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
1.
리벤지 매치의 시일이 다가왔다.
시우는 로지 알루와 약속이 가까워진 저녁 즈음 린네를 찾았다.
어제 대련도 마다하고 방에서 칩거하는 그녀에게 허가는 받아두었지만 일단은 린네에게 묶인 몸이다.
저택을 나서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더 인사를 해두는 편이 좋겠다 싶었던 까닭이다.
그게 형식 상 내비치는 스승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고.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우는 린네를 만날 수 없었다.
외출이라도 한 것인지 향월루 구석구석을 뒤져봐도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후 1시간 정도 기다렸으나 결국 약속시각이 빠듯해졌기에 예빈에게 전언을 부탁한 뒤 저택을 나섰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잠자코 린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허가를 받고 뒤늦게야 출발할 수 있었겠지.
그러나 지난밤 이후.
그러니까 린네를 쾌락에 푹 담갔다가 빼낸 이후부터 그녀의 태도는 묘하게 둥글둥글해졌다.
원체 감정 표현이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은 양반이라 ‘아마도’라는 수사가 앞에 붙겠으나, 어제 외출을 허가받을 때의 태도를 보면서 얼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해야 할까.
다행인 일이다.
최악의 경우 수치를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화풀이를 해대거나 쾌락의 단맛을 잊지 못하고 밤낮으로 침소에 불려 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되 적개심은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으니 최상의 밸런스이자 우호도 조절이었다 할 수 있겠다.
“계십니까?”
향월루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로지의 저택에 방문한 시우.
노크한다고 해서 안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규모의 저택이 아니었기에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계십니까. 저 왔습니다.”
참, 다시 봐도 참 예쁘고 고상하게 꾸며진 건물이다.
원체 넓은 까닭에 시우의 부름이 웅웅 반향을 일으켰음에도 답변도 인기척도 없었다.
“시간은 맞춰왔는데….”
벽난로 맞은 편의 시계는 약속된 시간 7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일찍 온 것이 무색하게도 로지는 자리를 비우고 있는 듯했다.
“가만 보자….”
어쩌면 하나의 천운일 수도 있다.
로지 알루의 공방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기도 했고, 어쩌면 ‘놀이방’에서 인질로 잡힌 마냐와 말리샤의 안위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주판알을 튕겨본 뒤 이내 단념했다.
남의 집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상식적인 발상의 발로가 아니었다.
로지 알루는 공적이며 헥센나흐트는 공적의 도시이다.
공방이 위치한 저택을 문도 걸어잠그지 않고 열어두었다는 건 반대로 내부에 그만한 방법 및 감시 시스템이 존재할 확률이 높았다.
시우는 그녀를 굉장히 꺼림칙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비해, 로지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호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허튼 짓을 해서 로지의 경계를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흠.”
차라리 테이블 위에 굴러다니는 메모지와 펜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제 하루 동안 모처럼 생긴 여가를 활용, 로지를 무찌르기 위한 위치보드 전략을 고심해 보았으나 아직 명백히 미완성인 상태였다.
벼락치기 하는 심정으로 한 번 더 숙고해 보자는 생각이다.
사실 오늘 대전엔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아무리 재능과 치트를 겸비했다 해도 압도적인 경험을 단숨에 따라잡기엔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
따라서 금일 게임의 방향성은 패턴과 기풍을 확실히 파악하며 최대한 무승부에 가까운 패배를 당할 것.
그래서 오늘처럼 별다른 요구 없이 리벤지 매치를 이끌 것.
운이 좋다면 이길 것.
정도가 되겠다.
-또각 또각
“흐아아아….”
로지 알루가 응접실에 돌아온 건 약속 시각으로부터 2시간이 훌쩍 지났을 무렵이었다.
딥블루를 기조로 삼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민트빛이 돌도록 염색한 투톤 염색.
화사한 헤어스타일 만큼이나 독특한 홍연색 눈동자.
걸을 때마다 쩔그럭거리는 귀걸이.
여기까지는 저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가죽 자켓에 청바지로 펑크했던 차림새와 달리 연말시상식룩 즉, 붉은 오프 숄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워낙에 매끄러워 광채마저 엿보이는 붉은 새틴 원단은 로지를 썩 아름답게 장식했다.
“어?”
“늦으셨네요.”
지나치게 길어지는 대기 시간에 내심 초조해하던 터다.
로지가 시우에게 관심을 잃었다면 다시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게 어려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 맞다 맞다! 반가워! 깜빡하고 있었네.”
하지만 강제로 사교파티에 끌려간 부잣집 따님처럼 피로해 보이던 로지의 얼굴이 활짝 개는 것을 보아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발목이 부러지진 않을지 걱정되는 힐을 휙휙 발을 휘둘러 벗고는 맨발로 융단을 밟아 시우 옆에 섰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저택이 근사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래? 난 고리타분해 보여서 싫던데. 물려줬으니까 쓰지만 벽지에서 할매 냄새나는 것 같단 말야.”
“아, 네, 뭐. 전 좋다고요.”
아부성 발언에 돌아오는 심히 반응하기 곤란한 대답.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사회성이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재차 확인한다.
로지는 시우의 옆에 털썩 앉아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태연히 다리를 꼬았다.
‘아고고’ 같은 아저씨 같은 탄식이 샴페인과 독한 향수의 향기에 섞여 흐른다.
복장과 냄새를 단서로 슬쩍 짚어 보았다.
“어디 파티라도 다녀왔어요?”
“아, 응. 귀찮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지. 하여간 하나같이 재수 없는 년만 모여서는….”
“알막 클럽인가, 그곳인가요?”
“같은 건물이긴 하지.”
공적들의 사교모임이라.
말을 듣자마자 사람 하나를 두 쪽 내며 가가 소소 하는 다국적 다인종 미녀들의 핏빛 향연이 떠오른다.
천금을 줘도 동참하고 싶지 않은 마경(魔境)이므로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예 테이블에 맨발을 걸친 채 고개를 뒤로 젖혀 휴식을 취하던 로지는 느지막이 엉덩이를 뗐다.
“충전 끝! 위치보드 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거지?”
“네, 연습 많이 해왔으니까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간지러운 듯 웃던 로지가 괜스레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다.
“이번에도 내기야?”
“그편이 재밌잖아요.”
“전에 봐줬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니야? 나도 이번엔 제대로 된 걸 걸어야겠네. 뭐, 일단 따라와.”
엄포를 놓는 로지지만 큰 걱정은 않았다.
로지가 아무리 변덕스럽건 시우의 등 뒤에는 든든한 린네가 있다.
신변에 문제가 생길 무리한 요구라면 자연스럽게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닥에 나뒹굴던 힐을 주워들고 계단을 오르는 로지를 쫓았다.
곧장 놀이방으로 향하나 싶었으나 긴 복도를 걸어 3개쯤 되는 문을 지났을 땐 조금 의아해졌다.
거쳐 지나간 방 중 널따란 침대가 놓인 침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시나요?”
“여기. 빠밤!”
벽 한쪽 접이식 나무문을 열자 드레스룸의 촛대에 촛불이 일어났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옷장은 왼쪽이 현대식 복장, 오른쪽은 마녀식 복장으로 빼곡하다.
정면에는 속옷과 내의를 담아두는 수납장과 화장대가 있었고, 다시 화장대 위엔 온갖 장신구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뭡니까?”
로지는 의도한 것인지 색기 넘치는 옆얼굴을 어깨너머로 비추며 시우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까 상은 줘야겠다 싶어서.”
“괜찮습니다.”
“응응, 나도 괜찮아. 그러니까 옷 갈아입는 것 좀 도와줘.”
자연스레 복잡 오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설마하니 제 옷을 갈아입게 도와주는 걸 상이랍시고 끌고 온 건가?
“참고로 나 노브라야.”
로지는 야시시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심증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한숨이 나왔다.
앨리스의 증언에 의하면 여자 이외에는 관심도 없는 로지가 새삼 남자 마녀를 유혹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돌발 행동은 반쯤은 놀림, 반쯤은 장난이리라.
성가신 장난기와 변덕으로 말미암은 괜한 농간에 휘말리는 건 딱 잘라 질색이었다.
본판이 아무리 예뻐야 뭐하겠는가?
독버섯을 화려하답시고 덥석 삼켜봐야 뒤탈만 날 뿐이다.
일직이 언급했듯 시우는 예쁜 썅년을 봐도 너무 많이 봐 왔다.
“너 고자야? 아, 아니면 게이?”
“고자도 게이도 아니지만 로지님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뭐래, 너도 내 취향 아니거든? 그럼, 등 지퍼나 내려줘.”
“그 정도는 해드릴게요.”
심드렁한 시우의 반응에 툴툴거리면서 등짝을 보이는 로지.
아직 목적을 완수하지 못한바 적당한 수준의 억지엔 어울려주는 편이 좋다는 판단이다.
부드럽게 벌어지는 붉은 원단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건강미 넘치는 육신.
과거 시우였다면 바라보기도 무서워했을 화사한 풍경이다.
지퍼는 생각보다 길어 골반 아래까지 이어져 엉덩이골마저 훤하게 드러냈다.
“엥?”
노브라라는 말을 듣고 당연히 속옷이 기다리리라 예측했던 시우로선 황당할 따름.
찰나를 틈탄 로지의 의도적인 염동에 붉은 드레스가 훌러덩 벗겨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맛! 꺄악!”
몸을 보기 쉽게 휙 뒤로 돌아선 주제에 가슴과 가랑이 사이를 애써 가리는 ‘척’하는 로지.
그게 시늉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유두가 대놓고 삐져나와 있기 때문이다.
삐죽 튀어나온 첨단에 박힌 피어싱이 드레스룸의 밝은 조명 아래 찬란히 반짝인다.
“흐흐….”
로지의 시선이 빤히 시우의 얼굴을 훑더니 ‘내가 이겼어’라는 듯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코끝을 킁킁거리며 말을 잇는 로지.
“발정 난 수컷의 냄새가 나네.”
“…….”
“호흡은 얕고 가빠졌고 무엇보다 홍채가 커졌어. 잡아먹고 싶다는 것처럼. 어때? 이래도 내가 취향이 아니야? 앨리스 따위보다?”
장난기 어린 어조 안에 뾰족한 승부욕을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하진 않다.
정작 남자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도, 단지 시우의 욕망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못마땅해하던 것이다.
실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자 도발이었다.
건장한 남성이라면 아리따운 여성의 나신을 보고 생리적 흥분을 보임이 당연할 테지만….
굳이 소명하진 않았다.
다만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을 표했다.
“거짓말해서 죄송합니다. 굉장히 꼴리네요.”
“음음, 그렇지? 그래도 손대는 건 절대 안 돼. 정 먹고 싶으면 내기로 요구해보던가?”
새삼 느끼지만 은근히 피곤한 여자다.
시우는 온갖 우여곡절 끝에 옷을 갈아입은 로지와 놀이방에 들 수 있었다.
2.
같은 시각.
“…….”
린네는 아직도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슬쩍 찬합을 열은 린네는 장어덮밥 위 손수 플레이팅한 차조기 잎을 다시 세팅한 뒤 도로 뚜껑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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