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
1.
이상한 꿈이었다.
끝을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넓은 호수.
그 수평선 너머로 검은 수면과 맞닿은 별의 바다.
부피감마저 느껴지는 두꺼운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는 와중, 호수 한가운데 높다란 탑이 등대처럼 우뚝 서 있다.
이렇게나 넓음에도 수위는 얕았다.
호수의 한가운데로 들어선 다해도 허리께에서 찰랑대는 정도이겠지.
바람 한 점 없음에도 끊임없이 물결치는 수면 아래는 형형색색의 기이한 빛 무리가 긴 실을 자아내며 모습을 얼핏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한다.
시우는 호숫가에 망연히 서서 실낱의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문득 철썩이며 발끝을 적시는 것은 본디 잔잔한 호수에 존재할 리 없는 파도.
범람한 수면에 피부에 닿을 때마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으며.
때로는 자상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타이르는 조언인가 싶기도 했다.
공연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어떨 때는 환희가, 비탄이, 흥분이, 낙담이.
여러 감정이 담겨있는 팔레트가 정신을 덧칠해 가는 양 끝없는 상념을 선사하고 덧없이 사라진다.
호수 위로 밝은 달이 떠올랐다.
조용히 제 모습을 뽐내던 별자리는 월광의 광명함에 비교되는 것이 부끄러운 듯 자취를 감추고.
커다란 구멍처럼 교교히 빛나는 만월을 올려보고 있자면 하늘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흥얼거리는 노랫자락과 함께 누군가 호수 위를 거닐었다.
이음매가 없는 하얀 옷을 걸친 이는 많아야 10세 남짓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물을 참방이며 춤을 추고 있는 작은 소녀는 마녀조차 가늠하기 힘든 오랜 역사와 함께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믿음은 먼 거리에서 눈이 마주한 시점에서 확신으로 돌변한다.
기나긴 삶을 거듭하며 비대해진 자아.
세계의 환류에 깎이고 마모되어 더는 빛나지 않는 눈동자는 소녀가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우를 발견한 소녀는 깜짝 놀랐다는 듯이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그리고는 장난을 치듯 드레스의 양 끝단을 붙잡고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꾸벅 인사하였다.
이토록 먼 거리임에도 귓가에 생생히 들려오는 말.
“거꾸로 매달린 왕에게 저의 경배를.”
거룩한 숭배로도.
비웃음이 섞인 조롱으로도 들리는 말이었다.
2.
…이게 뭔 개꿈이야.
눈을 뜨자마자 이렇게 중얼거리게 될 만큼 생생한 꿈이었다.
어찌나 현실 같았는지 흐릿한 천장에 좀 전의 광경을 고스란히 그려낼 수 있을 정도다.
꿈에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잠결이 조금이나마 가시고 나니 그 풍광이 무엇과 닮았는지 얼핏 떠올릴 수 있었다.
거대한 호수, 탑.
스승님이 해주었던 예언기관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다.
그렇다면 춤을 추며 시우에게 기이한 말을 건넸던 소녀가 예언 기관을 관리하는 묵시의 마녀인 걸까?
한낱 꿈으로 치부하려 해도 그녀와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마음에 걸렸다.
이게 꿈일 리 없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아….”
그러나 가물거리던 천장이 몇 번의 깜빡임과 함께 굉장히 낯선 모양새임을 깨닫자, 시우는 새삼 해몽에 신경 쓸 때가 아님을 떠올렸다.
로지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때려잡았던 일.
금화의 마녀가 놀이방에 들어와 강력한 수면 마법을 걸었던 일.
그렇다면 이 침대는?
부드러운 체취가 나는데다가 푹신한 이불과 베개 탓에 한평생 머물고 싶던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기는 어디일까?
“…….”
먼저 지하감옥이라기엔 시설이 너무 좋다.
방 한쪽은 두꺼운 암막 커튼이 둘린 가운데 어스름한 실내공간과 조용히 타오르는 촛불.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자 대항해 시절 부유한 상인의 방 같다.
각종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모아놓은 듯한 호화로운 장식품이 그런 인상을 더한다.
가령 발소리를 줄여주는 융단이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는데 사치품을 보는 안목이 늘어난 시우가 보기엔 꽤 대단한 것이었다.
최고급 소재를 활용해 수작업했을 것이 분명한 페르시아 실크 카펫.
별 생각 없이 밟고 다녔던 백작가 응접실의 카펫이 개당 한화 10억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만한 넓이의 방을 전부 덮을 크기의 카펫이라면 가격이 짐작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벽에는 각종 금화를 수집해 전시해 놓은 듯한 액자가 걸려 있었고, 부족사회에서 예식용으로 쓸 법한 뿔피리가 선반에 놓여있고, 근위병의 갑옷 같은 것이 방 귀퉁이에 서 있다.
박물관에서도 가장 엄중한 감시하에 전시되어야 할 것 같은 화려한 왕관 따위가 옷걸이에 아무렇게나 널려있기도 했다.
이렇게 보니 눈에 띄는 온갖 보화를 수집하는 용의 둥지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다만 값비싼 물건을 난잡스레 쌓아놓은 것에 불과함에도 부자 흉내를 내고 싶은 속물의 저속함 대신 정숙한 품위가 느껴지는 건 조금 기이한 일이다.
감상은 나중이다.
우선은 여기가 어딘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시우가 암막 커튼을 열어 밖의 풍경을 살피려던 때.
“일어났네, 성깔 있는 남자 마녀 씨.”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는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재보의 잡동사니 속 오도카니 놓인 테이블 위에 금화의 마녀가 싱긋 싱긋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곳곳에 가득히 쌓인 보물들 사이에서 화사하게 빛나는 그녀의 존재는 마치 한몸인 것처럼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피곤할 텐데. 조금 더 침대에 누워있어도 돼. 마력 사용을 제한해 두었거든. 남자에게 금제를 거는 건 처음이라 좀 과하게 했어.”
그녀의 말대로였다.
어쩐지 몸이 평소보다 무겁다 싶더니 마력 회로의 주요부위마다 운용이 제한되어 있다.
물론 단련된 영체를 지닌 시우인만큼 이 상태로도 전투수행이 가능하지만, 상대가 마녀라면 사실상 무저항 상태로 퇴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금제의 원인은 목걸이.
앨리스가 착용하고 있는 아티펙트와 같은 물건으로 보인다.
다만 그럼에도 낙인이 새겨진 눈의 기능은 정상 작동 중이다.
“일단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게헨나에 노예로 잡혀 왔던 것도 계산에 포함하면 르뤼에, 린네에 이은 무려 네 번째 납치이다.
이 정도면 피납치의 프로패셔널이라 자부해도 좋다.
겁에 질리고 패닉에 빠져서 난동을 부리는 건 하책.
정중한 말씨로 납치자의 호감을 사며 상황 파악을 우선순위로 두는 게 상책이다.
-탁!
리디아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붙잡던 펜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집무를 보던 테이블에서 일어나 시우에게 한 걸음씩 다가온다.
“당연히 감사해야지. 내가 아니었더라면 클리포트가 널 찢어 죽여서 게헨나에 던져 놓았을 테니까. 어쩌자고 그런 일을 벌였어?”
“제가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서요.”
“음, 한국 출신이지? 혹시 공익이었니?”
“현역 만기 제대했습니다.”
의분을 참지 못했다느니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했느냐느니 하는 말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상대도 어쨌거나 공적이니까.
요지는 왜 금화의 마녀가 곤경에 빠진 시우를 도왔느냐는 것.
의도가 순수할 리는 없으니, 그 의도를 둘러싼 주위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보이는 건 금화의 마녀, 리디아 마그누스의 꿍꿍이와는 별개로 그녀에게서 공적 특유의 광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장 에아, 비앙카 로지 심지어 린네만 해도 ‘와 이건 뭐지?’ 싶은 광기가 아른거렸는데 리디아는 조금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합리성의 근거해 움직이는 사업가 같달까?
어쩐지 장모님들이 생각났다.
“머리 팽팽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데?”
“…….”
“흡연자였지? 한 대 피워, 조금 진정이 될 테니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시우의 근처에 다가온 리디아는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냈다.
빨간 립스틱으로 장식된 입술에 한 개비를 끼우며 동시에 시우에게도 한 까치를 건네준다.
-칙!
손끝에 피워낸 불로 불씨를 당기고 맞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리디아와 시우.
그 틈에 힐끗 시선을 내리깐 그녀를 보았다.
아멜리아보다 조금 짙은 색의 머리카락.
스승님처럼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은 색조의 금발이 어깨 부근에서 깔끔하게 잘려있는 중단발이다.
거기에 황갈색이나 호박색 따위가 아닌 순금을 녹여 장식한 듯한 금안이 굉장히 요사스럽다.
재물운 따위를 믿어본 적은 없지만, 리디아라면 숨만 쉬어도 막대한 부를 거머쥘 팔자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앉아서 편하게 피워.”
리디아는 암막 커튼을 향해 놓여있는 두 개의 소파 중 하나를 권했다.
소파 사이에 놓인 테이블 위엔 재떨이와 함께 비싸 보이는 샴페인이 얼음 바스켓에 담겨 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내 침실.”
“절 왜 도와주신 건가요?”
“궁금한 게 많은 건 알겠지만, 내가 당장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
“…그렇습니다.”
그녀의 말대로다.
리디아가 원했다면 그 자리에 시우를 놓고 가는 것만으로 시우를 곤궁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임시 스승이라고는 하나 린네가 헥센나흐트의 규율을 어긴 시우를 위해 어디까지 방파제 역할을 해줄지도 미지수다.
전후 사정이나 시우를 대하는 린네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아마 유기당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할 뿐.
또한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낙인을 끄집어낼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리디아가 예전에 말했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있다’라는 말이 아직 유효기간이 경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
“슬슬 개막 시간이라서 말이야. 느긋하게 관람이나 하고 이야기할까?”
“알겠습니다.”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기대앉은 리디아가 손끝을 튕겼다.
한 쪽 벽면 전체를 가로막고 있던 커튼이 극장의 막처럼 열리며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드러났다.
3.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던 도로시와 아멜리아 그리고 엘로아.
심각한 표정으로 최적의 작전을 모색하던 중 르뤼에가 심각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도로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네네, 무슨 일이세요 공주님?”
“짐이 탁월한 점술가라는 점은 그대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이죠~”
물론 르뤼에의 자성마법에는 점성술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고, 그녀가 아는 한 제대로 된 점을 치는 건 행운의 마녀나 묵시의 마녀 정도였지만 일단 동의해 주었다.
“하여 짐이 원대한 구출 계획을 앞두고 소라 점을 쳐 보았느니라. 자, 이걸 보아라.”
르뤼에는 세상의 멸망을 묵시한 예언가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소리고동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보거라 이 말림 새와 결을 보면 ‘언뜻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모든 일이 꼬이고 있음’이라는 점괘이니라. 이럴 때는 현재 사태를 너무 쉽게 여기지 말고 더욱 나은 방책을 준비해야 함이니라.”
“네네, 꼭 준비하도록 할게요.”
도로시는 대수롭지 않게 르뤼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