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
1.
박수 소리가 멎었다.
열린 문틈의 그림자가 암막처럼 늘어선 가운데.
가장 먼저 보이는 건 고양잇과 포식자처럼 밝게 빛나는 금안.
찰랑이는 금발을 어깨 어림에서 흩날리며 등장한 인물의 정체는 금화의 마녀, 리디아 마그누스.
조금 텁텁한 기색이 있던 박수소리는 그녀가 팔꿈치까지 오는 하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
목소리로 어리짐작 하긴 했으나 막상 실물을 보니 막막해진다.
창을 쥔 손에도 힘이 느슨하게 빠졌다.
하다못해 어중간한 마녀였더라면 죽을 힘을 써서라도 변수를 만들어 보았겠는데, 눈앞의 상대는 시우의 눈으로도 위계를 짐작할 수 없다.
즉, 최소 대마녀 이상이라는 말인데….
도로시에 의하면 금화의 마녀는 ‘솔리두스 상단’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이끄는 수장.
야생과도 같은 헥센나흐트에서 그만한 단체를 이끈다면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는 마녀임을 뜻한다.
향후의 일이 순탄하게 풀리리란 기대는 않았다만 불과 3분 만에 최악의 상대와 마주할 줄이야.
시우는 새삼 ‘매칭 억까 진짜 시발’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컨디션이야 어쨌건 마음만큼은 이미 전장에 선 시우와는 달리.
리디아는 태연하게 시우를 지나쳐 곤죽이 되어있는 로지의 사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사형으로 퍼진 핏물이 구두 끝을 적실만큼 가까이 다가가 가만히 바라보는 리디아의 후방은 텅 비어있다.
이제 남은 도주 가능성은 기적에 기적을 빌며 저 무방비한 등 뒤에 기습하는 것뿐.
그럼에도 시우는 선뜻 창을 내지르지 못했다.
린네와 함께 알막 클럽 경매에 참여해 앨리스를 낙찰받은 이후.
응접실에서 린네를 기다리던 시우는 리디아와 만났다.
그리고 그녀가 남겼던 의미심장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시간 나면 찾아와.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어쩌면 우리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고. 물론, 린네에겐 비밀로.’
그말과 함께 건네줬던 명함도 일단은 폐기하지 않고 간직 중이다.
상대가 공적이고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 있는지 모를 의뭉스러운 상대라도 최악의 상황에서는 그 도움이라도 간절해질 수 있는 노릇이니.
간단히 상황을 저울질한 시우는 창을 흩어 보냈다.
기습으로 그녀의 추적을 저지할만한 부상을 입히고 전후 사정을 모조리 파악한 린네에게 보호받을 수 있을 확률.
일단 대화를 통해 안전이 보장되는 쪽으로 대화가 진행될 확률.
둘다 무진장 희박하지만, 후자 쪽은 그나마 가능성이라도 보인 까닭이다.
잊어서는 곤란하다.
비록 린네와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을 그녀의 부끄러운 모습을 관측했다 한들 시우와 린네의 관계는 뒤바뀌지 않는다.
시우는 임시제자 겸 강화 추진제.
린네는 임시 스승 겸 시우를 감금하고 감시하는 간수이다.
고작 그뿐인 관계.
애초에 그녀에게 기댈 생각으로 이만한 일을 벌인 것도 아니다.
헥센나흐트에서 벌인 폭력 행위, 그것도 대마녀인 로지를 죽인 것이 공식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린네가 이를 덮어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다름 아닌 로지와 린네의 관계다.
린네와 로지는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린네가 미궁에서 시우의 납치를 시도했던 당시 그 옆에 로지가 있었으니까.
만일 린네가 이 악행을 알고 있더라면 그녀는 알면서도 모든 걸 내버려두고, 그것도 모자라 가까운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이 된다.
다른 모든 것은 넘어가더라도 그것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낙인에 훼손은 없네. 내가 거둬들여도 괜찮지? 아, 참고로 싸움이 인상 깊었다는 건 겉치레가 아니야. 진심으로 탄복했어.”
쪼그려 앉아 로지의 시체를 툭툭 건드리던 리디아가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샌가 한 개의 금화가 들려 있었다.
게헨나에서 거래에 사용하는 것처럼 세련된 위조방지 문양과 화려함을 겸비한 물건이 아니다.
고고학자가 발굴해낸, 적어도 기원전에 사용하던 것처럼 투박하고 금이라기보다는 놋쇠를 연상케 하는 빛깔의 금화이다.
그러나 마력이 전부 소진되었다 한들 시우의 눈은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다.
리디아의 손마디에서 마술처럼 구르는 금화에 소름이 끼칠 만큼 거대한 힘이 담겨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팅
청명한 소리와 함께 엄지로 금화를 튕겨내는 리디아.
그와 동시에 금빛의 마력이 공간을 덮는다.
눈부신 광채에 이끌린 로지의 시체가 산산이 부서진다.
그로테스크한 의미의 부서짐이 아닌, 빛과 광채에 휩싸여 원소 단위로 분해되는 느낌.
돌개바람에 휘말린 꽃가루처럼 회오리를 그리던 금색의 입자는 또 하나의 금화를 만들어내고서야 잠잠해졌다.
이제 리디아의 손에는 허름한 금화 대신 조금 더 커다랗고 반짝이는 무인금화(無印金貨)가 들려있었다.
“음, 예쁘게 잘됐다. 대만족.”
특수 청소부처럼 범죄현장을 깔끔히 정돈한 리디아는 아직 반사광이 남아있는 눈동자로 시우를 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딱딱한 얼굴 할 것 없어. 우선 말하자면 난 널 책망하거나 곤경에 빠뜨릴 생각이 없단다. 즉, 적이 아니라는 의미지.”
“왜죠?”
시우는 방금 그 금화에서 스승님, 아멜리아, 르뤼에에게서 봤던 것과 유사한 깊이의 힘을 보았다.
여러 공적과 추방자를 규합한 상단을 대표하는 자에 걸맞게 23 위계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대화로 풀어나갈 기미가 보인다는 건 다행으로 여겨야 할 일이다.
설령 만전의 상태였더라도 승산을 1%도 보장할 수 없는 상대이니.
“침묵의 마녀는 나랑은 입장이 잘 맞지 않아서. 워낙에 발이 넓은지라 어쩔 수 없이 상대해줘야 하긴 했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퇴장해준다면 고맙지. 낙인은 덤이고.”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나요?”
“그래, 맞아. 아무런 대책 없이 이런 짓을 벌인 네겐 행운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리디아는 품 안에서 긴 조각칼을 꺼내 들었다.
손을 많이 탄 듯 반질반질한 나무 손잡이를 섬세하게 움켜쥔 리디아는 아무런 문양 없이 만들어진 무인금화에 손수 무언가를 새겨넣는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다가 이따금 후후 입김을 불며 금가루를 날려보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긴장상태를 유지한 것은 시우 혼자인 모양이다.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짧은 사이.
기어이 금화의 양면과 테두리의 톱니문양까지 새겨넣은 리디아는 천장의 조명에 금화를 비춰보다 입을 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즉시 가공해두지 않으면 품질이 떨어질 수가 있어서.”
“…끝났다면 제가 어떻게 되는 건지 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날 따라와야지. 달리 선택지가 있니? 린네에겐 이 사건을 덮을 만한 힘이 없어. 하지만 내게는 있단다. 이번 일을 빌미로 네가 다른 파벌의 손에 넘어가면 그건 그것대로 골치가 아프니까.”
리디아의 대답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다른 파벌? 골치가 아파?
대화에서 튀어나오는 단서의 편린을 이어 큰 그림을 그려보려던 찰나.
“아차차.”
꽤 구닥다리인 감탄사를 내뱉으며 당혹한 안색을 내보이는 리디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네.”
“그렇죠, 금화도 깎으시고.”
“무서운 분이 여기로 오고 있어서 일단 빨리 자리를 벗어나야 해.”
“무서운 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린네이다.
하지만 분명 저번 뜨거운 밤 이후 꽤나 서먹해졌던 데다가 예빈으로부터 전언까지 받았을 그녀가 왜 여기까지?
시우가 의아함에 눈썹을 모은 사이 리디아는 마력을 피어 올렸다.
“설득과 설명은 다음에 할게. 너무 불쾌히 여기진 말아줘?”
리디아의 윙크와 함께 강력한 수면마법이 시우를 덮쳐들었다.
2.
기나긴 기다림.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제자이자 예비 낭군인 신시우가 돌아올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
사실 그냥 기다리면 되는 노릇이다.
일직이 린네가 이해한 바와 같이 현모양처란 지아비의 부덕을 지탄하지 않고 감싸주어야 한다.
투기(妬忌)는 칠출(七出)이라 하여 아내를 내쫓을 일곱 가지 이유 중 하나인 만큼, 설령 그가 세 여자와 난교를 벌이고 있다 한들 덮어놓으면 없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꾸만 번지는 초조함과 불안함은 자꾸만 린네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였다.
손수 만들어낸 장어덮밥 도시락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린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도 이미 장착하고 있었다.
헌신이 한가지 모양새만을 취하는 건 아니다.
밖으로 떠도는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쫓아가 닦달하는 건 경망스러운 짓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장할 남편을 위해 손수 도시락을 만들어 조심스레 권하는 아내라면?
그 갸륵함에 어느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쏘냐?
가유현처 장부부조횡사(家有賢妻 丈夫不遭橫事)라 하였다.
당장은 그의 방탕한 행실이 문제이긴 해도 어진 아내가 있다면 남편 역시 뜻을 헤아려 도리를 다할 것이라는 의미.
마침 찬합에 담겨 있는 음식은 번거로운 별도의 포장이 필요 없다.
도시락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음식을 챙기는 건 과하다.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도시락 중 본인이 만든 장어덮밥과 키모스이만을 챙겨 든 린네는 향월루를 나서 로지의 저택으로 발을 옮겼다.
여느 때처럼 훤히 열려있는 넓은 저택.
그러나 응접실에 누군가 머물었던 흔적은 있어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수대가 놓인 정원, 손님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부터 다소 개인적인 공간까지 도시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누비었음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 넓은 저택에 침실이 하나일 리 없긴 하다만 탐색 중 발견한 침실도 덩그러니 비어있었다.
이윽고 린네는 기감을 펼쳐 시우와 로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촉각을 한껏 곤두세웠음에도 깨질 기미가 없는 고요한 적막은 현재 이 장소가 무인지대임을 암시했다.
린네의 직감은 탁월했다.
단순히 직감을 넘어 전장을 누비며 얻어온 초월적인 제6감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만큼 말이다.
그런 린네의 직감이 붉은 경종을 울린다.
어딘가 꺼림칙함이 가라앉질 않았다.
“…….”
수색 중 린네의 기감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온갖 결계로 돌돌 말린 돔 형태의 구조물이 저택 최상층부에 자리 잡고 있는 공방.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닌 이상 서로의 공방에 접근하는 건 실례이기에 수색 과정에서 지나쳐왔던 곳이다.
-끼이익!
계단을 오른 린네는 망설임 없이 공방의 문을 열었다.
이윽고 눈살을 찌푸리는 린네.
정신사납고 유치한 디자인의 놀이방이 린네를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히 숨을 곳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 장소에마저 로지와 시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이나 다른 객실과 이어진 흔적도 없으니 이 방은 더 수색할 가치가 없다.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리려는 그때.
린네는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이건.”
신선한 피 냄새는 누군가 마법으로 덮어씌운 흔적이 있다.
그러나 청결마법이 그렇듯 이미 대기 중에 퍼진 모든 냄새 입자를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그 수준까지 빈틈없이 준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냥개가 아니고서야 눈치챌 수 없는 미묘한 냄새까지 지워댈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린네는 미각을 느낄 수 없는 대신 사냥개 이상의 후각을 자랑하는 마녀였다.
린네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눈꺼풀이 열리며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공방의 풍경을 드리웠을 때.
린네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신시우.”
이 냄새의 주인이자 린네의 예비제자.
그리고 곧 예비 신랑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