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99화 (699/917)

#699

1.

테이블 위에 뚜껑을 닫은 찬합을 주르륵 늘어놓고 시우를 기다린 지 어언 3시간이 지났다.

처음 요리를 들고 향월루에 향했을 때 느꼈던 기분 나쁠 정도의 동요가 잦아들자.

보다 냉철하게 현재 상황을 관망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혼인식에 관한 문제이다.

거창하게 치를 생각도 손님을 초대할 생각도 없었다.

부부간 여고금슬(如鼓琴瑟)을 기약하려면 향월루의 마당에서 예법에 맞춘 혼례를 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그 전에 신시우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겠지.

상하관계가 엄격한 사제지간이라면 몰라도 혼인을 억지로 맺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처럼 요리를 준비한 것도 그 일환이고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찻잎을 곱씹듯 천천히 정리한 린네는 뒤늦게 한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예빈에 말에 따르면 신시우는 로지 알루의 저택으로 갔다.

이 말을 듣고 막연히 기다려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다만 그가 무엇을 위해 저택을 방문했는지는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앞으로 헥센나흐트에서 살아가게 된 만큼 인맥을 넓혀두고 싶다는 둥 변명을 덧붙였던 시우.

그러나 린네는 그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침묵의 마녀가 마냐와 말리샤를 소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처럼이니 두 사람도 한번 맛보고 싶습니다.’

왜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을까.

황당한 탄식이 절로 나오는 중요한 사실이었다.

맛보고 싶다.

그 천박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린네는 이제 잘 알고 있다.

신시우는 다름이 아니라 마냐와 말리샤와 몸을 섞기 위해 로지의 저택으로 향한 것이다.

“…….”

살포시 찌푸려지는 린네의 미간.

탐욕스러운 로지가 무상으로 두 여자를 제공해 줄 리는 없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신시우의 외모와 육체는 모두 수컷의 정점에 올라있다.

정조관념이 헤픈 로지라면 당연히 욕심이 생겨날 법도 하다.

마냐와 말리샤를 벗겨 세우는 것을 대가로 성적 향응을 요구한다면 망나니 제자는 ‘이게 웬 떡이냐’하며 홀라당 응하겠지.

적어도 린네가 아는 한 시우는 여색(女色)을 탐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야밤에 보여줬던 능숙한 조교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경험이 녹아들어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린네의 머릿속에서 마냐 말리샤 그리고 로지가 신시우와 뒤엉켜 교성의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그림이 지나갔다.

살색과 선홍빛 점막이 만연한 추잡한 이미지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

린네는 자신이 적잖은 불쾌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불쾌함이 일전과 결이 다른 종류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신시우가 개망나니라는 건 새삼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

앨리스, 도로시 그리고 린네를 바라보는 음흉한 시선과 요구 등을 통해 일찍이 인지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린네가 느낀 감상은 역겨움이었다.

날 것의 욕망을 절제할 줄 모르는 야만인을 어찌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말인가?

만약 그에게 마력 증폭이라는 특수한 능력이 존재하는 걸 몰랐다면….

선망의 대상이자 라이벌로 여긴 티페레트 공작의 강함에 이바지했다는 심증이 없었더라면….

린네는 진작에 그를 팔아치우거나 했을 것이다.

“…이건….”

그러나 지금은 뭔가 다르다.

장어를 먹다 미쳐 토막 내지 못한 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껄끄러움.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신시우의 뒤를 쫓아 로지의 저택에 방문하고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불쑥 고개를 치켜든다.

불합리한 충동이었다.

린네의 목적은 지고지순한 현모양처의 자세를 바탕으로 혼인 서약을 맺고, 더 나아가 그를 지아비로서 영원히 곁에 두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모처럼 외출을 한 남편이 늦어진다 하여 찾아 나서는 건 옳지 않다.

그건 남편을 책망하고 타박하는 함의가 담겨있지 않은가?

무릇 현명한 부인은 남편의 허물을 알더라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뒷바라지를 해야 할 터.

그런 다짐을 한 지 몇시간만에 초조함이 번져나는 건 왜일까.

“그렇군.”

린네는 마침내 제 마음속 소용돌이의 근원을 규명했다.

요는 마력증폭이다.

그는 제 취향에 맞는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맺었을 때 마력 증폭이 발생함을 밝혔다.

이후엔 도로시와 천박한 섹스를 하며 제 말이 진실임을 입증했다.

반면 린네는 신시우로부터 마력 증폭을 받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린네는 다시금 놀랐다.

신시우를 받아들였던 본래 목적인 마력 증폭의 유무를 방금까지 뇌리에서 지워두고 있었다니.

아무튼 그의 발언으로 미루어보자면 린네의 ‘빈약한 신체’로는 그의 성적 흥분을 충분히 돋구지 못한다는 모양이다.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린네가 충분한 흥분을 끌어내지 못했거나.

“…….”

린네의 고운 미간이 조금 더 구겨졌다.

도로시는 마력 증폭을 받고 린네는 받지 못했다.

그것이 연장되어 로지, 마냐, 말리샤에게는 되고 린네에게는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못할 것도 없다.

혹시 지금 이 순간에도 마력 증폭을 펑펑 터뜨리며 문란한 난교를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적인 만족을 제공하지 못하는 린네와의 혼인을 과연 호색한 신시우가 받아들일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더….”

그 꼬락서니를 보였는데도 만족하지 못한 신시우.

그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선 도대체 어디까지 망가져야 한다는 것인지….

들여다보아서는 안 될 어둠을 살피는 어지러움과 갈등 속에서 린네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2.

시우는 로지의 안내를 따라 놀이방이자 공방에 발을 들였다.

전과 특별히 달라진 구석은 없다만 발을 들이자마자 불쾌감이 느껴지는 장소이다.

일그러진 동심을 형상화했다고 해야 하나?

일전과 달리 단순히 인테리어와 사용자의 부조화가 불쾌한 건 아니다.

저 안의 ‘콜렉션’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기에 생기는 불편한 감정이다.

민감한 곳에 피어싱이 빼곡히 박힌 채 견습마녀를 살리기 위해 10년간 로지에게 복종하는 장난감 ‘마마’.

다른 방에 갇혀 있을 마마의 견습마녀 피나.

당초 목적인 마냐 말리샤까지.

로지가 아무리 살가운 태도로 시우를 대한다 한들 그녀를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이유였다.

제 유희를 위해 컴컴한 절망에 타인을 유배하는 피학성과 잔인함은 구역질을 자아낼 따름이다.

로지의 말로는 마마의 희생으로 3일 차부터 피나를 건드리지 않았고, 이제 한 달 정도만 있으면 둘을 풀어준다 하니 그 약속을 잘 이수하길 바랄 따름.

어차피 시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로지 님, 게임이나 할까요?”

안그래도 마마를 범하게 해줄 수 있다는 불편한 제안을 받았던 시우.

괜히 시간을 주었다간 또 그 음험한 농락을 눈앞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뻔했기에 조금 재촉했다.

“왜 이렇게 급해? 시간도 많은데. 마마랑 놀고 싶은 거 아니야? 아까부터 방문을 힐끔힐끔 보는데…. 변태변태.”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는 로지.

시우는 딱딱하게 굳어 들어가는 얼굴을 애써 피며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왜 공방에 콜렉션을 두는 건가요?”

이는 전부터 궁금했던 요소이긴 했다.

일견 평범하게 보이는 이 놀이방의 벽면은 황금안으로도 간파할 수 없는 복잡한 마법 술식이 짜여있다.

로지의 콜렉션 보관 방법과 방의 구조가 관계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즉, 로지의 학대가 순전히 취미의 연장 선상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말.

“여긴 증류소거든.”

“증류소요?”

“넌 가장 강렬한 감정이 뭐라고 생각해?”

영 생뚱맞은 대답과 질문.

시우는 위치보드를 세팅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분노 아닌가요?”

“땡! 아쉽습니다.”

팔로 크게 X자를 보이며 히죽거리는 로지.

“정답은 절망이야.”

입술을 핥으며 부연을 이어가는 로지의 혀는 신화 속 간악한 뱀의 것과 닮아 있었다.

“절망에는 바닥이 없어. 분노처럼 에너지를 소모하지도 않고, 사랑처럼 대상이 필요하지도 않아.

절망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그 자체로 영속적이며, 조금만 가열해도 무한하게 끓어올라.”

“…….”

“오래도록 증류된 순수한 절망에 불을 붙일 때 화르륵 일어나는 연소작용은 그야말로 카타르시스지. 오르가즘 느껴버린다고.”

멍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 로지의 눈동자엔 음험한 도취와 쾌감이 녹아내렸다.

그녀의 목덜미의 솜털이 오소소 돋아있는 걸 보면 연기 따위가 아니다.

“내 공방은 그런 절망을 증류해내는 절망 위스키 주조소인거지. 내 마법은 절망을 흡수하면서 강해지거든.”

멋드러지게 포장한들 로지가 정신병자인 게 달라지진 않는다.

흐리멍덩했던 눈동자에 또렷한 초점이 돌아왔다.

“맞아. 너한테도 보여줘야겠어.”

“괜찮은데요?”

“그거 내려놓고 일로와. 내기와도 연관된 일이니까.”

“정말 사양하겠습니다.”

극구 거절하는 시우에게 삽시간의 웃음기를 거둔 로지의 무표정한 얼굴이 향한다.

“어서.”

“…….”

그리고 또 언제 정색했느냐는 양 활짝 웃는다.

“헤헤, 피나를 보여줄게. 정말 작고 예쁘고 귀여워.”

내키지 않는 꺼림칙함.

그러나 일정 부분 끌리는 제안이다.

로지가 과연 견습마녀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는지에 대한 걱정은 어디까지나 오지랖이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영영 찜찜함이 남아있을 것 같다.

“후, 알겠습니다.”

로지가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새털 같은 발걸음으로 문앞에 향한 로지는 똑똑 노크했다.

“피나! 들어갈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의 손에서 특정 패턴의 마법 교류가 흐르는 순간 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된다.

-철컥!

두꺼운 철문이 열린 뒤 보이는 건 발랄하게 꾸며진 소녀의 방이었다.

반투명한 유리로 된 중문에 가로막혀 전부 살필 순 없었지만 돈이 썩어나는 변태 부호의 SM룸을 연상케 했던 마마의 방에 비하면 안락한 감금 장소다.

“들어와.”

“…….”

그럼에도 시우는 심장이 점점 거칠게 뛰는 걸 느꼈다.

로지의 표정 탓이다.

장난감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제 딴에는 신나는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듯한 순수한 미소가 지네처럼 속을 갉아댄다.

“사실 고백할 게 있어.”

“뭔가요?”

“나 마마와 약속을 어겼어.”

“네?”

“빠바밤!”

로지가 중문을 활짝 열자 침대 위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피나가 보였다.

견습마녀는 일정 나이를 넘기면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바 마녀의 외형은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러나 시우는 특유의 분위기로 둘을 분간할 수 있었다.

침대 위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피나는 쌍둥이보다도 어린 견습마녀로 보였다.

앞으로도 그녀는 영원히 어린 견습마녀일 것이다.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시우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

피나는 죽어있었다.

다만 마법적 처리를 거쳐 생전과 다름없이 신선하게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신선함의 목적이 사자(死者)에 대한 존중 탓이 아닌 건 일목요연하다.

인형놀이를하다 대충 내팽개쳐 둔 것처럼 헝클어진 옷매무새는 군데군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로는 로지의 농락이 휩쓸고 간 흔적이 엿보였으니까.

마녀가 되지 못한 가엾은 견습마녀는 그 사후마저 장난감으로 농락당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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