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709화 (709/917)

#709

1.

코하브 백작은 그것이 제 할 일이라는 양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홍차를 묵묵히 치웠다.

소파에 앉아 홍차를 마시는 에렐림 공작에게 힐끗힐끗 시선을 날리며 말이다.

“이본느, 할 말이 있다면 하세요.”

“아니요. 그런 건….”

“괜찮아요. 말해도 좋아요.”

고민하던 이본느는 조금 전 듣게 된 충격적인 소식에 대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신시우와 티페레트 공작이 연인 관계였군요.”

그 뒤로는 ‘사제 관계인데 어찌….’ 같은 불경한 것을 접한 듯한 푸념이 뒤를 잇는다.

마녀 사회의 사제관이 어떤 의미인지 티페레트 공작이 모를 리 없는데 그럼에도 연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에서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본느가 이런 말을 꺼낸 것도 서론에 가까웠다.

본론이 따로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블랑쉬에게 이본느가 재차 말을 걸었다.

“왜 티페레트 공작에게 말하지 않으셨나요? 평화 조약의 대가로 신시우의 신병을 양도받기로 되어있다는 것을요.”

그렇다.

현재 진행 중인 금화의 마녀와의 평화 협정에는 그와 같은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사실대로 말했더라면 티페레트 공작이 행동을 달리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러나 블랑쉬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본느.”

“네.”

“남자 마녀의 신병을 양도받는 대로 저는 그를 비밀리에 소유할 예정이에요.”

“…….”

코하브 백작은 놀라지 않았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물밑에서 협상을 이어나갈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티페레트 공작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다만 코하브 백작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것이다.

“그가 그렇게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요?”

여타 마녀라면 남자의 몸으로 1세대 만에 대마녀의 경지에 이른 이레귤러에게 관심이 쏠릴 법하다.

전 재산을 투자해서라도, 혹은 공적으로 몰리는 한이 있더라도 출혈을 감수할만한 대상이겠지.

그러나 블랑쉬 에렐림이 누구인가?

게헨나 유일의 24 위계 공작.

천 년의 세월을 넘도록 살아온 옛 마녀.

‘천상의 허공록’이라는 미증유의 자성마법을 보유한 마녀이다.

뿐만 아니라 에렐림 공작은 짊어지고 있는 것이 많다.

신시우를 몰래 빼돌리는 건 그의 가치 이상으로 많은 것을 판돈에 올리는 행위로 보였다.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될 경우 티페레트 공작 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돌변할 것이다.

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예소드 및 제머나이 백작가와도 마찰을 피할 수 없다.

케테르가 내세우던 규제를 완화하고 헥센나흐트와 연대를 취하려는 계획도 틀어질 수 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고작 남자 마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부호가 자연스레 따라붙는 것이다.

에렐림 공작이 코하브 백작을 이해시키는 데는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본느, 그는 케테르의 그릇을 물려받았어요.”

2.

굉장히 드문 장면이었다.

특별히 멋을 내진 않아도 언제나 게헨나의 복식을 고수하던 아멜리아의 현대복 차림이라니.

아멜리아가 몸을 웅크리면 들어가서 하룻밤을 청할 수 있을 커다란 캐리어나 바람막이는 아마도 엘로아를 보고 따라 한듯했다.

현세 토벌전의 경험이 가장 풍부한 건 다름 아닌 엘로아이니 말이다.

티페레트는 구태여 에렐림 백작과 나눈 대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엘로아가 현세를 나서 헥센나흐트에 돌입하는 순간 작위를 잃게 된다는 말이나, 에렐림 공작의 파벌이 이 구출작전에 회의적이라는 말 따위를 말이다.

사랑하는 제자이자 연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작위가 대수이겠는가?

아멜리아 역시 그만한 각오를 다지고 이 자리에 섰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칭찬이나 해 주었다.

“잘 어울리네.”

“감사해요.”

“샤론 양은?”

“따로 말해두진 않았어요.”

“잘했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시우를 구출하기 위해 헥센나흐트에 돌입하는 건 단 둘뿐이라는 합의점에 도달했다.

아직 견습마녀인 쌍둥이를 데려갈 수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샤론과 르뤼에까지 동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섭섭해하겠군.”

“위험한 일이고, 샤론 양도 르뤼에 양도 어린 마녀이니까요.”

“알고 있네.”

엘로아도 아멜리아도 마녀 사회의 정점에 위치한 강자이다.

두 사람의 힘이 더해진다면 뭉친다면 세계 종말 급의 재앙조차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종말을 언도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 작전은 너무 위험했다.

마녀의 전투는 게임이 아니다.

레벨과 장비가 좋으면 무쌍을 찍을 수 있는 판타지 게임이 아니라는 의미.

개인의 마력에는 한계는 존재하며, 정면에서 싸울 경우 두 사람이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대마녀의 숫자는 최대한 많이 잡아야 열 명.

그 중 고위계가 섞여 있다면 발목이 잡힌 채 적에게 둘러싸이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겠지.

따라서 이번 돌입의 핵심은 최대한 교전을 피한 채 일직선으로 돌파.

시우만을 데려오는 구출극에 가까웠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어디, 어떤 상태로 잡혀 있을지 모른다는 것 또한 작전의 성공률을 낮추는 요인이다.

엘로아는 냉정하게 이번 작전의 성공률이 1할을 밑돈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샤론과 르뤼에가 합류한다 한들 여전히 2할이 될까 말까.

그런 사지로 향하면서 견습마녀에서 마녀가 된 지 20년이 채 안되는 두 사람을 대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심문을 통해 헥센나흐트의 지형도는 얼추 확보했네.”

가만히 멈춰서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아멜리아와 엘로아는 출입국관리소로 향하며 대화를 나눴다.

“진입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죠?”

“헥센나흐트의 입국절차는 게헨나보다 훨씬 까다롭네. 시민권을 뺏는다고 해도 헥센나흐트에선 위장 마법을 사용하는 즉시 검문을 받네. 그대라면 몰라도 나라면 즉각 정체가 발각되겠지.

대신 헥센나흐트에 물자를 대는 선박의 위치를 확보했네. 카리브해 연안에 정박해 있더군. 미리 확보해둔 화물의 코드이니 기억해 두게나.”

하얀 쪽지 위에 GPS 좌표와 더불어 RP 1238815, DX 2106134897 따위의 화물 분류번호가 새겨져 있다.

해당 분류 코드가 적힌 화물에 짐을 빼내고 잠입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멜리아는 그 코드를 암기하면서도 물었다.

“입국 심사와 과정이 모두 엄격하다고 들었는데 화물에 숨어드는 정도로 잠입할 수 있을까요? 화물이라고 대충 넘어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아멜리아의 지적에 엘로아는 품에 지니고 있던 헥센나흐트의 시민권을 건넸다.

시민권은 붉은 티켓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 많은 화물을 일일이 검사할 수는 없지. 아마 아티펙트로 해당 과정을 단축화할 걸세. 일반적으로 마력 파장의 변복조를 통해 검색을 시행할 텐데 시민권을 검사하는 것과 같은 장치를 사용한다더군. 가능하겠나?”

아멜리아는 그것만 듣고 엘로아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시민권에 내장된 마력 파장 발신 기능을 바탕으로 복조에 사용될 아티펙트를 리버스 엔지니어링, 이어 아티펙트의 검색을 피할 수 있는 위장 마법을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입자를 활용해 시민권을 살핀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면 충분해요.”

“그럼, 선박이 뜨기 전까지 해당 화물을 찾고 숨어 있을 일만 남았군.”

그렇게 출입국 관리소에 당도한 두 사람.

출입국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한 일이 없다면 항상 출입국 관리소에 상주하는 그녀가 아까 그 소란을 겪고도 자리를 비우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직접 말을 하진 않지만 만약 엘로아가 출국 금지를 무시하고 출국을 강행할 경우 자신의 관리소홀로 책임을 돌리고 모른 척 해주겠다는 것이다.

엘로아가 그녀의 배려에 말없이 감사를 표하고 아멜리아와 결연한 표정으로 포탈을 향하려는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나타났다.

“오오 분홍머리, 향수 때마침 잘 되었도다.”

막 입국 수속을 끝낸 듯한 심해의 마녀 르뤼에 누켈라비와 마주한 것이다.

르뤼에를 따돌리려던 두 사람에겐 곤혹스러운 만남이었다.

엘로아는 거짓말을 못하는 올곧은 성격이었고, 아멜리아는 꽤 요령이 없는 편에 속했으니.

“시련을 끝내고 오는 길인가요?”

빨리 떼어놓고 가야 하는 건 변함이 없기에 적당히 인사만 나누려는 아멜리아.

애초에 시련을 치르기 위해 외부에 나가 있던 거고, 저 초롱초롱 빛나는 군청색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멜리아와 엘로아가 공유하던 긴장감을 단박에 희석하는 ‘칭찬하거라!’라는 눈빛.

“그렇도다!”

르뤼에는 턱을 치켜들었다.

“짐은 온전한 힘을 되찾았도다. 왕국에 묻혀있던 금은보화만 해도 게헨나를 백번을 살 수 있을 정도로 풍족했도다. 느껴지느냐? 짐의 몸에 흐르는 힘이? 재력이? 우아함이?”

“그렇네요. 느껴져요.”

물론 게헨나를 백번 살 수 있다는 건 르뤼에의 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 왕국의 비고에는 넓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금괴와 보화가 르뤼에를 반겨주었고, 그보다 배는 값이 나갈 석유 시추권과 해저 개발권이 법적 효력을 유지한 채 층층이 쌓여 있었다.

거기에 누구보다 신뢰하는 도로시의 입으로 시우가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확답까지 받아냈으니 마냥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자랑은 나중에 듣도록 하지.”

여느 때 같으면 대충 어리광을 받아주는 심정으로 르뤼에의 자랑을 들어주었을 엘로아도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칭찬을 듣지 못한 르뤼에는 엘로아를 불러세웠다.

“멈춰라, 분홍머리 마녀. 짐이 너희에게 전할 중대한 이야기가 있도다.”

“이미 말했네. 나중에 듣겠노라고.”

평소라면 엘로아가 살기를 내비치자마자 찔끔할 르뤼에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되려 가슴을 활짝 펴며 맞도발을 시전한다.

“과거의 짐을 생각하면 오산이도다. 지금의 짐은 너희 둘을 한 손가락으로 상대하고도 남음이라.”

“아멜리아 양. 이만 가지.”

“네. 장해요, 르뤼에 양.”

묵묵히 르뤼에를 지나치는 엘로아와 마지못해 칭찬 한마디를 얹고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아멜리아.

르뤼에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두 사람의 앞으로 달려가 팔을 벌려 막아섰다.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

“장난칠 시간은 없다고 했을 텐데요?”

“그게 아니다!”

아멜리아의 서늘한 어조에도 굴하지 않는 르뤼에가 말했다.

“신시우가 공적의 도시에 잡혀있도다!”

“…….”

“…….”

둘 입장에선 정말 늦은 뒷북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르뤼에는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해저 왕국에서 홀로 시련을 수행한바 시우의 납치 사건에 대해 몰라야 정상이다.

비밀스럽게 취급되는 해당 정보를 게헨나에 들어서자 마자 알아차렸을 리 없다.

놀라는 두 사람에게 르뤼에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헥센나흐트 내부에 짐의 신하가 있도다. 그를 구출하기 위해 함께 대화를 나누고자 하니 짐의 명령을 따르거라.”

아멜리아와 엘로아의 놀란 눈이 마주쳤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기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