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
1.
새까맣던 복도가 새하얗게 점멸한다.
벽면을 따라 길게 늘어진 린네의 그림자도 함께 깜빡였다.
-쿠쿠쿵!
반박자 늦게 울려오는 천둥소리.
린네는 허리춤에 검을 꽂아 넣은 채 비스듬히 경사진 창문을 올려보았다.
헥센나흐트는 완벽에 가까운 주머니 공간이다.
그러나 완전무결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언제나 입김이 흐르는 초겨울 날씨와 끝나지 않는 밤을 반복하며 날씨의 변화 역시 거의 없다.
하지만 이따금 이렇듯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곤 한다.
수직 도시라는 구조와 타운 곳곳에 배치된 거대한 가마솥.
그 덕에 발생한 적란운이 이렇듯 국지적 소나기를 뿌려대는 것이다.
알막 클럽이 위치한 아르카나 타운은 향월루만큼 하늘에 가깝지 않았지만 거대한 공동을 울리며 음량이 증폭된 천둥소리는 먹먹하게 귀를 울렸다.
“…….”
그날도 이랬다.
장막처럼 내리던 소나기가 바람을 따라 삐뚜름하게 내려꽂히며 땅바닥을 거칠게 할퀴었다.
목이 터지라 울부짖어도 제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지독히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린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게 늘어져 있던 서양식 복도의 중간부터 서글거리는 진흙이 밟히는 나무마루가 신기루처럼 이어져 있다.
그곳에는 린네가 있었다.
“왼쪽으로.”
어린 린네의 두 눈을 가린 손.
린네는 비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옷을 질질 끌며 손의 주인이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
“잘 보고, 잊지 말고 명심하거라.”
환영처럼 아른거리던 어린 시절 린네의 모습은 곧 복도의 구석을 돌아 사라진다.
그러나 스승의 목소리만큼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연하게 귓가를 핥았다.
“삶은 나약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린네는 벌써 수 천 수 만 번을 곱씹어 입에 달라붙어 버린 그 뒷말을 주문처럼 읊조렸다.
“모든 비극은 나약함이 불러온 부산물일지니.”
홀린 듯이 어린 자신과 스승의 뒤를 따르려던 린네는 발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거칠게 털어냈다.
“…….”
아래를 내려보자 ‘그윽그으그’ 소리를 내며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리디아의 비서가 보인다.
대충 발목을 잡고 방금 잠금쇠를 절단해 두었던 방에 던져둔 뒤 다시 닫았다.
린네는 분명 강함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나 마구잡이로 베어 죽이는 살인귀는 아니었다.
비서의 목을 벤 건 린네의 예장인 대태도가 아니었다.
실제로 휘둘러진 건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검이 아닌 린네의 심상이 실체화한 검.
심검(心劍)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위대하다.
전원이 꺼진 냉동창고에서 동사해 죽어간 선원의 이야기는 이미 노시보 효과의 일화로 유명하지 않던가?
거기에 약간의 마법이 더해진다면 일시적으로 의식을 ‘죽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란다가 그랬듯 저 이름 모를 비서도 ‘죽음을 인지한 정신’과 ‘정상을 알리는 육체’의 소통오류 속에서 최소 일주일은 혼수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아무튼 주위에 감지될 만큼 마력을 사용하고 말았으니 시간제한은 더 촉박해졌다.
머릿속 약도를 그리며 빠른 걸음으로 시우가 기다리고 있을 리디아의 공방으로 향하려던 중.
무언가를 잊은 것처럼 다시 뒤를 보았다.
“…….”
힘을 얻었다.
나약함을 용서하지 않는 삶에 저항하기 위하여.
시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토악질하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굉음과 고함에 눈물을 줄줄 흘리던 연약한 소녀는 죽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 환영의 뒤를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면.
기억 속 그때와 다른 모습이 보였을까?
꿈속의 풍경처럼 과거와 부자연스럽게 연결되었던 복도는 어느덧 반질반질한 대리석을 자랑하며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
린네는 비가 싫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상념을 떠오르게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강렬하게 각인된 충격에서 기인한 PTSD.
린네는 이를 덮어씌워 줄 행복 혹은 평온을 느껴본 적 없다.
상처는 딱지가 앉거나 흉터로 남겨지지도 못한 채 영원히 그 자리에 잔류하는 것이다.
불쾌한 듯 콧잔등을 찡그리던 린네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따위 생각에 놀아날 시간이 없다.
지금은 신시우를 구해야 하는 때이다.
2.
“집 잘 보고 있어, 서방님. 돌아오면 마저 놀자.”
리디아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인사를 한 뒤 시우를 공방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양자리의 마녀와 조우한 이후 무도회는 특별한 사고 없이 무난하게 끝났다.
가끔 리디아에게 시우가 판매하는 제품인지 묻고 가는 해프닝 정도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무런 소득도 없었느냐 하면 아니었다.
“역시 살아있었네….”
어찌보면 시우가 마녀가 된 계기이자 스승님의 원수.
물병자리의 마녀, 에아 사달멜리크를 먼발치에서나마 직접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범해 마법을 갈취했을 시점에 에아는 자율방어조차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는 무지렁이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것인지 처음 조우했을 때보다 훨씬 흉포해진 마력은 그녀가 낙인을 완벽히 복구했을뿐더러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시사했다.
헥센나흐트 강경파에서도 특히나 급진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클리포트에는 소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소소한 정보까지 얻었다.
아무튼 홀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만큼 충분히 고민할 여유가 생겼다.
고민의 주제는 ‘이대로 리디아의 아래 있어도 괜찮은가?’이다.
일단 리디아는 특별히 시우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본디 로지를 죽임으로써 완벽히 꼬였어야 할 계획은 ‘절반가량’만 꼬이는 정도로 완충해 주었으며, 그녀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사나흘 뒤 에렐림 공작에게 양도되게 되어있다.
이 경우 염려가 되는 부분은 충분히 곱씹어 두었으니 넘어가고, 시우의 초점은 다른 곳에 맞춰져 있었다.
바로 이것.
무도회에 참가하기 전 잠깐 리디아와 관계를 지닐 때 그녀가 린네를 만나고 와 했던 말들이다.
‘린네가 찾아왔어. 널 애타게 찾더라고.’
린네가 시우를 찾는 일 정도야 예상 범위 내다.
로지에 저택에 놀러 가겠다던 제자가 갑자기 사라진 마당이니.
더군다나 시우는 남자 마녀라는 초고가치 수집품 아니던가?
‘제법이야 그 린네를 홀딱 반하게 만들고. 후후, 그나저나 호칭이 낭군이라니. 웃겨 죽는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이어진 리디아의 말은 예상 범위 밖이다.
홀딱 반하게 만들었다?
호칭이 낭군이다?
리디아가 만난 린네와 시우가 아는 린네가 동일인물은 맞는지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 그녀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리디아는 마치 린네가 시우를 찾는 이유가 ‘사랑하는 연인을 찾기 위해서인 양’ 말하고 있었다.
단순히 시우를 놀리거나 속이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무방비한 정보의 유출이었어서 더욱 미심쩍다.
“아닌데. 그날 이후엔 꽤 서먹서먹했는데.”
린네를 떨쳐내기 위해 하드한 플레이를 했고, 그 결과 린네에게 여자의 기쁨을 알려주긴 했으나 마운트 포지션을 내어준 채 코피가 날 때까지 뺨을 맞았다.
이후 다음 날까지 말도 섞지 않았다.
“설마….”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상황 속 뭔가 짚이는 바가 생긴다.
린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체질이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시우와 관계 도중 엉엉 눈물을 쏟을 정도의 쾌락을 느꼈다.
만약 도로시가 했던 말처럼 ‘빙빙 돌아가지 말고~ 그냥 네 고추로 함락시켜버리지 그래?’라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거라면?
“에이, 세상이 무슨 조교 야겜도 아니고.”
어이 없이 샛길로 빠지는 상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답답한 상황이라지만 망상도 망상 나름이다.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히 돌아간다면 애진즉 린네도 함락하고, 리디아도 함락하고 오늘 만난 양자리의 마녀도 함락해서 게헨나 하나 더 만들었지.
헛웃음을 짓고 있던 그 순간 공방 전체에 울리는 마력의 일렁임을 시우는 감지했다.
-깡!
그리고 잠시 뒤.
아주 단단한 강철을 그보다 단단한 강철로 끊어내는 청명한 소음이 귓가에 울린다.
“뭐야.”
숱한 전장에서 단련된 촉이 지금 들어온 사람이 ‘리디아’가 아님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강경파 중 하나가 시우의 존재를 눈치채고 납치하기 위해 찾아왔을 가능성도 떠오른다.
시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습관적으로 갑옷을 생성하려 했다.
그러나 마녀를 노예화하기 위해 채워진 목줄의 성능은 완벽했다.
다름 아닌 리디아 본인이 직접 손을 써 만들어낸 아티펙트였으니까.
침대 뒤로 몸을 날려 추이를 살피려던 시우보다 빠르게 침실로 들어선 인물의 정체는.
“스승님?”
린네다.
그녀는 검은 마력 반사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시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성큼성큼 다가온 린네는 시우의 앞에 멈춰 섰다.
가면처럼 딱딱한 무표정인 건 여상했으나 어쩐지 굉장히 어려운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앞에서 주춤거리는 린네.
“구하러 왔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이내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삭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다. 곧 금화의 마녀가 돌아올 것이다.”
그 짧은 사이 시우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손님으로 왔다면 검을 뽑아들고 공방에 쳐들어오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그녀가 말하는 뉘앙스만 봐도 이게 시우를 구하기 위한 불법 침입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즉, 린네는 헥센나흐트의 강력한 권력자 중 하나인 리디아를 등지는 선택을 했다는 것.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시우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왜 이렇게까지?”
시우는 황망함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원래도 무슨 속내인지 알 수 없는 린네지만 이번은 정말로 짐작이 가는 바가 없던 까닭이다.
린네는 시우의 질문이 아주 치명적인 마비독소를 포함하고 있는 양 뻣뻣해졌다.
숙련된 검사답게 언제나 이완된 어깨가 잔뜩 굳은 것이다.
“…….”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휙 시선을 피하더니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린네.
비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슬쩍 드러난 귀가 발갛게 보이는 건 촛불이 주는 착시인 걸까?
“…한시가 급하다.”
다시 한 번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리디아의 손에 운명을 맡기는 것도 마땅찮은 건 분명하지만, 이 난동을 부려 공적들의 공적이 된 린네를 따라나서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되려 일을 엄청 꼬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염려하는 바는 알고 있다. 네가 로지를 죽인 것도 알고 있다.”
린네는 그런 시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날 믿어라.”
어차피 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인 시우가 린네의 의향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옴싹달싹 할 수 없이 남이 점지해준 운명에 몸을 맡길바엔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겨보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업혀라.”
빠른 탈출을 위해 시우를 들쳐 맨 린네는 바람 같은 발걸음으로 알막 클럽의 복도를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