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0
1.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디아의 암컷조교 섹스는 불발되었다.
제대로 된 사정도 절정도 없이 마무리된 것이다.
“아아, 시간을 너무 낭비했나 보네. 다녀올게.”
이유는 비밀 경매가 끝나고 있을 무도회에 출석해야 한다는 것.
솔리두스 상단의 주인이 리디아인만큼 마음대로 빠질 수 없다는 사정이었다.
“네, 그럼 그 시간 동안 전 뭐 하고 있나요?”
“여기서 얌전히 있어. 아니면 따라올래?”
“따라가도 되나요?”
가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라기보단, 순수하게 ‘진짜 그래도 되긴 되나?’라는 심정에서 나온 물음이었다.
일단 시우가 리디아 아래 있는 것부터가 밝혀져서는 안 될 비밀 아니던가?
시우뿐 아니라 리디아에게도 지켜야 할 기밀사항 말이다.
“브리싱가멘이 있잖아. 내 파트너로 참가하면 돼. 알려지지 않은 아티펙트니 간파할만한 사람은 없을 거야. 설령 의심을 품어도 누가 감히 내 파트너의 신상을 털려고 하겠어.”
“흐음….”
“매번 파트너를 골라가는 것도 고역이거든. 다들 무도회만 끝나면 뭐하나 떨어지는 게 없을까 질척질척 엉겨 붙어서 짜증 나.”
이에 리디아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리디아 자체가 완벽한 계획보다는 살짝 선을 타는 행위를 즐기는 것 같은 인물이니 본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으리라.
고위 공적들의 무도회라....
굳이 갈 필요는 없지만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리디아가 도락가적 기질이 엿보이는 마녀라 하더라도 본인의 손익에 관련된 상황을 안일하게 다룰 리 없는 건 분명하다.
일단 이만한 상단을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방에 갇혀 있을 경우 이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무도회에 참석할 경우 약간의 위험은 감수하더라도 다양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정은 어렵지 않다.
“좋아요, 가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옷 챙겨입고 따라와.”
그리하여 난생처음 무도회에 데뷔하게 되었다.
2.
무도회는 알막 클럽 북관 최상층에 있는 살롱에서 개최되었다.
말이 무도회이지 실상은 사교모임 또는 유희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내가 기획한 건데, 이 무도회도 제법 인기가 좋아.”
리디아는 살짝 뻐기듯 턱을 치켜들며 웃었다.
“공적이란 건 기본적으로 같은 공적이라 할지라도 적대 관계였잖아? 하지만 헥센나흐트가 등장하게 된 이후로는 그다지 큰 경계를 하지 않고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지.”
“그렇죠.”
“너라면 궁금하지 않겠어? 악명이 자자한, 또는 흉포하기로 짝이 없는, 혹은 평생 얼굴도 본 적 없이 이권싸움만을 벌여왔던 공적을 안전한 장소에서 만나볼 수 있는 건데.”
이해는 간다.
당장 시우만 해도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 궁금해 동행을 결정한 것이니까.
대부분의 공적과 일면식도 없는 시우도 이 정도인데 오랜 세월 동안 마녀 사회에 몸담아온 공적으로선 말할 것도 없겠지.
거대한 문을 거쳐 무도회장에 들어서기 전 리디아는 잠깐 여유를 두었다.
“들어갈게. 준비됐니?”
“네.”
리디아는 뇌쇄적인 노출을 선보이는 검은 드레스, 에스코트를 맡은 시우의 복장은 멋들어진 연미복이다.
참고로 브리싱가멘을 써도 가려지지 않는 금안은 안대로 가렸다.
“너무 긴장할 것 없어. 넥타이가 좀 틀어졌는걸?”
“아, 감사합니다.”
“들어가자.”
연미복의 나비넥타이를 고쳐 준 리디아와 함께 거대한 문을 열고 무도회장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양복을 갖춰 입은 악단이 연주하는 몽환적인 왈츠의 가락이 도도히 흐르며, 곳곳에서 번지는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화사한 장미처럼 피어난다.
급사복을 입은 훤칠한 미남들이 샴페인과 다양한 핑거푸드를 은쟁반에 얹은 채 분주히 구두굽을 울린다.
거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다섯이나 줄지어 매달린 널따란 홀.
자욱한 연초와 물담배 연기가 뿌옇게 흩어지고 있는 가운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파티를 즐기는 마녀의 모습이 보인다.
레드카펫이 깔린 중앙 계단의 바로 앞은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에는 짝을 이룬 마녀 둘, 혹은 마녀와 남총이 왈츠의 가락에 맞추어 경쾌한 춤을 추고 있다.
곳곳에 놓인 소파에 눕듯이 앉아 술을 진탕 마시는 마녀도 있었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진득하게 키스를 나누는 마녀와 급사도 있었다.
화려하면서도 어쩐지 퇴폐적인 분위기.
이토록 본격적인 무도회는 처음인지라 비교 대상이 마땅찮지만 게헨나에서 열리는 무도회도 특별히 다를 것 같진 않다.
“저 계단을 통해서 위로 올라가면 객실도 있어. 방음도 아주 완벽한 좋은 객실이야. 저쪽엔 바가 있고, 저쪽으로 가면 마사지를 받을 수 있어. 자, 이쪽으로.”
주최자인 리디아가 들어섰음에도 한 번씩 시선을 던질 뿐 큰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우 측에 시선이 꽤 오랫동안 머문다.
“…엄청 주목받는데요.”
“넌 내가 처음으로 파트너로 데려온 노예니까. 또 시순 양은 키가 크잖아. 태연하게 굴어도 돼.”
속닥속닥 귓속말을 나누던 리디아는 지나가던 급사에게서 샴페인 한잔을 받아 마시고 발길을 옮겼다.
그녀가 지나가니 몇몇 마녀가 말을 걸어온다.
“멋진 파트너네요. 이름이 뭔가요?”
“그렇죠? 레시아스에요. 이번에 길들이게 되었는데 아주 귀여워요.”
“이렇게 키가 큰 마녀는 처음 봐요.”
단, 상급자에게 향한 예우라기보다는 명품백을 새로 들고 온 귀부인에게 보이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것마저도 말을 붙이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인지 붉은 머리 마녀는 거의 곧장 본론을 꺼냈다.
“아, 혹시 잠시 대화 나눌 수 있을까요? 이번에 양지 사업으로 보석세공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동업과 투자를 제안하고 싶어서요.”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다음 곡 때 함께 춤추자.”
“네.”
‘갑자기 이런 데 혼자 남겨두면 어떡해!’ 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리디아는 가볍게 시우의 등을 떠밀 뿐이었다.
괜히 따라왔다.
내심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근처 소파에 앉았다.
멀뚱멀뚱 앉아있기도 뭐해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적의 파티라기에 온건파니 과격파니 살벌한 기 싸움이라도 펼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다들 유유자적 대화를 나누거나 여유롭게 파티를 즐기고 있다고 해야 하나?
조명이 어두운 곳에서 조금 수위 높은 음란행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이한 무도회였다.
리디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고 있자니, 바라지 않던 최악의 이벤트가 일어났다.
“안녕.”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키가 겨우 150이 될까 말까.
구두를 빼면 147~8cm쯤이 되겠지.
컬이 잔뜩 들어간 곱슬곱슬한 금발과 온화해 보이는 연두색 눈동자가 마치 순한 양을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이다.
파티 드레스나 이브닝 드레스보다는 파자마가 훨씬 어울리는 외형이었는데, 본인도 자각이 있는 것인지 꽤 편안해 보이는 원피스를 입었다.
특이 사항으로는 제 키보다 커다랗고 끝 부분이 구부러져 놋쇠 종이 달린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옆에 앉아도 될까?”
“그러시죠.”
견습마녀 같은 앳된 분위기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겉인상으로 사람을 파악하면 안 되지만, 공적 특유의 위험한 느낌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다.
어쩌면 추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헥센나흐트에 공적만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소파에 앉자 다리가 땅에 닿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마녀가 얼마나 쁘띠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체이기에 비율 자체는 좋아서 머리가 과장 좀 보태어 주먹만 하다.
“키가 엄청 크길래 궁금해서 말 걸어봤어.”
“레시아스라고 하옵니다.”
“그렇구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위계가 높지 않아서요.”
참고로 이 레시아스라는 이름은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테이레시아스에서 따와 강제로 붙여진 이름이다.
뱀의 저주를 받아 남성과 여성의 삶을 동시에 살아본 인물 말이다.
그나저나 위화감이 장난 아니다.
시우 입장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생으로 나가고 있는데 실제로는 여성의 것으로 들린다는 거 아닌가?
“원래부터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컸던 거야?”
“네?”
“키 말이야.”
“네.”
“그렇구나. 딱히 비결 같은 건 없는 거네.”
“그렇습니다.”
신기한 듯이 시우를 바라보는 마녀.
“마녀님께선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프시케 티가든.”
이름이 차원(茶園)이라.
독특한 네이밍이 마녀 사이에서도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뭐 그러려니 한다.
정체가 들통 날 법한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리디아가 한시라도 빨리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너 날 모르는구나?”
한편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시우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던 프시케가 말했다.
“예?”
“다들 처음에 이름을 들으면 놀라던데 아무렇지 않다 싶어서.”
유명한 마녀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몇 명이나 되는 마녀와 대화를 나누던 리디아가 돌아왔다.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누님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 모습이 너무 반갑다.
“어머? 티가든 님.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심심해서 들렀어.”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훌륭한 무도회야 음악 구성도 좋고. 하지만 달콤한 디저트가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어. 초콜릿 분수도 좋아.”
“다음엔 꼭 참고할게요.”
프시케는 자리에서 폴짝 일어났다.
“다음에 또 보자.”
시우에게 작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지팡이를 또각또각 짚으며 떠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이 복도에 돌아 사라지고 나서야 리디아는 입을 열었다.
“운이 좋네. 저 사람, 엄청 가끔 목격할 수 있는 마녀거든.”
리디아는 대외적으로 위계와 나이에 관계없이 존대를 사용한다.
하지만 프시케를 대하던 그녀의 모습이 유달리 깍듯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우도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누구인가요?”
“그 유명한 양자리의 마녀야.”
“…네? 저 사람이요?”
아무리 시우라도 그 이명 정도는 들어보았다.
왜냐하면 양자리의 마녀는 그 유명한 옛 마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거 클리포트의 수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점.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많은 클리포트 구성원을 죽이고 홀연히 잠적했다는 점에서도 이명이 널리 알려져 있는 마녀다..
“헥센나흐트가 생긴 이후 거의 곧장 도시로 들어왔어. 지금은 온건파 쪽에 힘을 실어주는 중이지.”
“그럴 수가 있나요? 배신자 아니에요?”
“아무렴, 아주 예전 일이기도 하고. 그때는 서로 죽이는 게 당연한 거였는 걸.”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리디아의 말을 들으며 시우는 마녀 사회에서 겉보기로 상대를 파악하는 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