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
1.
약 6시간가량 시우를 흠씬 두들겨 팬 린네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단순히 분노만이었다면 태울 것을 모조리 태우고 난 이후 잿불처럼 사그라지고 말았을 노릇.
그러나 린네의 분노는 네이팜탄처럼 온갖 요소가 혼합된 분노에 가까웠다.
수치와 자괴감 기타 등등의 요소가 벤젠과 폴리스티렌처럼 연소작용을 도왔으니 말이다.
이러다간 망나니 제자 놈을 상대로 힘조절에 실패할 것 같아 대련도 종료했다.
신시우를 만족시키는데 열중했던 탓에 잊고 있던 부끄러움이 상기된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제 꼴사나운 치태가 뇌에서 무한 재생된다.
맨정신으로 있고 싶지 않다.
신시우를 따라 디그니티 타운의 주점에 갔을 때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알코올의 효력을 배웠다.
따라서 린네는 술을 찾았다.
린네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 향월루는 그녀가 견습마녀일 적부터 스승과 함께 살아오던 저택을 그대로 향월루로 옮겨온 것이다.
따라서 창고에는 술을 보관하는 상자가 따로 존재했으며 린네는 거기서 오래된 사케 한 병과 접시처럼 넙쩍한 사카즈키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케의 도수는 일전 마셨던 모스크뮬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린네의 낙인에는 의도적 결함이 있다.
따라서 자율방어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알코올에 대한 저항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런 그녀가 석 잔의 사케를 연거푸 비웠으니 거나하게 취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저, 어쩐 일로….”
대련 동안 치유를 끝내고 린네에게 불렸을 때만 해도 예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보이지 않는 상처를 마저 돌보게 하려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린네가 방안을 들락날락하며 술을 가져오고 저 혼자 거칠게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예빈의 위기감지 알람도 점점 볼륨을 키우고 있었다.
검의 마녀에 대한 악명은 알고 있고, 몇 개월간 동거했다 한들 그 이미지를 쇄신할 이벤트는 달리 없었으니 말이다.
“의사, 날 속였구나.”
밤안개처럼 스산하게 퍼지는 린네의 음색은 예빈이 그녀와 지내게 된 이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속여? 뭘?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뻣뻣하게 몸이 굳는다.
그런 예빈의 앞에 린네는 중간을 종이로 감싼 단도를 밀어 건네며 말했다.
“할복해라.”
“힉!”
예빈은 비록 추방자 출신이지만 마땅한 전투 경험도 없는 완전한 비전투 계열의 마녀이다.
게다가 성인기 이후 견습마녀가 된 케이스기에 그 가치관은 완벽히 현대인의 것이다.
돌연 할복을 강요받는 처지에서 경기를 일으킬 만큼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왜, 왜 죽어야 하는지나 알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이대로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빈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황급히 그 이유를 물었다.
“…….”
침묵의 반주 위로 취기에 흩어져도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진다.
잠시간 생겨난 여유를 틈타 예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시우의 마력 증폭 조건을 숨긴 사실이 들통 났나? 아니면 탈출 계획이?
어느 쪽이건 가능성이 있지만, 당사자인 시우는 곱게 객실로 들여보내 주고 새삼 예빈을 불러들인 이유는 달리 있을 터이다.
한편 린네는 사색이 된 예빈을 앞에 두고 애꿎은 입술만 물어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따져 물을 것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입 밖에 내려니 뼈를 깎아내는 것 같은 모멸의 기억이 재생된다.
“넌 분명, 남자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네…?”
“허나 잘못된 방법을.”
짓씹듯이 으르렁거리는 린네의 모습에 예빈의 머리에 물음표가 박힌다.
왜냐하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지하고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거론되기엔 어쩐지 맥빠지는 주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눈앞의 린네가 덜 무서워지는 건 아니었다.
“아, 그, 그게….”
하지만 중구난방으로 날뛰던 수많은 찔림 속에 명확한 단서를 잡은 건 사실.
예빈은 린네의 추궁을 거슬러 전체적인 그림을 조망했다.
먼저 얼마 전 린네는 예빈을 불러들여 남성을 기쁘게 하는 법에 대해 물었다.
그게 어디에 쓰일지는 알고 있었다.
린네는 마력 증폭을 얻기 위해 신시우를 유혹하려 한다.
그렇게 몸을 겹친 지도 꽤 되었다.
그 조건이 몹시 간단한 가운데 신시우가 기지를 발휘해 조건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의 입으로 들었다.
그렇다면 린네가 뭘 물었더라?
겁에 질려 사고기능이 저하되었다 한들 명색이 마녀다.
우수한 기억력으로부터 끄집어낸 상담 내역은 다음과 같다.
남자가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나? 라는 린네의 질문.
이에 굳이 가슴이 아니더라도 날씬한 뒤태를 위주로 어필해보라는 예빈의 조언.
추가로 스타킹이나 레깅스를 입으라고도 일러주었지.
여자가 신음을 내는 게 중요하냐는 질문.
이에 반응이 있는 편이 더 끌릴 것이라는 답변.
마지막으로 짐승의 소리를 내는 게 끌리는 요소냐는 질문.
예빈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순종적으로 보임에 따라 정복감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제 추측을 경험에서 도출하여 말해주었다.
“아….”
그렇다면 예빈더러 속였다고 화내는 건….
그걸 전부 시도해봤고 그럼에도 마력 증폭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예빈을 추궁하는 것이리라.
시우가 아닌 밤중에 끌려나와 먼지나에 두들겨 맞은 것 역시 민망함의 화풀이 일 테고.
어찌보면 불똥이 튄 셈이다.
하지만 시우에 대한 원망 없이 그저 충격만을 받았다.
저렇게 무섭게만 보이는 린네가 시우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을 것에 대한 충격이었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 건지, 예빈은 차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는…. 제대로 알려 드린 것인데요….”
“날 기만하지 마라. 놈은 날 비웃었다. 네가 알려준 모든 것을 했음에도.”
아무튼 지금은 눈앞에 닥칠 위기를 넘겨야 할 때이다.
린네의 분노를 진정하기 위해서라도 진지한 상담사를 자처할 필요가 있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하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
“어쩌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는 거니까요. 뭐가 문제였는 지도요.”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는 예빈.
예빈의 역공에 린네의 눈썹이 움찔 떨린다.
그녀의 기도와는 달리 술은 만능정신 치료제 따위가 아니었다.
찾아오는 건 망각의 축복이 아닌 한결 생생한 회상의 저주.
결국 린네는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들추는 것보다 예빈에게 올바른 예시를 제공받는 걸 택했다.
“신음을 내라.”
“네?”
“남성을 유혹할 만한 신음을 내라.”
린네가 들어본 교성은 도로시의 것이 유일하다.
예빈까지 참고할 수 있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터.
“여, 여기서요?”
그건 어렵다는 듯 반문하자 린네의 시선이 종이에 쌓인 단도를 향한다.
“하, 할게요! 할게요….”
선 넘은 술자리 벌칙 같은 성희롱에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라니….
예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하아앙…. 아앙….”
아무런 성적 자극도 없이, 서릿발 같은 기세로 평가하는 동성 앞에서 야릇한 신음을 연기해야 한다?
단언컨대 이건 결백을 주장하는 가장 최악의 입증법이었다.
창피하고 낯뜨겁다.
귀로 제 신음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오글거려서 닭살이 오돌토돌 돋는다.
“앙, 흐앙…. 아앙…. 아아앙…. 이 정도면 됐을까요?”
“더 해라.”
“네…. 앙…. 아앙….”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점은 예빈이 신음을 내자마자 린네의 분노가 한풀 꺾였다는 것.
고요한 객실 내 흐르는 어색한 예빈의 음색.
그걸 클래식을 듣는 양 경청하는 린네.
하지만 아무리 작위적인 상황 속 연출이라 한들 예빈은 경험이 있을뿐더러 성적 쾌감에 대한 확실한 인지가 있다.
린네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묘한 색기가 감돌았다.
“그만.”
“앙, 네….”
린네는 판단을 내렸다.
동시에 혼란스러워졌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네? 네, 보시다시피 필사적으로….”
“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가요?”
즉, 예빈이 내는 소리와 제 소리의 큰 차이점을 모르겠다는 것.
애초에 린네가 듣기로는 도로시의 신음과 본인의 신음도 큰 차이점이 없었다.
표음 문자로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음절과 음소가 불분명한 발성법.
은근히 섞인 비음과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까지 분명 제대로 모방했다.
가슴의 크기가 문제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린네와 시우는 시종 후배위 자세에서 관계했다.
출렁일만큼의 가슴이 없는 린네가 제 약점을 가리며 동시에 뒤태를 강조할 수 있는 자세였다.
도로시건 린네건 그 자세에선 가슴의 유불리가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위 두 가지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젖소 울음을 내어라.”
“네…?”
“구도의 마녀가 했던 것처럼 신음과 섞어내라.”
얼굴이 벌게지면서까지 신음을 들려줬건만 이번엔 더한 요구가 들어왔다.
예빈은 울며 겨자 먹기로 소심한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음, 음머어어….”
“더 크게 내라.”
“음머어어어!”
얼굴이 불이 난 듯 뜨겁게 변한 예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지만, 린네의 감상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 역시 별로 다를 것 없다.
다만 얼핏 눈이 가는 건 팔꿈치 사이로 보이는 예빈의 가슴.
“…….”
취기가 급속히 돌기 시작하며 어지러운 머릿속 불현듯 떠오르는 깨달음.
젖소도 젖이 크다.
도로시는 가슴이 크다.
예빈도 가슴이 크다.
한편 린네는 가슴이 작다.
린네는 젖소의 울음소리와 유방 크기의 상관관계를 일절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동물의 울음을 따라 함에 있어 그의 정복감을 충족시킬 것만을 떠올렸을 뿐.
그러고보니 그가 당혹을 표했을 땐 린네가 젖소 울음을 내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렇군.”
그제야 시우가 당혹스러워하다 못해 린네에게 조소를 날렸던 이유를 깨닫는다.
가슴이 작은 린네가 도로시처럼 젖소 흉내를 내려 들었으니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꼴로만 보였을 터.
빈약한 몸매라는 망발을 들먹이던 괘씸함은 둘째치고 린네의 노력을 보면서까지 그딴 생각을 한 제자의 만행에 치가 떨린다.
그러나 명확한 정답을 얻은 만큼 소득은 있다.
린네의 착각과 실수가 있었다면 무작정 예빈을 지탄하는 건 무의미했다.
그녀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주었을 가능성도 생겨버린 셈이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흠….”
린네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알딸딸하던 취기는 불과 10여 분 만에 정수리를 돌파.
모락모락 증기가 날 정도의 현기증과 무기력함을 린네에게 선물해주었다.
무자비한 졸음이 몰려온다.
“됐다, 나가라.”
“할복은요…?”
“나가라.”
천추와 같이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이밀며 예빈을 물렸다.
아직 속으로 예정했던 도전 기회 2번이 남아있다.
그 두 번의 노력이 모조리 허위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땐….
“쿠우….”
비몽사몽을 오가던 린네는 무릎을 꿇던 자세 그대로 꿈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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