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
1.
포탈을 이용해 한걸음에 달려간 아르스 마그나 타운.
진리진명 학술회의 학관, 그 중에서도 에렐림 공작의 처소로 달려가는 엘로아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거친 것은 발걸음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워낙 넓은 부지를 지닌 탓에 인적이 드문 학관.
마주하는 마녀마다 엘로아의 모습을 보며 숨을 집어삼켰으니까.
얼마나 흉흉한 표정으로 달려가고 있을지 엘로아 본인도 스스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쾅쾅쾅!
거친 몸동작으로 계단을 오른 엘로아는 문을 박차고 들어서고 싶은 마음을 참고 문을 두들겼다.
억누르려해도 분노가 들불처럼 번진다.
시우를 향해 달려가는 길.
발목을 잡는 모든 방해물을 베어 넘기고 싶다는 충동이 굶주림 맹수처럼 날뛰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문이 열렸다.
엘로아보다 머리 반개 이상 큰 신장.
고운 흑발과 완전히 대비되는 은빛과 흰빛의 눈동자.
헐렁한 나이트 가운을 입은 블랑쉬 에렐림의 모습은 난데없는 엘로아의 방문에도 침착했다.
그녀가 이곳에 찾아오리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늦은 시각에 미안하네. 하지만 꼭 나눠야 할 말이 있군.”
허공에서 마주치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터질 듯한 격정을 담은 엘로아의 눈동자와 덤덤하기 짝이 없는 블랑쉬의 눈동자.
“들어오세요.”
블랑쉬는 별말 없이 문을 열어 엘로아를 맞이했다.
이윽고 침실 쪽으로 말을 건넨다.
“코하브 백작.”
“네.”
벽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본느 코하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렐림 공작과 코하브 백작이 연인 관계라는 말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 야심한 밤 침실에서 함께 있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홍차를 준비해주세요.”
“필요 없네. 일각을 다투는 사안일세.”
“대화가 길어질 테니까요.”
“길어질 것도 없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방해하는 겐가?”
마력은 감정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엘로아의 주위엔 이미 어지간한 마녀라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할 마력의 잔흔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쪽으로.”
그러나 에렐림 공작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엘로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시간 낭비라면, 내 분노를 면치 못할 걸세.”
엘로아는 우선을 화를 눌러담고 자리에 앉았다.
게헨나의 대현자라고도 불리는 에렐림 공작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인물은 아니었다.
“줄여 말하지. 출국을 허가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
-쾅!
엘로아의 주먹이 빗살같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단단한 원목 테이블이 마치 쿠키처럼 무너져내리고 비산한 나뭇조각이 에렐림 공작의 염동에 의해 흩어지지 않고 부유한다.
“따로 청구하진 않겠습니다.”
“내가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나?”
“그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게 이유를 묻기 위해 온 것이겠지요. 아닌가요?”
에렐림 공작이 가벼운 마력을 토하자 원목 테이블이 부서지기 전 상태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변한 분위기는 원래대로 되돌리지 못했다.
홍차를 내오는 코하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블랑쉬를 노려보는 엘로아.
“티페레트, 세상은 변했습니다. 지금도 변하고 있지요.”
“선문답 할 시간은….”
“당신이 왜 현세로 나가려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블랑쉬가 말을 잇는다.
“남자 마녀 때문이겠지요? 그는 당신의 제자이자 연인이니.”
“그러하네.”
에렐림 공작 뒤에 기립해있던 코하브는 놀랐지만 엘로아는 평정을 유지했다.
새삼스럽지 않다.
에렐림 공작은 진리진명 학술회장이자 누구보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자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은 만큼 그 정도의 정보는 지니고 있으리라 보았다.
“먼저 현 사태에 대해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이기에 저는 더욱 당신을 만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뜸들이지 말고 말하게.”
“헥센나흐트의 성장세는 폭발적입니다. 어느새 전성기 클리포트 급 전력을 갖추었고 게헨나에 굉장한 위협이 되고 있지요.”
“알고 있네.”
하지만 엘로아가 간과하고 있던 부분 또한 있었다.
“티페레트, 헥센나흐트가 이토록 덩치를 불린 것엔 당신의 영향도 적지 않습니다.”
엘로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라피를 잃은 이래 누구보다 공적을 증오하는 엘로아다.
하늘에 맹세코 그들의 도움이 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당신은 강해요. 그리고 공적에게도, 악성향의 추방자에게도 적대적이죠.”
그제야 엘로아는 에렐림이 내세우는 요지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동시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벌인 대대적인 소탕이 그들의 단결을 촉발했다는 겐가?”
“그렇습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이끄니까요. 당신이 거칠게 활약할수록 적은 더욱 빠르고 견고하게 굳을겁니다. 지금 이상으로요.”
확실히 인과만을 따지자면 에렐림 공작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웃음이 나오는군. 거기부터 따지려거든 그대가 케테르의 유고를 공식석상에서 인정한 것부터가 경솔한 실책이라 지적하겠네.”
“시기상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그들도 예언의 해석을 끝냈을 테니까요.”
“허나 지금보다 충분한 대비가 가능했겠지.”
아멜리아의 재판 당시 에렐림 공작이 예언의 해독문을 공표하지 않았더라면 헥센나흐트의 발족은 지금보다 늦춰졌을 것이다.
또한 전세계의 위치포인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습격을 받을 일도,
엘로아가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강경하게 나설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엘로아는 많고 많은 말을 눌러두었다.
지금 이 자리는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그래, 설령 그것이 실수였다 해도 나는 옳은 일을 행했네. 마법을 위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도당을 구축하는 일이 잘못이란 말인가?”
“…….”
“위기에 처한 위치포인트를 내버려두고 간악한 악적들이 현세에서 날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랬다면 헥센나흐트의 단결이 지금보다 못할 것이라고? 농담에도 정도가 있다네 에렐림 공작.
그대 역시 2차 세계 대전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두 눈으로 보았을 걸세. 1차 대전의 승전국들이 전쟁의 발발을 저어해 전쟁을 준비하는 나치에게 유화정책을 펼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답해보게나.”
열변을 토하려던 엘로아는 이 시답잖은 문답에 염증을 느끼며 눈을 감쌌다.
“이따위 무의미한 대화로 시간을 뺏기고 싶지는 않군. 출국을 허가하지 않는다면 실력행사를 해서라도 돌파하겠네.”
“마녀 사회를 위한 당신의 헌신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어요.”
“사과는 됐네. 그대의 추종자들에게 나의 독단적인 행동이라 일러도 좋으니 보내주게.”
“그럴 수 없습니다.”
뒤에서 관망하던 코하브 백작의 어깨가 굳었다.
노골적인 적의를 내포한 마력이 분홍빛 작은 체구에서 회오리치듯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부디 이해해 주세요. 티페레트.”
엘로아는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를 박찼다.
이 자리에 계속 앉아있다간 검을 뽑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헥센나흐트에 가면 전쟁이 일어날 거에요.”
“…….”
에렐림 공작의 확신 어린 어조는 엘로아의 발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분노에 차있다 해도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으니.
“지금 헥센나흐트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어요.
전 클리포트를 주축으로 한 주전파와 새로이 부상한 솔리두스 상단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죠. 현재로선 둘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나 당신이 헥센나흐트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균형이 무너질 거에요.”
“난 제자를 구하려는 것뿐이네.”
“당신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결과는 같을 겁니다. 전자는 공작급의 인물이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니 명분이 생길 테고, 후자는 오랜 세월 공적의 두려움이 되었던 티페레트를 숙청했다는 고양감이 주전파의 기세에 힘을 실어주겠죠.”
상세한 내부 사정까지는 엘로아도 알지 못하는 바였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솔리두스의 상단주 금화의 마녀와 접촉해 상호 불가침 조약을 위해 조율 중이에요.”
“헛소리 말게. 놈들이 진정한 평화를 원하리라 생각하나?
그들은 악일세. 타협할 여지가 없이 배제해야 할 정진정명한 악. 그대의 목적이 그 간악한 놈들과 평화조약을 맺는 거라면 헥센나흐트로 향해야 할 이유가 늘었군.”
공적과 불가침 조약이라니.
원한이 뿌리 깊은 엘로아로선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망발이었다.
“2차 세계 대전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왜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했는지도 아실 것입니다.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에선 130만 명의 군인과 4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20대 남성의 4분의 1이 전쟁으로 사망했지요.
인간은 그토록 죽어도 금새 번식을 끝내지만 마녀는 아닙니다.
헥센나흐트와 전면전을 벌인다 해도 게헨나는 승리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리품이 상처뿐인 전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케테르가 없는 지금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전쟁에서 죽어갔던 수의 두 배는 되는 무고한 마녀가 게헨나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야겠지요.”
“…….”
“무작정 그들의 방종을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같은 마녀나 견습마녀에 대한 습격 행위는 제한할 것입니다.”
“…….”
“77억에 달하는 인간에 비해 마녀는 한 줌이나 다름없습니다. 약간의 조절만 더해지면 인프라가 붕괴하지 않는 선에서 원활한 타협이 가능할 겁니다.
엘로아는 말을 멈추었다.
에렐림의 말에 설득된 것도 그녀의 발언을 지탄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마녀들의 마녀 지상주의가 하루 이틀의 이야기도 아니다.
“케테르가 만들어낸 규율이 지나치게 이상적이었으며 인간 친화적이었을 뿐입니다. 헥센나흐트의 성장세가 그녀의 실패를 입증합니다. 단 한 사람에게 의존하며 이어져 온 규칙에서 ‘한 사람이’ 빠지면 어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지요.”
실제로 많은 정통파 마녀가 에렐림 공작과 같이 생각하는 것도 알고 있다.
엘로아도 라피를 잃기 전까진 그랬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먼 섬나라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듯 마녀 대다수는 현세의 혼란에 관심이 없다.
설령 현세가 괴멸에 가까운 처지에 놓여도 마녀들은 각자도생이 가능한 힘이 있으니까.
에렐림 공작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마녀끼리 죽고 죽일 필요가 있는가? 라고.
“그만, 알겠네.”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엘로아는 어쩌면 과거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에렐림 공작을 보았다.
그리고 결단하듯 입을 연다.
“회의를 소집해 날 추방하게. 이번 일은 어디까지 나의 독단이었다고 공표하게.”
완전한 해결책은 아닐지라도 최대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해결책.
그것은 엘로아가 공작 작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을 마녀 사회의 안정을 위해 투신해왔네. 이번만큼은 나의 욕심을 위해 움직이겠네.”
“…….”
그 말을 끝으로 저택을 나섰다.
에렐림 역시 엘로아를 막아서지 않았다.
곧장 현세에 나가 돌입에 준비하려는 엘로아 앞을 누군가 나타났다.
엘로아가 그렇듯 험지를 누비기 좋은 복장.
두꺼운 청바지와 바람막이를 입은 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있는 금발의 마녀.
“저도 돕겠어요.”
현시점에서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인 아멜리아 메리골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