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
1.
현모양처의 참된 도리란 부군의 뜻을 따르고 돕는 것.
그러나 그 결정이 자칫 낭군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몸을 던져서라도 만류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린네가 로지 저택행에 따르기로 한 것은 그녀가 보기에도 그의 결정이 합리적인 까닭이다.
안전한 선택지만을 골라가며 나아가기엔 이제 헥센나흐트는 안전을 보장해주는 도시가 아니게 되었다.
한 사람의 전력이라도 더하는 게 탈출의 확률을 높이는 것과 직결된 이상 어느 정도의 리스크는 감수해야 하는 상황과 직면한 것이다.
그리고 린네가 보기에도 그의 계획은 영 황당무계한 것은 아니었다.
은신과 이동을 반복하며 지켜본 결과 리디아는 당장 적극적인 추적에 나서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대회의가 끝나게 되면 리디아의 추적망은 한층 촘촘한 올가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무언가 리스크를 짊어지려 한다면 지금만큼 적합한 순간이 없다.
이 시점에서 도주자가 ‘문’과 먼 향월루 근처로 향하는 건 역발상.
부족한 인력은 아마 하위 타운으로 향하는 길목 위주로 배치되어 있겠지.
로지의 저택으로 향하는 것이 오히려 도주 동선을 한번 꼬는 결과를 낳아 불운한 대치를 피할 수도 있다.
“왜 로지를 죽였지?”
승강기를 이용할 수 없는 만큼 다른 루트를 통해 빙 둘러가는 동안 린네는 자신이 의문 삼았던 것을 묻기로 했다.
“그건....”
“한 배에 탄 처지다. 이번에는 기탄없이 솔직하게 말해라.”
모든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린네는 시우를 구하기 위해 많을 것을 포기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또 한 번 기만하는 건 시우로서도 마음이 불편했기에 진실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된 겁니다.”
“…….”
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린네는 신시우가 자신과 완전한 동류라고 생각했다.
강함을 위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실로 공적다운 사고방식의 소유자 말이다.
그러나 본성과 의태 사이의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드러나는 법이다.
지금까지 낭군을 대함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던 부분의 정체를 확인한 린네.
그건 린네가 시우를 위해 새로운 계단에 발을 올리길 포기했던 것처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었다.
아직은 린네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일단 그런 그의 모습이 좋게 보인다.
다정하다.
상냥하다.
멋있다.
그것이 한낱 위선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위험마저 등한시한 진심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괜스레 그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게 된 린네.
“그렇군.”
담백한 린네의 반응에 시우는 내심 놀랐다.
칭찬은 당연히 기대하지 않았고, 어쩌면 괜한 짓을 했다며 쓴소리를 들을 것도 염두에 두고 밝힌 진실이다.
원인부터 따지자면 린네가 리디아의 공방을 습격하게 된 건 시우가 앞뒤 사정을 살피지 않고 날뛰었기 때문 아닌가?
“고생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금 더 상황을 고려하도록.”
하지만 격려의 말과 함께 충고까지 받자 다시 한번 ‘뭐 잘못 먹었나?’라는 마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리디아로부터 린네가 시우를 ‘낭군’이라고 표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거랑 연관된 걸까.
“스승님. 제가 금화의 마녀로부터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지?”
“언짢게 여기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리디아가 스승님이 저를 낭군이라니 뭐니….”
시우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린네의 팔이 쭉 뻗어 가슴팍을 가로막았다.
살짝 내민 입술이 들리지 않게 ‘쉿’ 소리를 내며 기척을 죽일 것을 알린다.
동시에 조용히 소태도를 꺼내 든다.
드디어 추적이 따라붙은 것일까?
긴장감으로 벽에 바짝 달라붙어 주위를 경계하는 시우.
“…….”
“…….”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엄폐물이 없는 이상 시우의 눈앞에서 숨을 수 있는 마녀가 존재할 턱이 없는데 말이다.
“대화는 여기까지다. 조용히 이동한다.”
수상쩍은 린네의 행동에도 시우는 큰 의문을 품지 못했다.
확실히 지금까지 너무 떠벌떠벌 움직인감이 컸으니 지금부터 조심하려는 것이겠거니 할 뿐.
두 사람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며 로지의 저택에 들어서 마냐와 말리샤, 그리고 마마를 확보했다.
2.
시우는 은폐되었던 공방의 콜렉션 룸을 열었다.
“사, 살았다….”
“그 미친년….”
걱정과 달리 마냐와 말리샤의 상태는 비교적 멀쩡했다.
아무리 가학적인 로지라도 린네의 소유물인 둘에게 제 가학심을 마음껏 펼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 은혜는 무조건 갚을게요!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언니는 무사한가요?”
시우를 끌어안고 구출의 눈물을 펑펑 쏟았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마냥 명랑한 분위기가 계속되진 않았다.
마마, 그러니까 흑색의 마녀가 있었으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견습마녀를 잃게 된 불운한 마녀가 말이다.
“감사해요.”
시우가 건네준 망토를 걸쳐 입은 그녀는 조용하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소파에 눕혀진 제 견습마녀의 뺨을 손등으로 찬찬히 쓸어주었다.
어두컴컴하게 변해 더는 희망을 비추지 않게 된 눈동자는 어쩌면 이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이.
어떠한 감정을 내비치는 일도 없이.
그저 피나의 몸을 꽉 끌어안는다.
악행의 장본인을 처단해도 이미 일어난 비극은 되돌릴 수 없다.
시우는 답답함이 느껴지는 그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로지의 죽음이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길 부질없이 바랄 뿐이다.
마냐와 말리샤에 대한 코드는 이미 린네가 지니고 있었으므로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 해제했고, 마마의 목줄은 시우 때와 마찬가지로 마안의 도움을 받아 제거했다.
“…….”
“스승님?”
그러나 사태는 비탄에 잠길 여유도 주지 않은 채 급박하게 변해갔다.
린네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던 식은땀이 어느새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질 지경이 되었다.
손끝부터 시작한 잔경련이 진정되지 않는다.
이건 린네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리디아가 불러낸 ‘사신’이 어떤 마법인지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던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영향만큼은 일목요연하여 알막 타운에서 로지의 저택까지 약 4시간의 잠행 동안 린네의 상태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더는 숨기지 못할 만큼 드러났을 뿐이다.
“괜찮으세요?”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여 약재 상점으로 향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허세를 부리다 발목을 잡는 일이 가장 최악이다.
따라서 린네는 솔직하게 말했다.
“괜찮지 않다.”
“아까 당하신 건가요?”
“…….”
린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가벼운 동작만으로도 버거운지 몸을 휘청인다.
시우는 린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대련 중 생뼈가 부러져도 고통을 호소하긴커녕 웃음을 머금고 대련에 더욱 열중하는, 쉽게 말하면 깡다구가 무장공비급인 사람이다.
더군다나 감정표현도 없다시피 한 린네가 저렇게 눈에 보이게 힘들어한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상처를 보겠습니다.”
“괜찮다. 돌아가는 게 먼저다.”
당장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얼마 정도의 부상인지는 눈으로 봐두고 싶었다.
시우는 돌아서려는 린네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아닙니다. 상처를 보겠습니다.”
그녀가 즐겨 입는 연무복 특성상 위와 아래가 하나이기에 불가피하게 옷자락을 풀어야 했다.
몸을 빼려는 듯 저항하는 린네.
돌아서지 못하도록 허리띠를 잡자 곧장 잠잠해진 린네가 소곤소곤 속삭이듯 말한다.
“…보는 눈이 많다. 조금은 자제해라.”
“네?”
“하다못해 다른 방으로….”
“…어휴.”
확실히 많이 아프긴 한 모양이다.
그 린네가 이런 헛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
자세히 보니 전에 술을 마셨던 때처럼 눈이 반쯤 풀려있다.
“그런 거 아니고 상처만 확인하겠습니다.”
시우는 조심스레 무복의 허리띠를 풀었다.
피부에 가까이 얼굴을 대었을 뿐인데 펄펄 끓는 열이 느껴진다.
잡고 있는 손목에선 부정맥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까닭에 정녕 이게 사람 맥박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가슴으로는 일절 시선도 주지 않고 옆구리 부분의 옷감을 들췄다.
잘록한 허리 위로 새겨진 길쭉한 상처가 보인다.
“…….”
상처라기보다는 흉터에 가까운 모양새다.
환부 주위로는 보랏빛으로 변한 핏줄이 울룩불룩했고 통증 탓인지 피부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있다.
린네도 시우도 알지 못했지만, 리디아가 금화를 대가로 불러낸 것은 죽음을 선고하는 사신이다.
일정한 가치를 바치는 것으로 조건을 달성한 즉시 상대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즉사기’.
비록 술식이 완전치 못했으며 린네가 일부의 술식을 빗겨냈다 하더라도 거대한 낫이 옆구리를 헤집은 이상 느릿한 죽음이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우가 상태를 살피는 지금 이 순간도 린네가 입은 부상은 느릿하게 확장되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한시라도 빨리 예빈에게 상처를 보이는 수밖에.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면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텐데….
상처가 커지는 속도를 볼 땐 저택으로 향한 중간지점부터 꽤 심한 상태였으리라.
시우의 부탁이 뭐라고 이 몸을 하고 여기까지 함께 왔단 말인가?
괜히 쌓여가는 부채감과 도무지 영문을 짐작할 수 없는 린네의 헌신적인 태도.
이젠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승님, 이렇게 상황이 안 좋으시면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
옷자락을 여며주고 허리띠를 다시 묶자 린네는 기대듯 시우의 품에 안겼다.
사실 안겼다기보다는 쓰러진 모양새다.
불덩이 같은 체온과 헐떡이는 숨이 가슴팍을 뜨겁게 데웠다.
“현명한 아내는…. 지아비에게 헌신하는 법이다.”
얼핏 고열과 통증에 시달리는 린네가 헛소리를 한다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시우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금 그녀의 발언이 이해가 가지 않던 일련의 행동을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확인 절차에 들어갔다.
“스승님.”
“…….”
“혹시, 제가 지아비 인가요??”
“…….”
흐리멍덩해졌던 린네의 눈동자에 빛이 들어오며 시우를 비춘다.
그리고는 열 때문인지 발갛게 상기된 뺨.
땀에 젖기 시작한 고운 머리칼.
시선을 조용히 아래로 내리깐 뒤 입술을 달싹이는 린네.
“그렇다. 나는 너를 부군으로 섬길 것이다.”
“…….”
“그러니 너는 나의 반려가 되어다오.”
상상도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온 린네의 프로포즈에 시우는 망연하게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