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
1.
대련을 끝낸 린네는 무릎을 꿇고 명상에 돌입했다.
그 목적은 심상 속에서 펼쳐내는 수련.
지금까지 있던 전투를 곱씹고, 자신의 검로를 관조하며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묵사(默思)이다.
본디 검과 자신만이 존재해야 할 안식처는 새로운 제자를 들이게 된 이후.
더 정확히는 그의 마력 증폭을 확신하게 된 이후, 더는 평온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목을 조르는 듯한 초조함과 강박이 린네를 옭아매고 있었으니까.
린네의 낙인에는 의도된 결함이 있다.
이건 비단 그녀에게만 국한된 결함이 아니다.
역대 검의 마녀가 모두 지니고 있던, 22개의 낙인의 획 중 한 자리를 차지한 ‘결핍의 저주’.
그 저주 탓에 린네의 오감과 감정 체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훌륭한 진미의 맛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느낄 수 있는 안식도.
솜이불에 푹신함에 감싸인 평온함도.
하물며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쾌락도.
린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불순물이기 때문이다.
더욱 높은 위계를, 더욱 높은 강함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마녀의 숙명이자 의무.
안식은 인간을 주저하게 만든다.
쾌락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
평온은 인간을 안주하게 만든다.
사랑은 인간을 불합리하게 만든다.
오직 결핍으로 말미암은 순수한 갈망만이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역대 검의 마녀는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한 가지 목표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스스로 목줄을 찼다.
그런 린네에게 허락된 건 평화는 오직 하나.
강해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안정감.
그것뿐이다.
그녀가 혹사에 가까운 단련을 거듭하는 것도.
수많은 마녀와 전투를 불사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린네의 선대도, 그 선대의 선대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며 그러한 발상과 시도는 분명 성공적이었다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의 마녀는 무수한 마녀 가운데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자로 거듭났으니.
하지만 결핍의 저주가 ‘저주’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마녀의 수명은 주체적이다.
영체는 노화하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기력이 쇠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마녀는 150년 정도의 수명을 평균으로 잡는다.
느긋이 연구를 끝낸 이후 유산과 원대한 야망을 후대에 맡긴다.
그러나 검의 마녀는 달랐다.
린네의 선대는 마녀가 된 이후 42년을 살다 죽었다.
그 선대는 27년을 살다 낙인을 넘겼다.
린네를 제외하면 역대 그 어떤 검의 마녀도 80년 이상의 수명을 지닌 이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녀도 결국엔 인간.
그 심리의 근본은 인간의 것과 다름이 없다.
사람의 마음은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균형을 맞춘다.
설령 아주 고되고 힘든 일이 생길지라도 긍정적인 감정이 그것을 상쇄하고 회복을 돕는다.
그러나 역대 ‘사마키엘’은 그 심리적 밸런스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이다.
플러스에 해당하는 모든 감정은 저주에 의해 제한되며, 마이너스에 해당하는 감정은 아무런 필터링 없이 고스란히 감지하는 것이다.
‘더 올라가지 못한 채 체류하고 있다’라는 걸 인지했을 때 느끼는 강박은 일반적인 자괴감과 초조함의 수준이 아니며, 과거의 괴로운 기억과 트라우마 역시 조금도 빛바래지 않은 채 기억에 잔류한다.
끝 없는 절망의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괴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로 분해되는 상실감.
모든 것이 아주 조금의 감쇄도 받지 못한 채 자신의 내부를 향하며, 곧 자신을 향하는 채찍이 된다.
그런 채찍질을 바탕으로 하루하루를 불태운 인간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는 선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속이 벌레에게 죄다 파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듯했던.
매일 밤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자해하던 스승은 곧 린네의 미래일 터였으니.
린네의 특출난 재능과 정신력은 하루도 멈추지 않고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냈다.
그럼에도 세상엔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린네는 최근 벽을 보았다.
처음으로 체감한 자신의 한계.
린네에게 그것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끔찍한 예언이다.
곧 그 지독한 악몽과 괴로움이 찾아오리는 예고장 같은 것이니.
지금 린네의 일거수일투족은 막다른 곳에 몰린 자의 발버둥이며, 설령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신시우의 마력증폭만이 린네를 구원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
린네는 물끄러미 제 앞에 놓인 잔을 보았다.
맑은 사케가 담긴 술잔이다.
제자와 몸을 겹치는 것이, 본래 성기가 삽입되는 곳이 아닌 구멍을 내어주는 것이, 천박한 희롱에 멋대로 놀아나야 하는 것이, 기녀처럼 아양을 떠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한 자각은 있다.
만약 저주가 아니었다면 이딴 짓은 죽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린네는 오늘 밤 린네는 다시 그의 제자에게 잠자리를 청할 것이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린네는 다른 누구보다 그 수치와 모멸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런 감정을 중화시켜 줄 쾌락이나 사랑 따위가 없었으니.
따라서 어제처럼 술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성이 흐릿해지고, 기억마저 일부 망각하게 되는 주정의 힘이라면 도움이 될 테니까.
-꿀꺽 꿀꺽 꿀꺽
맑고 독한 술이 목구멍을 따라 흐르며 불을 지른다.
지금껏 배우고 익혔던 내용마저 잊지 않게 그것만을 떠올린 린네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전장으로 향할 시간이다.
2.
하루가 무난히도 흘렀다.
아니 사실 마냥 무난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고작 3시간 자고 연무장으로 끌려가 대련이라는 명목하에 뚜들겨 맞는 하루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뼈가 시리도록 얻어맞고 돌아왔다고는 하나 마음에 깃드는 건 안도다.
왜냐하면 린네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력 증폭의 연구를 구실로 대련을 조기 종료하고 다실로 끌고 가지도 않았고,
분을 주체하지 못해 힘 조절을 안 하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일이 마치 없던 것처럼 린네는 무표정하게 검만 휘둘렀다.
대련이 끝나자 아무런 내색도 없이 ‘수고했다’라는 짧은 말과 함께 시우를 객실로 돌려보냈고 말이다.
이로써 가장 큰 잠재적 위험은 사라졌다.
헥센나흐트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이래로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던 건 마력 증폭에 대한 린네의 탐구심이었으니.
앞으로 일주일가량만 더 버티면 도로시가 가져온 문을 관장하는 마법식의 코드를 받을 수 있다.
거기서 또 사나흘 정도만 더 있으면 차원이동식을 정립할 예정이다.
남은 이벤트는 로지와 위치보드를 겨뤄 마냐와 말리샤를 따오는 것 정도.
“…흐음….”
그 간엔 대련을 마치면 그대로 뻗어 잠드는 게 일상이었으나,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렷다.
회복 마법의 여파와 극심한 체력 및 마력 소모로 심신이 고달프긴 해도 억지로 버틴다면 버틸 수준은 되었다.
따라서 수면을 포기하고 위치보드를 연구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견습마녀도 즐길 수 있는 보드 게임에 무슨 거창한 연구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대는 로지 알루.
고작 게임에 불과한 위치보드에 수상할 정도로 진심인 마녀다.
마안이라는 치트를 활용한 시우를 아무런 꼼수 없이 실력만으로 짓눌렀으니 말이다.
비록 선후공의 유불리에서 기인한 패배였다 한들 아무 대책 없이 갈 수는 없었다.
이전처럼 선후공 탓에 승부가 결정 난다면 설령 이긴다 해도 곤란한 까닭이다.
로지 역시 승자의 권리로 시우와의 재대결만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확실한 차이를 벌려 승리하지 않는다면 시우도 재대결 이상의 것 즉, 마냐와 말리샤를 요구하기엔 명분이 서지 않는다.
이쪽도 진심으로 나서야 한다는 거겠지.
“와, 진짜 미친년이긴 했구나.”
종이 한 장을 놓고 머릿속에서 일전 대국을 복기하던 시우는 감탄 반 경악 반의 탄식을 내뱉었다.
보드 자체가 3차원인지라 경우의 수가 말할 수 없이 많다.
전술적 전략적 수정이 가능한 분기점도 굉장히 빈번하다.
그러나 복기를 반복해도 로지보다 나은 수를 찾는 게 힘들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이론상 완벽한 수만을 거듭한다.
마안도 없는 그녀가 이만한 실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갈아 넣었을지 감히 짐작도 가지 않을 수준이랄까.
“…….”
이걸 뛰어넘기 위해서는 상식을 벗어난 수를 둬야만 한다.
그 말은 곧 정석을 벗어나 정석보다 뛰어난 수를 떠올려야 하는데….
“그게 말이 쉽지.”
디아나의 말대로 정석이란 수많은 플레이어가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낸 대원칙이다.
위치보드는 수백 년간 밸런스 패치 한 번 없이 메타가 고일 대로 고인 게임이고 말이다.
결국 그렇다 할 성과 없이 잠자리에 들려는 그때, 장지문이 촤르륵 열렸다.
“따라와라.”
연무복에서 곱고 화려한 검은 기모노 차림으로 갈아입은 린네였다.
오늘은 곱게 넘어가는 줄 알았건만 아니었던 건가?
설마 그 험악한 꼴을 보고도 매달리려 할 줄이야.
예기치 못했던 린네의 도전정신에 시우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대체 뭘 해야 그녀를 떨쳐낼 수 있는 건지….
이렇게까지 했는데 결국 마력 증폭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분노의 화살이 고스란히 업보가 되어 돌아오진 않을지 심히 걱정하게 된다.
-삐걱삐걱
조용히 삐걱이는 마룻소리.
걸음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도 다실이 있는 정원 쪽이다.
그런데….
린네의 발걸음이 몹시 이상하다.
언제나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걷는 그녀답지 않게 좌우로 비틀거린다.
발을 건다면 멋지게 우당탕탕 넘어질 것 같다.
냄새가 거의 나지 않기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마도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조금 취하신 것 같은데 부축해 드릴까요?”
“됐다.”
“얼마나 드셨어요?”
“…세 잔.”
“아이고….”
역시나 였다.
린네의 발음은 전처럼 묘하게 꼬여 있었고 슬쩍 엿보인 눈동자 또한 흐리멍덩했다.
-딸꾹
풀벌레소리처럼 맑고 청아한 딸꾹질 소리.
소리가 반복될 때마다 린네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리는 게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실에 도착한 린네는 도착하자마자 옷자락을 풀었다.
섹스고 나발이고 다 귀찮으니 당장에라도 자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겨우 세 잔을 마셨다고는 해도 저 상태면 꽐라나 다름없다.
“벗어라.”
하루만에 정신적 치명상을 회복하고 재도전하는 린네의 가상한 노력 앞에 시우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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