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7
1.
평온했던 봄날의 햇볕이 슬슬 피부를 그을리며 신록의 계절을 맞이하며 새단장을 시작하는 게헨나.
아직 너무 덥지 않은 온도감.
맑고 하늘이 투명하게 비치는 청명한 하늘.
잎새를 스쳐 뺨을 간질이는 바람은 골방에 틀어박힌 심술궂은 마녀도 관대한 미소를 머금게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내에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과 정적이 저기압을 형성한 까닭일까?
제머나이 저택의 하늘 위에는 우중충한 먹구름이 떠 있었다.
-쏴아아아
흐느끼듯 비를 쏟아내는 하늘을 알비레오는 수심에 잠긴 눈빛으로 올려 보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건 와인, 깃펜, 서류더미.
평소와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깔끔한 일 처리를 선호하는 알비레오의 책상이라기엔 난잡스럽기 그지없다.
그녀의 속마음을 대신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하아….”
이따금 땅을 푹푹 꺼지게 하는 쌍둥이의 한숨도.
술독에 잠겨 방을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 데네브도.
알비레오가 느낄 자책감을 고려해 배려하는 모습이 역력한 샤론과 아멜리아의 행동거지까지.
그녀의 한숨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국 원인은 하나로 귀결된다.
사위가 현세에 나갔다가 실종되었다.
또한 그가 현세에 나간 이유는 알비레오가 반쯤 강제로 현세로 떠밀었기 때문이다.
르뤼에는 기부금을 자력 납부할 여력이 있었다.
알비레오는 그를 테스트한다는 명목하에 내보낸 것이며, 이 과정에서 악감정이 상당 부분 개입된 것도 사실이다.
원래부터 아니꼬웠다.
오딜과 오데트를 하나도 아닌 둘을 홀라당 채어간 놈팡이인데 주변에는 여자 마를 날이 없다.
온갖 걱정을 다 끼쳤으면서 새로운 애인을 끼고 나타난 것도 모자라, 작은 장모까지 홀려 ‘사랑을 모르는 언니가 불쌍해!’ 따위의 말이나 듣게 하였다.
“돌아 버리겠네 진짜.”
알비레오는 제 자신이 합리적인 인물이라고 자부하며 사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못난 사위 놈이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는 게 그 증거일 것이다.
그런 합리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때.
신시우가 잡혀간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문제다.
만약 이 사건이 반드시 승소해야 하는 사건이라면 법정이 서게 된다 해도 무과실을 입증할 자신이 있었다.
설마 옆에 티페레트 공작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생길지 누가 알았겠는가?
비탄에 빠진 공작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없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현장에서 적절한 대처에 실패해 그의 실종을 방지하지 못한 티페레트 공작에게 가장 큰 과실이 있을 터.
그러나 그렇다 해서 마음속 부채의식까지는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다.
인간관계라는 게 자로 댄 듯 깔끔하게 잘려나갔으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간단했겠지.
알비레오는 시우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데네브의 반응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 때문이야.’
표독스러운 원망의 눈빛.
‘언니가 시우 군을 밖으로 내몰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 없었어.’
담대한 성격인데다가 어지간한 위협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알비레오지만, 데네브의 원망을 받는 순간 땅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크고 작은 일로 데네브와 다투었으나 진심 어린 분노와 원망을 받아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언니…. 미안해…. 내가 정신이 나갔나 봐….’
‘아니야, 너도 놀랐을 테니까. 내 잘못도 있고.’
이윽고 정신을 차린 데네브가 눈물을 쏟으며 용서를 구했다.
그렇다 하여 알비레오의 충격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백작가의 당주이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대마녀이라지만 혈육의 원망은 이토록 뼈 아팠다.
그 이후로 데네브는 한 번도 제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위에게 부덕한 연정을 품은 것도 모자라 사랑하는 언니에게 폭언까지 퍼부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 상했을까.
자괴감과 상실의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데네브가 떠올라서라도 차마 결백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력을 기울여 수색 작업을 벌였다.
불과 얼마 전 해본 적 있기에 요령이 붙었다 해야 할까?
사령탑이 된 알비레오의 진두지휘 하에 그의 행방과 생존 여부 자체는 불과 며칠 만에 파악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에 있다.
그를 납치해 간 이는 ‘검의 마녀’.
납치당한 장소는 공적의 도시 ‘헥센나흐트’.
헥센나흐트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던 바이다.
처음 소문이 들려왔을 때까지만 해도 케테르의 부재 탓에 발생한 작은 소요이리라 생각했다.
알비레오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러나 추방자와 공적을 흡수해 몇 달 만에 폭발적으로 몸집을 불린 그 도시는 전성기 클리포트와 비슷한 수준의 위험성을 갖추게 되었다.
유명무실해졌던 클리포트의 공적들이 이 도시를 계기로 다시 뭉쳤고 전체의 반수 가량의 추방자도 이에 합류했다.
그 결과 헥센나흐트에 머무는 것으로 추정되는 대마녀 수만 해도 세자릿수에 달한다.
절대적인 머릿수로 논하자면 게헨나보다 부족하다 한들 추방자와 공적 대부분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거르고 걸러진 무투파임을 짐작해보면 정면 돌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 쪽에 23위계의 공적이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무작정 위계빨로 찍어누를 수 있다면 티페레트 공작이 남미 공적 토벌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일도 없었겠지.
설령 기적 끝에 종심돌파에 성공한다 해도 인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시점에서 실패한 계획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지금은 헥센나흐트에 비밀리에 접선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이마저도 지지부진하다.
제아무리 제머나이 가문이라 해도 공적과의 접점에는 한계가 있으니, 이렇듯 ‘손을 쓸 도리가 없는’ 지경에 좌초하고 만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 창밖으로 여전히 빗줄기가 흘렀다.
2.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단 둘만의 데이트라는 기쁨에 젖어 만일에 대비하지 못했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도 모자랄 판국에 캠핑카에서 정을 통했다.
수호자의 계약 따위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보다 면밀히 주위를 경계했더라면.
아니, 아예 그가 현세로 나오겠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뜯어말렸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누구도 탓할 필요 없다.
모든 것이 엘로아 티페레트, 어리석고 어리석은 스승의 책임이다.
결코 반복해선 안 될 과오를 되풀이하고 다시는 잃지 않기로 한 제자를 눈앞에서 맥없이 빼앗겼다.
만약 엘로아가 시우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안일함에서 비롯한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건 벌이다.
한평생을 용서받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 죄인이 사랑을 꿈꿨기에.
평생 속죄와 참회를 위해 살아가겠다 다짐한 주제에 행복을 알았기에.
녹 쓸고, 나약해지고, 무뎌졌기에 주어진 벌.
시우의 실종 이후 엘로아는 인연을 정리했다.
아멜리아에게, 샤론에게, 쌍둥이에게 사과의 편지를 남겨 놓고 홀로 현세로 떠났다.
이런 위험한 일에 다른 사람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책임을 지고 싶었다.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돌격할 수는 없다.
값싼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다.
단 한 번의 실패가 그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기에 완벽을 기하는 것이다.
엘로아는 헥센나흐트에 합류하지 않은 추방자 또는 내부 사정을 아는 마녀를 은밀히 습격했다.
그리고 공적들은 또다시 제자를 잃을 위기 앞에 분노한 티페레트가 어디까지 미쳐 날뛸 수 있는지를 마주해야 했다.
불과 3주 남짓한 시간에 3명의 공적을 사로잡은 티페레트가 게헨나로 돌아왔다.
소모한 마력을 정비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함이다.
공적을 심문하는 것은 알비레오 백작에게 맡겨둔 채 다시 현세로 나가려던 엘로아는 뜻밖의 상황과 마주했다.
“죄송합니다. 티, 티페레트 공작께선 출국 권한이 임시 정지되어 있습니다.”
“뭐라 했나?”
평소에도 알고 지내던 출입국장의 면목 없다는 듯한 반응.
게헨나의 ‘문’은 완벽한 마법이었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이런저런 잔고장이 많았다.
백도어가 열리는 경우도 심심찮았고 기능이 마비되어 점검을 이유로 포탈을 이용할 수 없는 예도 있었다.
하지만 출국 권한의 임시 정지라?
한시가 급하다.
이따위로 낭비할 시간은 없다.
엘로아는 큰 소리를 내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차가운 분노를 내비쳤다.
“다시 말해보게.”
그러나 의도하지 않아도 그녀의 눈빛에는 백색의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살기는 위태롭게 부푼 인내의 반석 위에 놓여있어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모, 몹시 송구하나…. 티페레트 공작께서는 현세에 나가실 수 없습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허리춤에서 뽑힌 검이 목을 베고 지나가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출입국장은 눈을 질끈 감고 제 사명을 다했다.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그 답변에 티페레트는 자신이 엄한 이를 핍박하고 있음을 깨닫고 살기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조바심과 초조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째서인가?”
“세피로트의 총의입니다.”
그 말을 듣자 분노가 솟구친다.
말로는 세피로트의 총의라고 하지만 케테르가 은둔하게 된 이후의 실권을 누가 쥐게 되었는지는 엘로아도 알고 있다.
일찍이 아멜리아의 재판에서 증명되지 않았던가?
“에렐림 공작의 지시인가?”
“…….”
무언으로 긍정하는 출입국장 뒤로 한 엘로아는 곧장 진리진명 학술회의 에렐림 공작에게 향했다.
그녀의 발걸음과 호흡은 몹시도 거칠었다.
3.
한편 그 시각 아쿨라는 시련을 완수한 뒤 곧장 시우의 탈환을 추진하려 하는 르뤼에와 그것을 뜯어말리는 도로시의 충언으로 시끌벅적했다.
“도로시! 짐과 아쿨라의 전투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어서 항구의 위치를 짐에게 말하여라!”
“여왕님, 그게 아니라요.”
“뭘 그리 어렵게 해결하려고 드느냐! 짐의 계획은 이러하다.”
지휘봉을 들어 종이를 가리키는 르뤼에.
“헥센나흐트는 수직 구조의 도시이고 가장 아래층에 바다가 있다고 하였지. 맞느냐?”
“네, 일단 맞아요.”
“그거 봐라! 세상의 모든 바다는 곧 짐의 영토이니 지리적 이점 또한 짐에게 있도다. 우선 잠수함을 헥센나흐트의 선착장에 끌고 간 뒤 핵 샤워를 맛보여 주겠노라. 그 이후에 혼란을 틈타 신시우를 구출해온다면 되지 않느냐?”
“네, 그러면 아니 되어요.”
“어째서냐!”
시련을 완수한 흥분, 시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흥분이 겹치자 좀처럼 진정하지 않는 르뤼에를 도로시는 한참이나 다독이며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