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97화 (697/917)

#697

1.

갑작스레 방문한 린네의 요청은 ‘난데없다’라는 표현이 적합한 요구였다.

하지만 자유의 마녀가 식재료를 사오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나긴 삶을 영위하는 마녀에게 미식이란 빼놓을 수 없는 유희이다.

이곳 헥센나흐트에 모여든 마녀라고 해도 딱히 다를 건 없었다.

각종 분야에서 부려 먹을 노예를 납치할 때 가장 주요 순위에 오른 것이 호텔 셰프나 파티시에였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일 정도이다.

따라서 디그니티 타운에는 귀한 식자재를 취급하는 접선소가 무수히 많았고, 자유의 마녀는 린네가 건네준 금괴의 20분의 1만을 활용해 재료를 넉넉히 구매할 수 있었다.

그렇다해도 1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코스를 구상하고 그에 필요한 식자재를 구입한 것은 순전히 자유의 마녀가 요리에 능통한 덕분이었다.

예언기관에 의해 견습마녀로 지정되는 이는 모두 빼어난 용모와 가지각색의 재능을 지닌 천재들이다.

만약 마녀가 되지 않았다 해도 어떤 분야에서든 일각을 드러냈을 그런 재능 금수저의 집합인 것이다.

자유의 마녀, ‘즐라타 유스티치아’ 같은 경우 빛나는 재능 중 하나로 요리에 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취미의 일환이었으나 세계 3대 요리 학교를 모조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추방자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그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반쯤 등 떠밀렸다고는 하나 간만에 솜씨를 발휘할 기회인바 약재상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다녀왔어!”

문을 열자 1시간 전과 조금도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있는 린네가 보인다.

살짝 흥분했던 즐라타가 덩달아 차분해지는 정적인 환영이었다.

일본의 미인을 칭찬하는 속담 중에 서면 작약, 앉으면 모란, 걷는 모습은 백합꽃이라는 거창한 말이 있다.

다소곳이 모은 무릎과 곧게 편 허리.

한치도 흠잡을 것 없는 정갈한 옷매무새까지.

즐라타가 아는 한 그 속담과 가장 어울리는 여자는 린네였다.

물론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문으론 청순가련한 아가씨보단 야차의 것에 가까웠지만.

“준비할게.”

아무튼 저런 여자가 환장할 정도의 남자라면.

정력제와 몸에 좋다는 음식까지 먹여가며 돌보고 싶은 남자라면.

도대체 어떤 테크닉을 구사하는 사람일지 새삼 궁금해지는 것이다.

일전에 봤을 땐 반반하게 생겼긴 해도 꽤 순둥순둥한 인상이었는데 말이지….

밤에는 개쩐다는 거 아니야?

낮져밤이 그런 거야?

같은 말은 마음속 수납장에 고이 접어두었다.

솔직히 즐라타는 아직도 린네가 무섭다.

“여기서 기다릴 거야?”

“아니, 나도 보겠다.”

“완성한 뒤에 저택으로 보내줄 수도 있는데?”

“보겠다.”

“정 그러면 따라와.”

그래도 린네는 소문 속 포악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위계나 위세가 좀 높다 싶으면 주먹 쥐고 ‘알아서 잘해?’라고 하는 썅년들이 즐비한 이 바닥이다.

그에 비해 돈도 선불로 줬고, 말이야 베겠다 죽이겠다 해도 난동을 부리지도 않는다.

따라서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린네를 주방에 들인 즐라타.

허름한 골동품 상점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 외관에 비해 주방과 기기만큼은 최신식이다.

작게나마 화로와 훈연 장비 덕트까지 비치되어 있었고, 선반에는 어떤 요리사건 군침을 뚝뚝 흘릴 명품 조리기구로 도배되어 있었다.

즐라타는 내심 린네가 감탄하길 원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시작해라.”

즐라타는 쓴웃음을 머금고 품에 한가득 안고 있던 재료를 와르르 쏟아내었다.

그녀가 구상한 코스는 가이세키 요리에 식용 가능한 마법 작물을 더한 퓨전 약선(藥膳) 코스였다.

일찍이 동양의학은 식음 또한 치료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바 한방 요리를 자연스레 녹여내기 위해선 동양풍 요리에 접목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인 식재료는 다음과 같다.

온몸에서 끈적한 체액을 분사하며 정력 넘치게 꿈틀거리는 장어.

사람 손가락 정도는 우습게 잘라버리는 곰치.

섬세한 식감과 헤이즐넛 향이 특징인 브르타뉴 산 굴.

중화 문화권에서 대체 불가능한 정력 음식으로 평가받는 곰 발바닥.

아직 골수까지 신선한 사슴 뼈에 붙은 넓적다리 살.

엊그제까지 산비탈을 뛰놀던 염소까지.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모였다.

여기에 즐라타의 솜씨가 한껏 발휘되면 다 죽어가던 팔순 노인도 삼두마차를 능히 운전하게 할 정력 보강 코스가 완성될 것이다.

단순히 ‘기분 탓’ 정도가 아니라 일회성 식사로도 유의미한 효력을 이끌어내는 게 마법의 힘이다.

-쾅!

점액을 씻어낸 장어 눈깔을 송곳으로 찍으며 손질 준비를 마친 즐라타에게 린네가 물었다.

“어떤 요리를 할 거지?”

“하나만 할 게 아니라 설명하면 엄청 길 텐데.”

“괜찮다. 말해라.”

“굴은 생굴로 백주에 살짝 데쳐서 초무침으로 낼 거야. 곰치는 약재랑 같이 푹 고아서….”

이만한 크기의 장어는 아무리 즐라타라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즐라타의 코스는 그 시간 내내 설명해야 할 정도로 장황했기에 그녀는 린네가 이내 흥미를 잃을 것으로 생각했다.

비전문가에겐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일 테니 말이다.

“…마지막은 아까 끓여남은 맑은 육수로 입가심하면 끝이야.”

하지만 뜻밖에도 린네는 마지막 순간까지 경청의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사를 내뱉는 호들갑은 떨지 않았지만, 마치 스승의 임종을 앞두고 핵심구결을 전해 듣는 제자처럼 마음에 새기는 듯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린네에게 이것은 일종의 신부 수업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비록 타인의 손을 빌어 행하지만 언젠가는 린네가 이 상차림을 손수 완성할 생각.

이러한 야망을 지닌 주제에 요리의 문외한이자 맛을 느낄 수 없는 패널티까지 안고 있으니 그녀의 말을 토씨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직접 해봐도 되겠나?”

“아하, 나중에 직접 해주게?”

즐라타는 말을 끝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워낙 자랑할 맛 나는 반응이었던 탓에 그녀가 ‘검의 마녀’임을 잠시 망각한, 다소 놀림이 들어간 어조를 내뱉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지만 린네는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즐라타는 냉소적이기보단 나이브한 성격이었으므로 린네를 ‘남첩에게 놀아나는 골빈 여자’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어찌 갸륵한 자세인가!’ 감탄했을 뿐이다.

“요리해 본 적은 있어?”

“없다.”

“한 번도?”

“없다.”

“흐음, 그럼 좀 힘들 텐데….”

거짓말은 아니다.

즐라타가 하려는 건 어지간한 요리인조차 난색을 보일 최고급 난이도의 요리.

초심자라면 돕기는커녕 걸리적거리기나 할 것이다.

“조금 도와줄까? 차라리 이렇게 하는 거 어때?”

그러나 즐라타는 기꺼이 린네에게 제안을 건넸다.

22 위계 대마녀에게 빚을 지워둔다면 모르긴 해도 손해는 아닐 것이라는 타산이 섞여 있었다.

“메인 디쉬 중 하나를 내가 같이 만들어줄게. 음, 아까 말했던 장어 요리가 좋겠다. 그나마 제일 쉬우니까.”

장어 명인들 사이에서 장어는 꿰는데 3년, 자르는 데 5년, 굽는데 한평생이라는 말이 돌만큼 내공이 필요하다.

그러나 즐라타가 다루는 나머지 재료의 조리법은 그 이상으로 괴랄한지라 상대적으로 쉬운 장어덮밥을 린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키모스이를 곁들인 하카리메동(はかりめ丼) 말인가?

하카리메동은 긴 꼬챙이에 카바야키한 장어 한 마리를 통째로 올리는 덮밥이다.

키모스이는 장어의 간을 맑고 감칠맛 나게 우린 맑은 국이고 말이다.

정확한 답변으로 린네의 경청 사실을 재차 확인한 즐라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자랑하면 되지 않을까? 전부 내 손에 맡기는 것보다도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좋다.”

린네가 생각하기에도 썩 그럴듯한 그림이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조리법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훌륭한 식사를 대접하는 게 일차 목표였으나 초과 달성할 길이 생겼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즐라타가 건네준 앞치마를 두르고 회칼 하나를 꺼내 쥔 린네.

그 쥠 새가 자못 살벌하다.

누구 하나를 찔러 죽이려는 모양새에 기겁한 즐라타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고 그거 내려놔. 장어 손질을 끝냈으니까 칼 쓸 일은 따로 없어.”

“그런가?”

“밥 짓는 법부터 알려줄게.”

린네의 신부수업이 첫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약 8시간 이후.

“대단하네.”

즐라타는 아부가 아닌 솔직한 감탄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

신부수업 선생님의 찬사를 담담히 받아들인 린네.

소매를 걷고 앞치마를 두른 린네는 달짝지근한 양념이 완료된 두툼한 장어를 데코하는 중이었다.

꽃처럼 핀 초절임 생강 옆에 젓가락으로 집은 차조기를 놓는 섬세함은 오랜 세월 플레이팅에 고심해온 장인의 기품마저 엿보인다.

이걸 보면 알겠지만, 즐라타가 놀란 건 비단 가르침을 청하는 린네의 태도가 올발랐기 때문이 아니다.

린네의 학습 능력과 수행 능력이 상상을 아득히 웃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살결만 뽀얗지 동양권 출신이면서 쌀을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고슬고슬하게 완성된 솥밥에 왜 뜸을 들여야 하는지.

그런 기본적인 것마저 하나하나 가르쳐주어야 했다.

애초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신분을 위장한 채 요리 학교에 다닐 때도 양파 한 번 까본 적 없는 금수저 아드님들의 끈적이는 추파를 감내하고, 형편없는 쓰레기를 조별 간 평가라는 명목하에 시식해야 했던 즐라타로선 더욱 그랬다.

가르쳐주어 봤자 얼마나 진지하게 임할까 싶었던 것.

그러나 린네는 달랐다.

한 번 가르쳐주면 전부 따라 했다.

되묻는 일도 없었고, 제 편할 대로 입맛대로 하는 일도 없었다.

그 결과 즐라타가 한 것과 별다를 바 없는, 레시피의 충실한 장어덮밥을 만들어 내었다.

맛을 보니 딱히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했다.

원체 슴슴한 탓에 사소한 실수로도 맛이 헝클어지는 키모스이도 퍼펙트 그 자체였고 말이다.

이쯤되자 호기심이 생긴 즐라타는 다른 메뉴를 만들면서 이것저것 그녀에게 지시해보았다.

놀랍게도 린네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든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특히 칼을 다루는 그 솜씨는 아름답기 짝이 없어 린네의 검의 마녀가 아닌 ‘검의 정령’쯤으로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구상되었던 코스가 전부 완성된 이후.

린네와 즐라타는 완성된 음식을 하나씩 시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와, 정말 깜짝 놀랐어. 이거 한번 먹어봐. 네가 한 거야.”

즐라타가 앞 접시에 작게 덜어준 장어덮밥 물끄러미 바라보던 린네는 군말 없이 그것을 맛보았다.

“맛있지?”

“그렇군.”

“앞으로도 배우고 싶으면 찾아와. 약간의 성의만 표시하면 오늘처럼 성심성의껏 도와줄 테니까.”

“알겠다.”

첫 번째 요리 교실이 끝난 후.

린네는 완성된 음식을 찬합에 바리바리 싸들고 향월루로 돌아왔다.

그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특히 이 장어덮밥에 어떤 평가를 보일지 정체 모를 기대감에 발걸음이 가벼워진 린네가 시우를 찾았을 때 마주한 건.

신시우가 로지 알루의 저택으로 갔다는 전언이었다.

사색과 요리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어제 신시우의 보고를 깜빡하고 있던 것이었다.

“…….”

딱히 문제는 없었다.

즐라타가 빌려준 찬합은 그 어떤 보온 도시락보다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아티펙트였으니 말이다.

린네는 가만히 식탁에 앉아 돌아올 제자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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