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1.
리디아의 집무실.
“이런 시발, 너 병신이니?”
진심이 듬뿍 섞인 탓에 그로울링 발성이 섞인 샤우팅이 쩌렁쩌렁 울린다.
돈세탁 전문가 란다 실피드는 솔리두스 상단의 회계 업무를 전반적으로 맡으며 제법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본디 자금의 세탁이란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중대해지는 까닭이다.
란다는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고 솔리두스 상단은 헥센나흐트의 최대 단일 상단이었으니 둘의 유대 또한 꽤 끈끈했다.
업무적인 상하관계는 존재하되 사적인 자리에서는 공평해 보이는 관계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란다는 욕설을 내뱉는 리디아 앞에 주머니쥐처럼 굳어 있었다.
“대체 왜 떠벌리고 다닌 건데? 응? 말해보라니까?”
리디아가 화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치자 주위의 대기가 파들파들 떨린다.
언제나 사근사근하고 친근한 말투로 란다를 친구처럼 대하던 때와는 대척점에 있는 모습이었다.
“떠, 떠벌린 게 아니라 그냥…. 몇 명에게만….”
“그러니까 그걸 왜 말하냐고!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년아!”
“히익…!”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자존심이고 뭐고 챙길 여유는 없었다.
23 위계 마녀가 냉정을 잃고 흩뿌리는 금빛의 마력 반사광은 19위계인 란다가 직면하기엔 너무도 매서웠다.
“하아….”
리디아는 테이블 위에 독한 위스키를 집어들고 콸콸 입에 부어 넣었다.
그걸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텅 빈 병을 벽면에 힘껏 던져버린다.
-쨍그랑!
란다는 튕겨 나오는 병 조각도 피할 생각 못하고 군기가 바짝 든 이등병처럼 직립 부동 자세를 유지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리디아는 저 일밖에 못 하는 얼빠진 년을 금화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꾹 억누른 채 손을 휘적였다.
“됐어, 꺼져. 나가 봐. 내가 부를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
엄밀히 말하면 란다와 리디아는 대등한 협업관계일 뿐 보스와 부하직원의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란다는 폭거나 다름없는 리디아의 언행에도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저, 저, 등신 같은 년.”
이를 악물고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리디아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대회의가 끝난 이후 비밀리에 추적대를 구성할 예정이었다.
훗날 로지의 실종을 린네에게 덮어씌우는 계획도 신시우가 수중에 있다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었다.
린네의 일탈이 밝혀지는 순간 그녀는 헥센나흐트 공동의 사냥감이 될 테고, 그러면 자연 그녀에게 신분을 위탁 중인 시우의 안전도 붕 뜨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리디아는 린네가 공방을 습격했던 사실을 감췄다.
부상을 입은 비서 역시 믿을 만한 치유 계통 마녀에게 넘기며 비밀 보장을 부탁했다.
그러나 린네가 최초에 습격했던 란다가 그 모든 계획을 망쳐버렸다.
“그냥 뒤져버릴 것이지….”
쓸데 없이 튼튼해 불과 이틀 만에 깨어난 란다는 보고를 위해 솔리두스 상단으로 오면서 무려 셋이나 되는 마녀에게 린네의 범죄 행각을 까발린 것이다.
심지어 린네가 솔리두스 상단의 행사 일정과 리디아의 일정을 캐물었던 것까지도 굳이굳이 말해버렸다.
반쯤은 목숨 보전을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을 란다가 뒤늦게나마 리디아와의 우정을 증명하려는 것일 테고.
반쯤은 험한 꼴을 당하게 한 린네에 대한 복수심이겠지.
그러나 그녀가 경솔하게 입을 놀린 결과 강경파의 귀에도 린네의 범죄 행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린네와 리디아 사이에 모종의 연결점이 있다는 단서까지 주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헥센나흐트는 삼엄한 경계태세로 돌입했고 거기엔 좋은 기회를 포착한 강경파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들 역시 게헨나와 전쟁의 촉발을 위해 신시우를 찾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리디아도 전면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또한 우여곡절 끝에 신시우를 얻게 된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홀라당 독점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결과가 고작 한 사람의 입방정에서 나온 것이라니….
화를 내지 않고서야 배길 수가 없다.
“곤란해 보이네.”
-딸랑
그때 맑은 종소리와 함께 청하지 않은 손님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한 차례 입술을 깨물었던 리디아는 가면을 뒤바꾸듯 표정을 바꾼 채 의자를 빙글 돌려 앉았다.
“프시케 티가든 님, 방문하신다는 말씀은 못 들었는데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양 창틀에 유유자적 걸쳐 앉은 한 마녀가 있다.
양처럼 곱슬곱슬한 금빛 단발.
나른하고 졸려 보이는 연두색 눈동자.
양치기의 지팡이처럼 종이 달린 특유의 완드.
언뜻 무해한 소녀처럼만 보이는 외형이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된다.
이 마녀는 전 클리포트 수장이자 배신자.
현 솔리두스 상단을 제외하고 온건파의 한 축을 담당 중인 양자리의 마녀이니 말이다.
더불어 지금 이 타이밍에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이기도 했다.
리디아로서도 자그마치 천 년이 넘게 살아온 노괴(老怪)의 꿍꿍이를 전부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계셨나요?”
“방금. 네가 큰소리치길래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와 봤어.”
창틀에서 폴짝 내려와 지팡이를 딛고선 프시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리디아가 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불쾌해하면서도 섣불리 그녀를 내쫓지 못한 이유는 단순했다.
헥센나흐트의 창설 이후 솔리두스 상단이 번창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신(新) 클리포트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엔 세력의 양도 질도 모두 모자랐다.
하나로 집결되지 못한 세력의 발언권이 반대 세력에 밀리는 건 흔한 일.
따라서 반전 성향의 대마녀들은 솔리두스 상단을 온건파의 간판으로 내세우는 대신 사외이사의 자격을 요구했다.
솔리두스 상단이 아닌 대마녀는 이사회를 통해 온건파 전체의 행보나 중대사안 결정에 개입할 수 있으니 이득.
리디아로선 어쨌건 표면적으로 온건파의 대표직을 맡으며 세력을 불릴 수 있으니 이득.
이런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옛마녀인 프시케 또한 당당히 금뱃지를 꿰어차고 있는 것이다.
“조심해.”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더라도 타산으로 이뤄진 관계가 바퀴 굴러가듯 부드럽게 나아가리라 믿는 건 이상론이다.
클리포트 내에서 살벌한 이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솔리두스 상단의 이사회 역시 권력 투쟁의 각축장으로 화목과는 거리가 멀었다.
“뭘 조심하라는 말씀이신지?”
“나 프시케 티가든이 경계하는 양치기견처럼 예의주시하고 있어. 네가 뭘 생각하는지도 알아.”
그렇게 말한 프시케는 리디아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자그마한 성의를 보인다면 굳게 입을 다물어 우리의 우정을 증명할 거야.”
뇌물을 바치라는 의미다.
리디아는 한숨을 쉬고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둔 상자를 뒤적였다.
그 안에는 금박에 포장된 초콜릿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언뜻 단순한 초콜릿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벨기에의 초콜릿,타히티섬의 바닐라빈,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 커피, 피에몬테의 헤이즐넛 등 최고급 재료를 사용했음을 물론.
로얄 워런트를 받아 영국 제일의 초콜릿 회사로 이름을 날렸으나 대공황에 대화재까지 겹쳐 도산한 데어몬드 사(社)의 레시피를 어렵사리 구해 재현한 상품이다.
맞춤형 뇌물과 로비 역시 리디아가 상회를 유지하게 해주는 큰 원동력이었다.
프시케의 경우 이 초콜릿이었고 말이다.
세 개의 초콜릿 중 하나를 홀라당 까서 입에 바로 집어넣는 프시케.
“역시 데어몬드의 초콜릿이 최고야. 다른 회사 제품은 이 맛이 나질 않아.”
“이걸로 이번에도 비밀로 해주실 건가요?”
“넌 내게 호의를 베풀었어. 나 역시 보답하는 게 의무겠지.”
“…….”
“이제 나는 아무것도 몰라. 다 까먹었어. 하지만 뭔가 기억날 것 같으면 또 놀러 올게.”
물론 프시케의 묵인과 지지를 얻는 대가로 초콜릿은 아주아주 싼 값에 속한다.
그런데 나이를 천 살 넘게 먹었으면서 한 달에 두어 번 주는 초콜릿에 좋다고 실실 대는 건 또 뭔지….
저게 의태인지 진심인지조차 헷갈린다.
“늙은 년들은 이래서 싫다니까.”
리디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다가올 일에 대비했다.
아마도 곧장 대의회가 소집될 것이다.
그 전에 이사회와 이견을 조율하는 게 중요하겠지.
한 머저리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 사태의 진정을 위해 리디아는 전화기를 들었다.
2.
자유의 마녀, 즐라타 유스티치아는 기분이 좋았다.
아니, 기분이 좋았었다.
어쩐 일인지 골목마다 팔랑팔랑 나부끼던 호외를 집어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와. 큰일이다.”
린네는 두 마녀를 맡아주는 대가로 산더미 같은 금화를 지불했다.
즐라타는 그것이 남자 마녀와 흐뭇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얼마 전 남자에게 좋은 요리를 배워가겠답시고 금화를 왕창 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즐라타의 3년 치 유흥비가 하룻밤 탁아 비용으로 주어진 시점부터 의심했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호외의 정체는 ‘검의 마녀’에 대한 수배령이었다.
린네의 범죄 행각과 함께 사진 및 마력 패턴, 그리고 현상금이 인쇄되어 있다.
한 마디로 즐라타는 헥센나흐트에서 최초의 유혈사태를 일으킨 린네와 아주 지독히도 얽혀버린 것이다.
“큰일이다.”
게헨나와 같은 마녀의 도시에 로망을 지니고 있기에 별다른 경각심 없이 입국한 즐라타는 공적이 아닌 추방자 출신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폭탄을 끌어안고 아무렇지 않을 만큼 대범한 마녀도 아니다.
즐라타는 제자리를 왔다갔다하며 ‘큰일이다’라는 말만 50번 넘게 반복하고 있었다.
린네가 사고를 치기 전 마녀 노예를 즐라타에게 맡긴 이유는 뻔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약재상점을 은신처로 삼겠다는 의미겠지.
“지금이라도 꼰지를까?”
언뜻 합리적인 선택지다.
지금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린네의 위치를 밀고하는 것.
어쩌면 정상참작을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역시 난 좆됐어. 이번 생은 망한 거야.”
그러나 비교적 인본주의가 중시되는 현세에서도 보이스피싱의 현금 수거책, 마약 밀매책은 사정 불문하고 공범자로 상정해 처벌한다.
변변한 뒷배도 없는 즐라타가 ‘몰랐어요! 진짜에요! 좋은 돈벌이라고 해서 잠시 맡아준 거에요!’라고 애걸복걸한들 과연 클리포트와 솔리두스 상단이 곱게 넘어갈까?
한번 무너진 계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공범자까지 광장에 매다는 게 합리적이지.
애초에 린네도 그걸 아니까 이토록 난폭하게 공모자로 만든 것이리라.
“시발…. 주님…. 어째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적갈등 속에 번민하던 와중 약재 상점의 문이 열렸다.
영락없이 자택 수색이 들어온 것으로 생각했던 즐라타는 흐느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흐흑…!”
그러나 정작 나타난 건 처음 보는 마녀 셋, 아마 견습마녀로 보이는 여자 하나.
그리고 린네와 시우.
이 좁은 공방에 어떻게 숨어 있으려고 아주 대가족을 만들어 왔다.
이 와중에 염장질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남자친구 등에 업혀있는 린네에게 욕설을 내뱉으려던 즐라타는 주춤했다.
“야이 미친년아!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어! 요리도 가르쳐….”
린네야 원래도 하얗지만, 지금은 하얀 정도를 넘어 시체의 창백함을 떠올리게 하는 안색이다.
게다가 색을 잃은 입술 사이론 끊어지기 일보 직전인 가느다란 숨이 흘렀다.
“안에 예빈 있죠? 당장 불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