다 그쪽에서 가공해서 들여오는 건데.”
‘근데 그게 뭐?’라는 눈빛으로 심드렁하게 답하는 즐라타.
“제가 백작 가와 인연이 깊습니다. 즐라타 님이 바라시는 거라면 뭐든 마련할 수 있을 만큼요.”
“웃기고 있네. 야! 그거 만지지 마.”
그저 허풍으로 취급하려던 즐라타가 허겁지겁 병을 여는 시우를 만류했다.
하지만 시우는 그새 말라 비틀어진 별맞이꽃 하나를 꺼내 들었다.
파랗고 길쭉한 이 별맞이꽃은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품종 개량을 통해 생산한 촉매 가속제이다.
범용성이 뛰어난 데다가 자체적으로 무속성이라는, 말 그대로 촉매재의 혁명을 일으킨 마법 작물로 당연히 가격은 엄청 비싸다.
그걸 덥썩 집어들었으니 즐라타는 인질이라도 잡힌 양 안절부절못하는 것.
“잘 보세요, 피어라.”
이 별맞이꽃은 비단 그 성능뿐 아니라 특별한 작용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제머나이 백작가의 ‘노래하는 마법’의 영향을 받으면 아무리 바짝 말라있더라도 현묘한 푸른 빛을 흘리며 다시 피어난다는 것이다.
시우는 작은 장모님에게 받은 마법을 머릿속에 그리며 추출한 마력을 별맞이꽃으로 흘려보냈다.
마력이 흘러들자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있던 별맞이 꽃이 막 정원에서 따낸 꽃처럼 생생한 생명력을 띄었다.
영묘하게 흐르는 푸른빛과 포자 같은 입자는 감출 수 없는 정품의 영롱함이다.
“지, 진짜인가 보네…?”
“그렇다니까요. 저기 위에서 치료 중인 예빈 씨에게 물어보세요. 저분도 추방자 출신이었는데 절 치료해주는 대가로 면책권과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즐라타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협력의 리스크와 리턴에 대해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시우는 훗날 장모님에게 얼마나 혼날까는 생각하지 않은 채 쐐기를 박았다.
일단은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도와주면 게헨나 시민권이 무료 지급. 타로 타운 공방 설립 자금 무이자 대출. 일부 마법작물 직구매 혜택과 별도의 금일봉까지.”
“으….”
“단언컨대 게헨나는 헥센나흐트와 비교가 되지 않게 아름답습니다. 호화롭기로 유명한 말쿠트 갤러리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여유롭게 문화생활을 즐기는 즐라타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세요. ”
“으으….”
“게헨나 최고의 미남과 미주가 모인 호스트바 마담이 제 절친한 친구입니다. 제가 화끈하게 모시라 일러두겠습니다.”
“으으으….”
“실컷 유흥을 즐기다 지치실 때쯤엔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돈 많은 마녀만 누릴 수 있는 하이엔드급 여가시설, 레바나 대욕장에서 휴가를 보내시는 건 어떨까요? ‘레바나 대욕장의 회원권이 없다면 게헨나의 풍요를 절반만 누리는 것이다’ 라는 말은 들어보셨죠? 제가 회원권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으으으으….”
“계약서도 쓰겠습니다. 보증인을 세워도 좋습니다.”
여행사 직원처럼 우다다 늘어놓는 설명은 허풍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일이 시우가 조금 머리를 조아리고 다닌다면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다.
어쩌다 보니 게헨나의 황금 인맥을 지니게 된 시우의 달콤한 제안은 즐라타에게 리스크의 위험을 잊게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내적갈등에 시달리던 즐라타는 테이블을 호기롭게 치며 외쳤다.
“까짓 거, 숨겨줄게.”
이렇듯 협력을 약속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