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
1.
어느 지성이 있는 생명체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마녀에게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마녀에게 있어 목숨은 한 사람분의 것이 아니라 마법을 발전시킨다는 소명 하에 수 대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온 선대의 유산인 까닭이다.
목숨만 구할 수 있다면 동업자에 대한 의리 및 충성심 따위는 가볍게 저버릴 수 있다.
따라서 란다는 별다른 고문 없이도 린네에게 자신이 아는 전부를 거짓 없이 말해주었다.
솔리두스 상단의 일정, 리디아의 일정.
굳이 묻지 않았음에도 비밀 통로와 각종 경계 술식이 기록된 알막 클럽의 건축도면까지 솔선하여 넘겨주었다.
“이, 이제 됐지?”
구멍 뚫린 손을 붙잡은 채 식은땀을 흘리던 란다.
린네는 묵묵히 설계도면을 훑어보고 있을 뿐인데 란다는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
통증 때문이 아니다.
린네는 이미 선을 넘었다.
헥센나흐트에서 폭력행위가 발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 흐트러진 규율을 닦아세우고 본보기를 보여야 하는 만큼 클리포트는 물론 솔리두스 상단까지 나서서 린네를 단죄할 테지.
문제는 그 단죄가 린네가 란다를 죽이건, 죽이지 않건 똑같이 일어난다는 거다.
즉, 린네 입장에서 가장 깔끔한 방법은 유일한 증인인 란다를 죽여 살인멸구 하는 것.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할게. 조용히 헥센나흐트를 떠날게.”
따라서 란다는 필사적으로 린네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린네는 건조한 눈길로 세 장째 도면을 훑어볼 뿐이다.
“정말이야, 네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 절대 말하지 않을게. 처음부터 없던 마녀처럼 지낼게.”
“특별히 조작은 없는 것 같군.”
“당연하지! 당신이라면 어렵지 않게 잠입할 수 있을 거야.”
구멍이 뚫린 손등을 싸매며 붕붕 고개를 끄덕이는 란다.
“고생했다.”
린네는 등을 돌렸다.
살았다.
잠깐 스쳐 가는 안도.
동시에 가느다란 사선이 란다의 눈앞에 그어졌다가 궤적조차 남기지 않고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극점으로 압축되었던 마력이 남긴 은은한 여운이 피부에 와 닿는다.
“어?”
란다는 시선을 내렸다.
분명히 서슬 퍼렇게 빛나던 대태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검집에 깔끔하게 납도 되어 있다.
뭔가 했다.
그 뭔가가 뭔지는 란다의 눈으로도 제대로 쫓지 못했다.
“내, 내 눈…?”
눈이 이상하다.
위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닌데 아래 흰자가 모조리 보일 것처럼 위로 천천히 돌아간다.
눈꺼풀에 가려 반쯤 검어진 집무실이 천천히 옆으로 기운다.
-쿵!
란다의 몸이 쓰러지며 다리에 걸린 의자가 요란스레 나뒹굴었다.
검을 휘둘러 란다의 목을 베어낸 린네는 소태도까지 깔끔하게 납도한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나섰다.
“…….”
운이 좋았다.
상당히 이른 시일 내로 신시우를 구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밤엔 알막 클럽에서 비밀 경매가 열린다.
이후엔 짤막한 무도회.
리디아는 무도회에 참가한 이후 헥센나흐트의 대회의에 참가하게 되어있었다.
아무리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 중이라 해도 헥센나흐트를 위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서로 이빨을 드러내 봤자 상잔을 낳을 뿐이라는 점에서도 합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향후 방침의 논의를 위해 정상급 마녀들이 대회의를 여는 것이다.
앞으로 2시간 뒤.
회의가 열리는 동안 알막 클럽은 무주공산이 된다.
물론 때마침 행운이 찾아왔다 하더라도 단신으로 신시우를 구출하는 건 여러 애로사항을 내포하고 있다.
아무리 상세한 지리를 알게 되었다 한들 그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리디아도 생각이 있다면 알막 클럽에 최소한의 인원을 배치해 두었으리라는 것, 정도가 당장 떠오르는 걸림돌이다.
그를 구출한 뒤 헥센나흐트를 탈출하는 것도 장대한 여정이 되겠으나 그 부분은 훗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의 린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름 아닌 신시우를 구해내는 일이었으니까.
“따라와라.”
향월루에 도착한 린네는 앨리스와 예빈, 붉은가지를 빼돌렸다.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린네가 사건을 일으킨다면 가장 먼저 가택 수색이 들어오리란 건 예상이 어렵지 않다.
예빈 스미르나는 뛰어난 의사이니 탈출과 도피 생활에 도움이 된다.
앨리스 이븐 하이얀 역시 대마녀이니 목줄을 해제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다른 이의 감시를 피해 두 마녀를 맡아주고 덤으로 은신처까지 제공해 줄 만한 친한 마녀가 없다는 부분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그냥 데리고만 있으면 되는 거지? 와! 이거면 장사 안 해도 3년은 놀고먹겠네.”
린네에게 요리를 알려주었던 자유의 마녀, 즐라타는 금덩이가 잔뜩 들어간 가죽 자루를 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즐라타의 약재 상점은 탈출구가 될 ‘문’과 가장 가까운 디그니티 타운이면서도 외진 골목에 있어 이목을 끌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린네와의 접점이 없었으므로 협력자란 명목하에 용의 선상에 오를 일도 없을 것이다.
훗날 안전가옥으로 쓰기에도 적격인 셈이다.
“그렇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고 절대 이 일을 타인에게 발설해선 안 된다.”
린네가 엄중히 경고하자 즐라타는 기꺼이 답했다.
“알겠어. 물론이지. 비밀 엄수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이런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건 린네가 즐라타에게 진실을 모두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즐라타는 린네의 행동이 어디까지나 신시우와 뜨거운 애정행각을 위해 저택을 비우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친가에 애를 맡기고 단둘이 정열을 불태우는 신혼부부처럼 말이다.
마침 정력에 좋은 요리를 만드는 법도 배워두었으니 더욱 의심하지 않겠지.
그녀가 진실을 깨닫게 되었을 무렵엔 이미 ‘공범’으로서 린네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좋은 시간 보내.”
아무것도 모르고 뜻밖의 수확에 기뻐하는 즐라타를 뒤로하고 린네는 즉시 알막 클럽으로 향했다.
2.
알막 클럽은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실내와 달리 투박한 붉은 박스를 눕혀놓은 형태의 건축물이다.
원래부터 군수물자를 보관하던 병기창을 개조한 건물이기에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
잠입할 루트는 극히 한정되어 있고 각종 마도기(魔道機)를 활용해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갑주 형태의 자동인형이 24시간 빈틈없는 사주경계를 하며, 거의 티가 나지 않는 감압식 카펫이, 이면 결계가 펼쳐진 즉시 경보를 울리는 보주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개중에는 불법 침입을 감지한 순간 공격마법을 구사하는 설치형 아티펙트도 존재했다.
물론 제아무리 대단한 경비라도 린네 정도 되는 대마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다만 경보가 작동하는 순간 사방에서 몰려들 마녀들은 린네라도 무시할 수 없다.
알막 클럽이 아르카나 타운의 가장 번화한 곳에 존재하는 만큼 순식간에 불가능한 일대 다 싸움으로 내몰리겠지.
그러나 란다가 발설한 정보 중에는 경비체계에 관한 상세한 지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린네는 이를 바탕으로 잠입 루트를 알막 클럽의 지붕을 통한 침투로 결정지었다.
다른 곳보다 경계가 꼼꼼하긴 하지만 리디아의 공방과 가장 가까우며 구출 이후 도주 동선도 합리적이다.
-팅!
허리춤의 검을 뽑아 유리창에 걸려있던 걸쇠를 가볍게 절단하고 복도로 살포시 내려앉은 린네.
검은 무복을 입은 신형이 복도의 어둠에 스며들었다.
잘 연마된 대리석을 달리다시피 걷고 있음에도 조금의 기척도 없는 린네의 몸놀림은 흡사 소리 없이 기어가는 거미를 연상케 했다.
밟으면 안 되는 바닥이 등장하면 아무렇지 않게 벽면을 타고 걷는다.
느릿하게 공중을 부유하며 침입자의 마력 패턴을 기록해두는 수정구는 예리한 검격에 의해 경보도 울리지 못하고 연약한 유리세공처럼 깨져나간다.
길고 컴컴한 복도는 한 면은 유리창, 한 면은 방이라는 호텔 객실과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중 어느 방에 그가 잡혀있을지 모르는 린네로선 모두 확인해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은밀잠입 중인 상황에 대규모 탐색마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고 후각에 의존한다 해도 한계가 존재하니 말이다.
-팅!
문짝과 문틀의 얇은 틈새로 정교하게 휘둘러진 검격은 아무 저항 없이 강화술식이 걸린 잠금쇠를 절단한다.
문을 열고 체크, 특이 사항이 없으면 즉시 다음 방으로 이동, 이후엔 반복.
고가의 경매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고, 중요한 손님에게 내어줄 용도로 비워두는 객실도. 내부 공사가 끝나지 않아 그대로 방치된 방도 있다.
그러나 시우의 모습도, 냄새도 기미가 없다.
리디아의 몸에 시우의 체취가 스몄다는 건 둘이서 밀착해있었을 확률이 높다.
남녀의 밀착 행위가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는 곳이 침실임을 생각하면 리디아의 공방이 가장 유력한 감금 장소겠지.
하지만 으레 그렇듯 공방부터는 보안의 레벨이 달라진다.
아무리 란다라도 공방의 보안체계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요컨대 공방에 손을 대는 순간부터는 더욱 급박한 타임어택 구출 작전이 된다는 의미.
“…….”
그러나 린네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애초에 빈방을 모두 뒤져보는 게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그토록 완숙한 테크닉을 지닌 신시우라면 일회용으로 사용된 뒤 감금 장소에 처박혔을 리 없으리라고.
기둥서방 포지션을 차지해 리디아의 침소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으리라고 판단을 내린다.
린네는 곧장 행선지를 리디아의 공방 쪽으로 바꾸고 모퉁이를 돌았다.
하지만 침투 전 꼼꼼한 자료수집을 했다 한들 모든 변수에 대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 검의 마녀?”
긴 복도의 맞은 편 등불을 든 한 마녀와 마주한다.
조금 전 린네의 서슬에 떠밀려 리디아를 호출했던 리디아의 비서였다.
복도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알겠지만 알막 클럽의 최상층은 오직 리디아를 위한 공간이다.
허락받지 않는 마녀는 발을 들인 것만으로 불법 침입으로 간주한다는 것.
따라서 비서는 린네를 발견한 즉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범죄를 저지르고 사라진 남자마녀를 찾기 위해 떠났던 그녀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당신이 왜 여기에 있지…?”
“베어라.”
“미, 미쳤어?”
영창과 함께 검은 마력이 먹물처럼 린네의 주위로 뻗어 나간다.
롱 갤러리에 버금갈 만큼 화려했던 복도의 풍경이 물을 듬뿍 먹인 수묵화처럼 변모한다.
복도의 카펫을 밟으며 질주하는 린네의 모습 역시 흐릿하게 휘갈긴 먹선의 연장처럼 보일 뿐이다.
이것이 린네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일격.
마력의 고유한 특성을 잠식하여 검고 흰 무미건조한 세계에 가두는 ‘흑백세계’.
엉겁결에 강력한 방어막을 전개한 비서였으나, ‘자성마법’의 힘을 잃은 방어막은 쉽사리 부서지는 플라스틱과 다름없었다.
-촤아악!
붓처럼 휘둘러진 새하얀 도신이 먹물처럼 검은 피를 벽면에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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