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
1.
어지간한 손님이 방문했다면 그대로 침대에 눌어붙어있을 작정이던 리디아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로지의 공방에서 주워 온 신시우의 본 주인.
검의 마녀가 친히 알막 클럽을 방문했으니 말이다.
만약 리디아가 신시우를 에렐림 공작에게 털어내는 기존 계획을 고수했더라면 구태여 만나러 갈 필요성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척 시치미를 뚝 떼다가 시우를 곱게 포장해 공작에게 보내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지 중 하나로 ‘신시우를 비밀리에 소유한다’를 취한 이상 린네를 저대로 두는 건 오히려 불안요소를 키우는 일이다.
린네가 얼마나 막무가내인지, 한 가지에 꽂히면 절대로 멈추지 않는지는 소문과 숱한 일화가 증명했다.
그녀를 얼마나 잘 납득시켜 돌려보내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편안함이 달라지리라.
“안녕하세요?”
사근사근한, 그러나 비굴하지 않은 사업가용 미소를 한가득 문 리디아는 VVIP전용 응접실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방금 리디아에게 전화를 내렸던 마녀가 바들바들 떨고 있던 까닭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문을 열고 나선 형태의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살갗을 스치는 베일 듯한 예기.
아직 린네와의 거리는 10M도 넘게 떨어져 있음에도 ‘이곳이 나의 검역이다’라고 선포하는 듯한 흉포한 살기가 실내의 공기를 들끓게 하고 있었다.
과연 나름 20 위계 마녀가 구조 요청하듯 전화를 한 이유가 있었다.
“…….”
내어준 홍차에는 입도 대지 않고 자리에 서서 리디아를 쏘아보는 린네.
옆 테이블에는 웬 보따리인지 도시락인지 묘한 물체가 있다.
“바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토록 급히 찾으신다는 건, 신시우를 넘길 생각이 드신 건가요? 잘 생각하셨어요. 값은 넉넉히 치러 드릴게요.”
입에서 ‘신시우’라는 말이 흘러나오자마자 린네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을 리디아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린네가 찾아온 목적은 신시우가 맞다.
“네 소행이겠지?”
저렇게 격정적인 분위기임에도 고저의 변화가 없는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린다.
하지만 리디아 역시 숱한 전장을 거쳐 온 백전노장.
여차하면 린네를 실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기에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모습으로 태연하게 응대한다.
“소행이라뇨?”
그게 무슨 말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눈을 끔뻑이는 리디아.
내심 통쾌했다.
리디아가 직접 찾아가 부탁했음에도 제자라느니 뭐니 핑계를 대가며 그의 몸값을 불리려 하던 린네이다.
중립파인 그녀가 정치적 중요인사를 붙잡고 있는 통에 행여 강경파가 손을 먼저 뻗는 것은 아닐지 어찌나 노심초사했던가?
지금은 이렇듯 상황이 뒤바뀌었으니 섹스를 방해받은 짜증도 잊고 고소함에 미소 짓게 된다.
“왜 이리 화내시는 모르지만, 설마….”
“…….”
“신시우가 사라졌나요?”
곧장 팔짱을 끼고 골몰히 생각하는 시늉을 하는 리디아.
“이건 문제네요. 강경파 쪽에 넘어가기라도 했다간 일이 복잡해질 텐데….”
“…….”
“수색을 돕겠어요. 대신 그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넘겨 주시겠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했을 법한 반응을 통해 용의 선상에서 내려서려는 시도이다.
리디아에게선 흔히 거짓말을 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바디 사인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신체 반응 역시 최신식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해도 감지할 수 없을 감쪽같은 거짓말도 리디아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이렇게까지 뻔뻔이 굴 수 있는 건 린네가 아무런 증거 없이 추측만으로 이곳을 찾았다는 확신 때문이다.
로지의 놀이방과 저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리디아가 꼼꼼히 수색해 증거를 없앴다.
상위 타운의 치안담당 업무는 솔리두스 상단도 분담하고 있기에 감시 수정구의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고 빈틈을 파고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린네가 아직까지 증거물을 면전에 들이밀지 않는다는 게 확신에 무게를 더했다.
무엇보다 행여 증거가 있다 해도 대놓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제자’인 신시우가 헥센나흐트 내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실 또한 시인해야 할 테니.
그녀에게까지 책임소재가 미치지 않는다 해도 제자를 잃는다는 결말은 마찬가지다.
린네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빤히 리디아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후.”
다시 눈을 떴을 땐 살기 대신 계산에 돌입한 계략가의 시선이 보인다.
심증만으로는 추궁이 의미 없다는 것을 린네도 파악한 것이리라.
“네 소행이 아니란 건가?”
“당연하죠. 저는 한동안 비밀 경매 준비로 바빴으니까요. 왜 클리포트를 두고 절 의심하시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네요.”
“강경파 놈들이라면 벌써 그를 죽이고 홍보하고도 남았다.”
“꼭 그렇게 생각할 것도 없죠. 충분한 도발과 퍼포먼스를 위해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수도 있으니까요.”
“나중이라도 지금 말한 사실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면….”
“제자를 잃을 위기에 처해 속상하신 건 알겠어요. 하지만 현시점에서 가장 큰 조력이 될 수 있는 저 리디아까지 적으로 돌리는 게 옳은 일일까요? 이건 제게도 중요한 문제에요. 그의 신병이 클리포트 측에 넘어가면 어떻게 될지는 전에 말씀드렸죠?”
“…….”
“저도 협조하겠어요. 대신 그를 되찾았을 때 소유권에 대해 다시 한번 논의할 수 있을까요? 검의 마녀의 제자라는 타이틀에 합당한 비용까지 추가로 지급하겠어요.”
마무리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다는 양 기만을 선보여주면 끝.
만약 린네가 공조를 허락한다면 시기를 보아 강경파 쪽에 증거를 던지고 린네가 쫓게 하는 방법도 있다.
자연스럽게 충돌이 일어날 것이고, 이 사건에 의심을 품을 유일한 사람도 제거되니 일거양득이다.
“좋다. 받아 들이지.”
그러나 이쯤 되면 순순히 물러가리란 예상은 빗나갔다.
린네는 다시금 리디아를 쏘아보며 말했다.
“허나 먼저 알막 클럽을 수색하겠다.”
“네?”
“지금 당장 네 방부터 살피게 해준다면 믿겠다.”
린네의 부탁은 당연히 ‘부탁’이라는 축에도 들지 못하는 무례이다.
그 무례를 입에 담는 린네의 태도 역시 정중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막아선다면 강제로라도 치고 나가겠다는 다짐이 보이는 언행.
“금화의 마녀, 난 널 신용하지 않는다.”
“왜죠?”
“직감이다.”
“…….”
“불허한다면 네가 그를 숨기고 있다고 상정하고 움직이겠다.”
확신도 없는 주제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고집에 리디아의 반응은….
“하아, 못 해먹겠네.”
한숨이었다.
마녀감수성이 부족하다면 린네의 발언이 어떤 뉘앙스를 지니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조금 더 일상적인 감각으로 말하자면 ‘증거는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니가 범인인 것 같은데 네 집에 압수수색 영장 없이 흙발로 들어가서 각종 중요 문서도 겸사겸사 훑어봐도 되겠니?’ 정도가 되겠다.
선을 넘은 것이다.
“내 공방을 뒤지겠다고?”
“그렇다.”
바이어를 대하는 사업가적인 존대를 내다 버리고 싸늘하게 말하는 리디아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맞받아치는 린네.
리디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일단 기만작전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헛웃음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오냐오냐해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현역이었으면 눈도 못 마주쳤을 년들이 이렇다니까.”
지금은 꽤 온건적인 행보를 밟고 있다지만 리디아 역시 공적이다.
23 위계에 달하는 전 클리포트의 최정예 중 일원이었다.
“그까짓 으름장에 겁이라도 먹을까 봐? 그렇게 자신 있어?”
리디아의 주변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밀도를 지닐 만큼 농밀하게 피어오른 마력이 공기를 밀어내는 것이다.
“내가 너처럼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마녀 몇 명이나 묻어봤을까? 한번 맞춰볼래?”
“혀가 길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거품을 물 만큼이나 긴박한 일촉즉발의 상황.
허리춤에 감긴 검으로 손을 올린 린네가 멈칫하더니 슬그머니 검을 놓았다.
두 사람 사이 깨질듯한 마력의 격돌도 서서히 잦아든다.
“잘 생각했어요. 괜히 엄한 사람 잡지 말고 우리 지금부터라도 건실한….”
먼저 꼬리를 내리는 린네의 모습에 리디아는 코웃음을 숨겼다.
대신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며 다시 비지니스 이야기를 꺼내려던 차, 말문이 턱 막혔다.
방금까지 살벌하게 굴던 린네가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재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린네의 충격적인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례했다면 사죄하겠다.”
“지금 이게 무슨 장난….”
냉철한 리디아조차 할말을 잃게 하는 린네의 도게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린네가 이마를 땅에 붙이며 사과한다.
“어떤 값을 치러도 좋다. 구두를 핥으라면 핥고, 시중을 들라면 어떤 시중이든 들겠다.”
“…….”
“그를 보호하고 있다면 부디 돌려다오.”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마녀들.
그중에서도 유달리 오만한 공적 사이에서 무릎 꿇기란 목숨을 구걸하는 극한의 상황이 아니라면 나오지 않는 행위이다.
애초에 한눈을 팔면 뒷목에 마법이 박힐지도 모르는 공적들 사이에서 생살여탈권의 일부를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없으며, 굴복의 대상이 방금까지 격렬히 대립했던 상대라면 굴욕은 배가 되겠지.
그런데 강함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는 유아독존 린네가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한다고?
신시우를 제자라고 말했던 건 단순히 눈속임이 아니었던 건가?
린네는 그를 정말 제자라고 어여삐 여긴 건가?
혼란을 느끼면서도 리디아는 조심스레 린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한다.
“린네. 정말 미안하지만 제가 데리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가.”
꿋꿋이 머리를 숙이는 린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허리를 숙여 린네의 무릎을 탁탁 털어주는 리디아.
“저도 조금 흥분했네요.”
물론 단순히 호의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다.
“저는 당신이 그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제자로 위장했다고만 생각했어요.”
“…아니다.”
“진의를 의심한 것도, 당장 도움이 못된 것도 미안해요. 실례가 아니라면 그와는 어떤 식으로 사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 검의 마녀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원인이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
린네는 잠시 리디아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는 제자가 아니다.”
“네?”
“나의 낭군이다.”
“으엑?”
경망스러운 경악성을 내뱉으며 턱을 떨어뜨리는 리디아.
농담은커녕 독불장군으로 유명한 린네가 이유 없이 거짓을 고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제야 린네가 무릎까지 꿇었던 이유가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
또한 관계 중 신시우가 키스를 피했던 이유도 말이다.
두 사람은 이미 금지된 사랑을 나누고 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