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5
1.
광란의 밤이 지나고 어느덧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은 다실.
가로누운 시우와 그 품에 겨울잠에 든 여우처럼 파고든 린네.
실낱 하나 걸치지 않고 바닥에 너부러진 기모노를 이불 삼은 두 사람의 숨소리가 화음처럼 울린다.
싸늘한 밤 공기에 몸을 떨던 린네는 본능적으로 시우의 품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우음….”
비몽사몽 중 흐리멍덩하게 떠진 눈.
지난밤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소모 탓에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만 수마의 세계로 린네를 감금하려 했다.
“……?!”
그러나 린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수면이 불필요한 마녀가 잠을 청하는 것은 기상의 상쾌함과 쾌활함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감각이 제한된 린네는 그 상쾌함을 마주할 수 없었고, 도리어 시간이 낭비되는 까닭에 체내 깊이 자리 잡은 불안감만이 촉발되곤 했다.
그리하여 린네는 본디 수면을 취하지 않는 마녀였다.
하물며 동침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알몸으로, 타인의 살결이 느껴질 정도로 바짝 붙어 동침할 경우는 더더욱 없다.
등에서 느껴지는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비일상적인 감각이 흘러내리려던 린네의 의식을 얼어붙게 한 것이다.
벌떡 몸을 일으킨 린네.
화등잔만하게 커진 검은 눈동자가 휘휘 주변을 살핀다.
비좁은 다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옷가지.
옆으로 누운 자세로 단잠을 청하고 있는 제자 신시우.
아까까지 그의 품에 알몸으로 새근새근 잠들었던 것이 분명한 제 꼬락서니까지.
끊어졌던 기억의 필름이 이어지며, 린네의 뇌내 상영관에선 지난 밤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뇌혈관 사이사이로 터지던 환희의 가락과 억센 그의 품에 안겨 몸부림치던 순간 토해냈던 볼썽사나운 울음.
“우…!”
그 순간 린네의 육신을 헤집었던 쾌락의 잔재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
허나 그것을 환상통처럼 실존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했다.
알코올의 기운을 억누른 린네의 낙인은 늘 그렇듯 아무런 기쁨도 낙도 없는 삶의 늪으로 그녀를 재차 끌어내렸음에.
그렇기에 린네가 느낀 건 오롯이 뾰족한 수치와 까슬까슬한 자괴감뿐이었다.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나자 재차 기억이 상영된다.
이번 필름은 흑백 무성 영화나 다름없던 아까의 기억보다 훨씬 생생한 것이었다.
그에게 했던 온갖 음란한 교태와 아양.
뒤에 박히며 쾌감을 느낀 것도 모자라 여성기를 벌려 보이며 박힐 것을 애원했다.
그가 순순히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자 제자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부디 박아달라 구걸했다.
그렇게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며 순결을 잃었다.
멱이 따이는 돼지마냥 울부짖으며 볼썽사나운 신음과 울음을 마구마구 터뜨렸다.
종국에는 여성기의 급소인 음핵을 애무 당한 채 박히다가 정신을 잃어버렸다.
“…….”
타인의 경험이라 해도 음란함에 눈을 찌푸리고 천박함에 경악하게 될 일련의 행위가.
다름 아닌 자신이 행한 일임을 자각한다.
“우웃…!”
린네의 얼굴에 순식간에 얼굴에 불이 난다.
역사적으로 기록 될 산불에 버금가는 대화재다.
“컥!”
린네는 벌떡 일어서 시우를 뻥 걷어찼다.
세상 편안한 꿀잠에 젖어있던 시우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구르며 대자로 퍼졌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일어난 시우가 본 광경은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곤두선 린네가 이를 갈며 가슴에 올라탄 모습이었다.
옷가지를 챙길 여유도 없이 풀 마운트 자세를 취한 알몸의 린네.
“이… 이… 이…!!!”
“스, 스승님?”
-짝!
도깨비 같은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진 시우의 뺨에 화끈한 통증이 작렬한다.
-짝! 짝! 짝! 짝!
“이…! 바보! 쓰레기! 불한당! 글러 먹은 놈! 얼간이!”
“컥! 컥! 컥! 컥!”
알고 있는 나쁜 욕이란 욕은 죄다 긁어모아 뺨을 때리는 박자에 맞춰 내뱉는 린네.
그녀의 울분이 담긴 손바닥은 좌우 뺨을 오가며 선명한 손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여자는! 하얀 거! 안 나온다!”
“끄악! 끄악! 끄악!”
“죽어라! 당장 사라져라!”
어젯밤 시우의 거짓말을 뒤늦게 간파한 린네의 노호성이 쩌렁쩌렁 울리고.
시우는 두 뺨이 퉁퉁 불어터지고 나서야 옷을 챙겨 입을 수 있었다.
2.
“아, 쓰읍. 안 멎네….”
시우는 시큰거리는 코를 붙잡고 향월루의 객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만화처럼 손자국이 남은 뺨이 얼얼하고 목 뒤로 넘어간 핏물이 큼큼한 쇳맛을 내긴 했지만….
“휴우….”
이렇듯 뿌듯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지난 밤의 성과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자, 점검해보자.
린네가 다시는 엄두도 내지 못할 부끄러운 경험을 남겼는가? => YES
마력 증폭 및 그 단서를 들키지 않았는가? =>YES
그렇게 온갖 짓거리를 하고도 목숨을 부지했는가? => YES
회상만 해도 자지가 터질 것 같은 섹스한 섹스였는가? =>SEX!
메인 퀘스트는 물론이고 업적 달성 및 히든 수집품 보상까지 싹 긁어먹은 최고의 하룻밤이었던 것이다.
이런 수확물을 거뒀는데 코피 좀 흘렀다고 찡찡거려야 쓰겠는가?
굳이 불안 요소를 꼽자면 린네가 이 맛을 못 잊고 마력 증폭이 아닌 ‘쾌감’을 목적으로 수청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마저도 크게 걱정되는 건 아니다.
그간 지켜봐 온 시간이 있다.
린네의 성격은 어찌 보면 스승님보다도 고지식하고 체면을 중시한다.
노발대발하며 시우를 걷어차 쫓아낸 그녀가 다시 성교 제안을 하기까진 시간이 걸릴 터.
도로시와 재접선 하기까지의 시간을 번 셈이고, 설령 예상보다 빠르게 관계를 요구한다 한들 오늘 밤처럼 하면 그만이라는 걸 확인했다.
아무튼 린네는 더럽혀진 몸을 씻겠노라 선언하고 온천으로 향했고, 금일 대련 일정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기에 자연스레 숙소로 돌아와 자숙하게 되었다.
말이 자숙이지 진실한 의미로의 꿀 같은 휴식이다.
-드르륵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예빈과 앨리스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처음엔 그저 밤사이 무서운 집주인에게 끌려간 동료를 향한 걱정이라고 생각했으나.
두 사람의 온도감이 미묘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와, 왔어요?”
“다녀왔구나?”
예빈도 앨리스도 낯선 생명체를 대하는 듯한 거리감, 호기심과 경악이 적당히 배분된 눈빛으로 힐끗댄다.
“피곤할 텐데 쉬세요.”
“아뇨, 잘 쉬다 왔으니 괜찮긴 한데….”
특히 앨리스는 시우의 시선이 닿자마자 벌겨 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두 팔로 제 몸을 감싼다.
원인을 되짚어 본 시우는 마찬가지로 겸연쩍은 감상을 느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어색해하던 그림이 아주 처음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혹시 그, 어젯밤에 여기까지 들렸나요?”
다실에서 객실까지는 정원을 하나 끼고 있기에 거리가 꽤 된다.
그 간극을 뛰어넘을 만큼 격렬했다는 것이다.
“린네의 소리만 들리긴 했는데 부분부분 들렸지.”
앨리스는 별거 아니라는 양 태연히 굴며 고개를 끄덕였다.
뻣뻣하게 굳은 뺨까지는 숨길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예빈은 민망함을 느낀 것인지 청소를 해야겠다는 핑계를 댄 후 자리를 비웠다.
아직은 피로가 남아 있는바 이부자리를 피려던 시우.
딴청을 피우던 앨리스만이 은근히 곁에 다가왔다.
“저기 말이야. 도대체 뭘 한 거야?”
“그냥 한 거죠.”
“그냥 했는데 그 무뚝뚝한 주인장이 울고불고…. 무슨 위험한 약이라도 쓴 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닙니다.”
겸연쩍게 답하는 시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앨리스.
신시우가 실은 꽤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만큼 도로시 때만큼 그가 무섭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알몸으로 남자 아래 깔리는 모습조차 상상이 가지 않는 린네가 발정기 고양이처럼 밤새 울어댔다니.
마냐와 말리샤도 꽤 훌륭한 기교파인데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앨리스조차 그렇게 기분 좋게 울어본 적 없다.
이 어찌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쏘냐?
“흠흠….”
헛기침을 한 앨리스가 은밀한 비밀이라도 묻듯 속삭였다.
“나도 비법 좀 전수해 줘.”
“무슨 비법이요?”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어제 너가 써먹은 방법 말이야.”
“정말 별다른 비법 같은 건 없다니까요.”
여러번 캐묻는데도 마땅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앨리스도 제 발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처지다.
순전히 그의 연정에 기대어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었건만 저렇게까지 꽁꽁 감추려 드니 도리어 호기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도대체 뭐가 린네를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짚이는 건 하나.
여자에겐 없고, 남자에겐 있는 다리 사이 그것이다.
그게 그렇게나 좋은가?
그럼 훗날 신시우와 관계를 갖게 된다면 자신도 그런 소리를 내며 좋아하게 되는 걸까?
“나도 참….”
하긴 그런 것들을 유유자적 생각하기엔 그렇게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니다.
쓴웃음을 머금은 앨리스는 비척비척 이불을 파고드는 시우가 쉴 수 있게끔 조용히 스탠드 조명의 밝기를 낮춰주었다.
3.
-보글보글보글
신시우를 쫓아내고 홀로 온천에 몸을 담근 린네.
뜨거운 온천수 안에 코끝까지 잠수한 린네는 물거품을 만들며 잡념에 잠겨 있었다.
조금 전까지 펄펄 끓던 분노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로 무화(霧化)한 것인지 그렇게 격렬하지 않다.
깨진 유리조각처럼 뾰족한 수치와 자조는 여지없이 마음을 쿡쿡 들쑤셨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따끔거림 사이로 자꾸만 연상되는 건….
지난 밤 유린 속에서 몸을 불태웠던 환락의 불길이다.
일생을 강함을 위해서만 살아왔다.
누군가에겐 일상에 불구한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 몸을 갈아 넣는 구도의 가시밭길을 따라 걸었다.
무감각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권태의 삶.
신시우는 그 위에 천상의 감로(甘露)를 흩뿌려주었다.
스승으로써의 체통과 대마녀로써의 권위.
그 모든 것을 내려놓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여자의 기쁨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거짓 없이 고백건대 린네는 그가 주는 꿀물을 핥아 먹기 위하여 기꺼이 다리를 벌렸었다.
그것이 린네가 그만한 수치를 보이고도 당당하게 불경한 제자의 목을 칠 수 없는 이유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린 린네의 손이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어제는 그토록 뾰족하게 솟아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 자지러졌던 음핵.
그것이 지금은 껍질 안에 들어가 작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만져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술기운이 돌고 있지 않기 때문인 걸까?
그렇다면 술을 마시고 다시 신시우에게 만져달라고 하면 어제처럼 기분 좋아질 수 있는 건가?
“그건 사마외도의 길이다….”
그에게 보였던 자신의 추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온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숨이 턱 막힐 만큼의 갈증을 느끼고 있는 린네였다.
잠깐만 눈을 감아도 어젯밤 보았던 황홀한 만화경이 눈꺼풀 뒤에서 산산이 흩어졌기에.
-보글보글보글
다리 사이에서 손을 빼고 미혹으로 가득 찬 머리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린네.
그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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