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3
1.
아직 결착이 나지 않은 시점.
그러나 로지는 승리의 여신이 너훌거리는 옷자락을 목도했다.
대규모 형태로 구현된 위치보드 내에서 로지의 광적인 계산능력은 우수함을 증명했다.
패스와 패스를 연결해 마력의 운행을 돕는 중계기를 7할 가까이 선점한 것이다.
놀이의 규칙 덕분에 마력을 발산할 경로가 보드 상의 패스로 한정되었음을 생각하면,
이는 곧 로지의 가용 마력이 시우의 2배를 넘어섰음을 시사했다.
거기에 수십 수를 내다보는 로지의 수 싸움 능력이 더해진다면 반전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터.
로지는 단숨에 기세를 더해 저주의 마법을 구사했다.
비좁은 공간 속.
대도시 하나를 하룻밤 사이 괴멸시킬 수 있는 저주의 향연이 펼쳐진다.
중계기는 로지의 마력을 아낌없이 빨아들이고 증폭하며 점점 고위계의 마법을 이끌어갔다.
이에 대한 시우의 응대는 거북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공격에 대항하는 일뿐이었으니 일방적인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가드를 올리고 턱을 내린 채 코너에 파묻혀 있어봤자다.
상대는 이미 강타에 얻어맞은 그로기 상태의 복서이다.
무자비한 난타 앞에는 언제가 침몰하기 마련인 것이다.
남은 건 지루한 반복작업이었다.
최선의 수라는 건 서로의 여견이 비슷할 땐 무지막지한 사고력을 잡아먹지만, 이만한 격차가 벌어진다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현상유지를 이어가며 아주 조금씩의 이득만 보면 되는 단순한 과정이니.
커버링에만 신경 쓴 상대를 패고, 패고 또 팬다.
이 시점에 이르러 신시우는 중계기를 탈환하기 위한 노력조차 포기한 채 방어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
지금쯤 신나게 나불거렸어야 할 로지의 입술이 굳게 닫혀있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어쩐지 모를 위화감을 감지한 까닭이다.
위치보드 상에서 로지와 시우의 유불리는 7 대 3이다.
지금 전투는 놀이로 규정되어 펼쳐지고 있으니 당연 싸움의 흐름도 완전히 넘어와야 했다.
이 이후의 펼쳐질 양상은 팔씨름과 유사하다.
한번 팔이 기울어진 쪽이 역전하기 위해서는 상대 팔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하듯 어지간한 힘으로는 버티기조차 힘든 국면이 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신시우는 손등이 지면에 닿을락 말락 한 상태임에도 장시간을 버텨내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최후의 저항 혹은 발악 따위로 치부했던 것.
“뭐야?”
그러나 그 시간이 3분을 넘고, 5분을 지나, 10분에 도달했을 때.
로지는 전황을 다시 한 번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뭐랄까.
쉽지 않은 줄다리기 끝에 간신히 상대를 자빠뜨리고 그물을 거둬들이는 어부처럼 승리를 양망할 일만이 남았다 생각했는데 정작 맞은편 줄이 단단한 기둥에 묶여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끌어도 당겨지는 느낌이 오지 않는다.
로지는 여전히 소나기 같은 공격을 퍼붓는 한편 시우를 보았다.
금빛이 찬연하게 빛나는 눈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한 치의 위축도 없이 쏟아지는 저주를 받아내는 그를.
뭔가 다르다.
이전에도 수상할 정도로 다양한 계통의 마법을 사용하던 신시우이다.
그러나 로지가 보기에 그것은 다양한 도구를 손에 집히는 대로 사용하던 원시적인 용법에 지나지 않았다.
도구의 질이 빼어나기에 당장은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효율적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던 사용방법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신시우는 더 이상 ‘독니’를 막기 위해 역장을 사용하지 않았다.
벌레잡이 식물처럼 낭창이는 리본을 이용해 물리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또한 ‘저주의 운무(雲霧)’를 상대로는 바람의 원소를 활용해 벽을 세운다.
사용자의 신체 능력을 극도로 저하하는 ‘원죄의 사슬’은 파동을 활용해 분쇄한다.
적재적소에.
완벽한 타이밍에.
필요한 마법만을 정확히 구사한다.
이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로지가 한눈에 인지하였듯, 시우는 제 마법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다소 따로 노는 중구난방의 활용법.
이는 시우가 얻은 자성마법이 각기 다른 마녀로부터 추출되었다는 태생적 문제를 겸하고 있으므로 어쩌면 시간이 지나도 완벽히 해결하지 못할 과제일 수도 있다.
원소 마법으로 갑주를 강화하고, 리본을 역장 마법식을 새기는 파피루스로 활용한들 샤론이, 에아가, 예소드 백작이 사용하던 ‘원류(源流)’에 비하면 불완전한 열화판에 불과하니.
그러나 시우는 또한 알고 있었다.
무의식 속 흑기사가 레플리카에 불과한 도구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를.
물론 흑기사를 완전히 모방하는 건 불가능하다.
흑기사의 능력은 오랫토록 지속될 경우 자기 자신마저 파멸시킬 편중된 재능.
어떤 의미에서는 ‘장애’라고 불러도 좋은 범주에 속한 연산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주목한 건 흑기사의 연산 능력이 아니었다.
같은 도구를 사용해도 어디에 사용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처럼 흑기사는 시우보다 훨씬 적재 적절한 곳에 마법을 사용했다.
시우는 그걸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최대 효율이 나오는 곳에 배치된 최적의 무기와 방패를.
비로소 다채로운 마법의 이점이 빛을 발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하나의 이점을 지니는 다양한 손패.
이를 통해 만들어내는 족보는 효율적인 교환비를 유도했다.
마법과 마법을 연결해 새로운 마법을 창안하는 건 지금 이 시점에서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의 결과 현시점 시우보다 두 배 가까운 마력을 구사하는 로지를 상대로 최후의 방어선 구축에 성공한 것이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
누가 보아도 일방적인 수세에 몰린 시우의 표정은 평온하고 냉철한 반면.
“익…!”
조금만 더 앞서면 승부를 거머쥘 로지는 양 어금니를 악 문 채 눈에 핏발을 보이고 있다.
영문모를 초조함이 그녀를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위치보드를 하면서 이런 일은 없었다.
분명 완전히 이겼고 압도했다.
낮은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따듯 손을 조금만 뻗으면 취할 수 있는 달콤한 승리가 목전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력을 투자해 공격을 감행해도 도무지 게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더럽게 끈질기네!”
하지만 이제 곧이다.
놈의 마력이 점차 바닥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눈치채지 않을 수 있다.
다양한 마법의 이점을 살려 최적의 교환비를 만들어낸 분투는 가히 칭찬해 줄 만한 것이지만, 애초에 마력 효율이 2배 차이 나는 상태를 무한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이제 뒤져!”
로지는 승부수를 던졌다.
지금껏 부서져 흩어진 마법의 잔재를 이용해 구축하던 대규모 술식.
필멸자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저주, 죽음.
순수한 죽음 자체를 선사하는 사신의 낫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쿠아아아아!!!
녹빛이 짙어지다 못해 새까만 날 끝에선 망자의 절규와 같이 끔찍한 소음이 쉼 없이 울려 퍼졌다.
승부수라고는 하나,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담겨있는 수.
시우가 방어 마법을 구사한 틈을 타 엇박자로 들어오는 타이밍.
빈틈을 노리는 위치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럼에도 가시지 않는 불안함에 눈 한 번 깜빡 않고 시우를 바라보던 로지는 보았다.
“피어라.”
놈의 머리 위로 검은 고리가 떠오른다.
도로시가 사용하는 ‘천사의 고리’처럼 일순간 외부 코어 역할을 하며 출력을 수배로 끌어 올리는 마법.
-위이이이잉!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며 위태롭게 회전하는 고리.
-위이이이잉!
밑빠진 물독처럼 마력을 잡아먹던 고리의 회전력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고리의 표면 위로 무엇인가 떠오른다.
그건 여태 그가 보여주지 않았던 황금빛의 프렉탈 문양.
저토록 빠르게 회전하는 물체임에도 그 문양이 생생히 보인다.
-파츠츠츠츠!!!
그와 동시에 검은 고리의 탈피가 시작됐다.
바스러 사라지는 검은 표면 뒤에 보이는 건 그 어떤 금화보다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빛의 고리.
시우가 연결한 건 두 가지였다.
모든 마법 작용을 일순간 증폭하는 도로시의 천사의 고리.
시우 본연의 자성마법인 거듭 증폭.
타인의 마법 둘을 연결하는 것이 어렵다면.
직접 창안해낸 마법과 연결하면 어떨까? 라는 발상에서의 시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쿠우우우우우우!!!
거듭 증폭과 결합한 천사의 고리는 화수분(貨水盆)처럼 시우가 다룰 수 있는 총량을 아득히 웃도는 마력을 뿜어냈다.
장시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부담이 전신에 가중되는 와중 시우는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로지의 눈에 거대한 폭풍의 핵이 된 시우의 모습은 웅크린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였다.
-쿵!
고작 일보.
땅을 내딛는 거인의 발 울림은 마력의 폭풍을 일으켜 공간이 짓누른다.
사마(邪魔)를 불태우는 금빛 마력의 폭주가 놀이방이 강제한 ‘규칙’을 순수한 힘으로 찢어발긴다.
“반칙이잖아!”
게임 판을 뒤집어엎는 시우의 행보에 거품을 물고 따지는 로지.
시우는 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보이는 것처럼 평온한 것은 아니다.
새로이 생성된 마력은 그 자체로 자성마법을 파훼할 만큼이나 폭발적이다.
실제로 시우는 손가락을 하나 까딱하는 것만으로 위태롭게 진동하는 영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폭풍에도 로지가 형성한 낫은 기세를 죽이지 않고 시우의 목덜미로 날아든다.
본래라면 마력을 응축해 마포를 쏘는, 실로 단순하지만 무식한 공격으로 딜찍누를 시전하려던 시우이지만….
한번 더 도전해본다.
각기 다르게 놀던 마법에 마법을 엮는 작업을.
폭주에 가깝게 흘러넘치는 마력 속에 시우가 선택한 것은 르뤼에의 자성마법 중 하나 ‘파동’.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가장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작업인 까닭이다.
르뤼에가 부리던 마해의 파도를 떠올린다.
아멜리아보다도 타고난 마력량을 지닌 르뤼에가 모든 저항을 집어삼키는 해일을 일으키던 장면을.
코스트가 너무 달려 따라할 시도조차 못 했던 마법이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난잡하게 휘말리는 마력의 공명 점을 찾는다.
작은 파동을 일으켜, 더욱 큰 파동을 만들고.
겹겹이 쌓인 로그 웨이브는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된다.
일련의 과정은 눈 깜짝할 사이, 빛살 같이 날아들던 검은 낫이 시우에게 당도하기까지의 찰나 만에 일어난 것.
-쿠구구구구궁!
황금의 충격파가 실내를 후려쳤다.
첫 번째 충격에 저주의 낫을 부러져나갔고.
두 번째 충격에 구현된 위치보드를 집어삼켰으며.
세 번째 충격은 로지를 깊게 침몰시켰다.
판정의 여지 없이 시우의 완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