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
1.
시우의 플랜은 웅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물은 곳곳이 부러졌다가 아문 뼈와 아직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흐르는 코피였지만 말이다.
“아오…. 존나 아프네.”
달밤의 체조도 아닌 대련.
린네의 화풀이는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칼날에 더해 시도 때도 없이 엉덩이를 걷어차였는데 이게 친구끼리 장난으로 주고받는 수준이 아니다.
평소 실전을 방불케 하던 린네의 대련과 비교해도 훨씬 거친 일격이었다.
그 결과 집요하게 이어진 스팽킹에 꼬리뼈와 엉덩이뼈 골절만 5회.
피똥을 싼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치유사로서 대련 중 부상을 치유하던 예빈이 린네에게 불려 가고 홀로 객실로 돌아온 시우.
“아, 왔어?”
시우를 보자마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앨리스가 애써 태연한 척 인사를 건네왔다.
앨리스가 왜 갑자기 시우를 무서워하는 건지는 예빈에게 얼추 들었다.
밀크카우보이 플레이가 과격해져 향월루 전체에 그 소리를 송출한 결과, 로지에게 괴롭힘 당하던 앨리스의 트라우마 스위치를 자극해버린 모양이다.
“오늘도 고생이네.”
“당분간은 고생해야죠.”
하지만 앨리스는 적어도 겉으로는 시우를 변함없이 대하려 했다.
그것이 부당한 감상이기 때문인지, 마냐 말리샤를 비롯한 앨리스의 탈출권을 시우가 쥐고 있기에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던데…. 무슨 일 있어?”
“별 문제는 없습니다.”
설명하자면 장절하고 낯부끄럽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그것도 그건데 한시라도 몸을 누이고 싶다는 게 본심이다.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은 팔다리가 부러지고 잘려나가도 잘들 버티지만 시우는 그런 초인이 아니다.
현실은 손가락만 부러져도 눈물 펑펑 쏟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평소 18시간이던 분골착근 대련 코스를 6시간으로 압축했으니 몸도 정신력도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그렇게 이불 위에 털썩 몸을 눕히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주춤주춤 다가온 앨리스가 보인다.
“내가 안마라도 해줄까?”
“아뇨, 아….”
지금은 그저 자고 싶었기에 눈을 붙이려던 시우는 앨리스의 갑작스러운 접근이 비단 호의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뭐 묻고 싶은 게 있나요?”
넌지시 물꼬를 틀어주자 눈을 번쩍 뜬 채 고개를 끄덕이는 앨리스.
“로지의 저택에 다녀왔다며?”
“예, 어제 낮에요..”
“마냐는? 말리샤는? 모두 무사해? 로지 그 썅년이 얌전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는데….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어? 어디에 갇혀 있는 거야? 그 사이 다친 건 아니지? 흐흑….”
점차 빨라지고 격해지던 앨리스의 질문은 말미에는 흐느낌으로 끝났다.
팔을 붙잡고 어쩔 줄 몰라하는 앨리스의 모습에 시우는 침음을 삼켰다.
하긴 로지의 잔혹함과 가학성을 직접 눈으로 보고 온 터이다.
심지어 앨리스는 그 학대를 직접 겪었던 피해자.
그런 악녀이자 탕녀의 발밑에 연인이 잡혀들어갔으니 그 속이 속이겠는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으면서도 최대한 티 내지 않고 묵혀왔음이 분명했다.
시우였어도 날마다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확실히 스승님의 소유로 되어있는 모양이에요.”
“그, 그게 무슨 의민데?”
“다른 마녀를 대하던 것처럼 험악하게는 굴지는 못하는 눈치였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또 사흘 뒤엔 또 만나기로 했으니 그때는 상황을 제대로 살피고 꼭 구해 올게요.”
이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설명해주었다.
얼마 뒤 위치보드 리벤지 매치로 대여권을 따올 예정이라는 것도 확실히 했다.
“그래, 그렇구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연인이 악녀의 손에 잡혀 고통받을지도 모르는 와중 저 혼자 평온한 생활을 보낸다는 죄책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속에 괴로워하던 앨리스에겐 이런 불확실한 기약마저 적잖은 위안이 된 모양이었다.
“나, 나는…. 널 헤치려고 했었는데…. 너는….”
“어려울 땐 다 돕는 거죠. 나중에 제가 곤경에 빠지면 도와주세요.”
앨리스는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시우와의 인연은 앨리스 삼인방이 그의 뒤통수를 쳐 팔아치우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우는 빚을 받아내야 한다는 뻔한 명목하에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는 앨리스를 보호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제 한 몸도 어려운 처지에서 마냐와 말리샤마저 구출해주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중간에 앨리스가 첩자 노릇을 하려 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건 이해득실을 벗어난 호의.
단순히 재화로 따질 수 없는 값진 은혜였다.
이를 바탕으로 앨리스가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였다.
“호,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 듣지 말고…. 하나만 말해도 될까?”
“네네, 그럼요.”
양 소매로 눈물을 주섬주섬 훔치며 고개를 드는 앨리스.
사랑.
사랑이 아니고서야 이런 타산 없는 호의는 존재할 수 없다.
즉, 시우는 앨리스를 보고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하다.
“너도 알겠지만 난 마냐와 말리샤와 사랑하는 사이야.”
만약 과거였다면 불쾌감만을 느꼈겠지.
퓨어 레즈비언인 앨리스가 남성에게 받는 연모의 마음은 게이에게 고백받는 일반 남성의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앨리스는 시우에게 불쾌감을 느끼는가?
놀랍게도 전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무사히 돌아가면 두 사람을 잘 설득해 볼게.”
“예?”
그럴 듯한 선물과 달콤하기만 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제 안위와 목숨을 건 구애.
그 뜨거운 구애는 성적 취향의 성벽마저 뛰어넘는다.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 마냐와 말리샤는 견습마녀 때부터 함께 지내오던 사이라 네 마음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냉담하게 대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네 양해를 구하고 싶어.”
“뭔 양해요?”
“정말 염치없는 말이지만 너와 교제하게 되어서도 마냐와 말리샤도 지금과 같은 관계로 지내고 싶다는 말이야.”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시우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하고 있는 것도 앨리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비쳤다.
속내가 들킨 청년의 수줍고 멋쩍은 표정으로.
“너 나한테 반했잖아.”
“…….”
“물론 네 마음을 볼모로 잡고 이용하겠다는 건 마녀명에 맹세코 절대 아니야. 오히려 이런 뜨거운 구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심장이 떨려.”
앨리스의 말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껏 겪어온 바 그렇게 수완 좋은 여자가 아니다.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도 있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누구의 강요도 없이.”
일전엔 치욕을 머금고 시우 앞에 알몸으로 섰던 그녀가 이제는 기꺼이 옷자락을 풀려 하고 있다.
“비록 로지 그 미친년 때문에 흉물스럽게 변한 몸이지만…. 넌 사실 이런 쪽 취향이지?”
“저기요 앨리스 님….”
진작에 알아먹고 중간에 잘랐어야 했다.
몸을 벌떡 몸을 일으켜 옷을 훌러덩훌러덩 벗으려는 앨리스를 만류하려 했지만….
“…….”
앨리스는 무언가 착각한 것인지 눈을 감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꾹 감고 있는 속눈썹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여기서 눈 딱 감고 키스를 갈기면 그 뒤로는 흐뭇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정력제 겸 흥분제를 복용하고 린네랑 제대로 된 마무리도 못한 채 두들겨 맞기만 한 마당에 잠시나마 미혹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눈앞의 여자는 그 어떤 현세의 미녀와도 비교가 무색한 마녀였으니 말이다.
“앨리스 님? 저기 앨리스 님. 눈 좀 떠주세요.”
시우는 박수를 짝짝 쳐 주의를 환기했다.
어리둥절해하던 앨리스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진동을 멈춘다.
“아, 맞아. 관계는 금지였지? 미안 내가 마음이 조급해서 깜빡했다. 그럼…. 입으로라도 해줄까? 이불 안에서 웅크리고 하면 소리도 안 샐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응응, 괜찮아. 정말로 사양할 것 없어. 내가 고마워서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네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내 말에도 진정성이 생길 테니까.”
원래 마녀들이 이래서 좀 대하기 어렵다.
자기 생각에 한번 꽂히면 도무지 남의 말을 들을 기색이 없는 마이페이스들이니.
“무슨 일이건 시켜만 줘. 네 취향에 전부 맞출게.”
더군다나 대다수의 마녀는 남성이 두 발 달린 상시 발정기 유인원쯤으로 생각한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나하나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녔으니 얼마나 남자들의 찬양을 받고 살아왔겠는가?
유혹하려면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저절로 유혹되는 상대.
그것이 대다수의 마녀가 남자에게 지니는 인식이고, 이런 인식은 자연스레 남자 마녀인 시우에게도 연결된다.
그러니까 유혹에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최고의 보답은 제 몸을 탐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앨리스 님, 저는 그런 걸 원한 게 아닙니다.”
“그래…? 아! 역시 조금 저항해야 네 취향인가? 싫은 기색도 좀 보이고? 지금부터 하면 될까?”
이게 또 그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해서 곧이곧대로 먹혀들지 않는 게 제일 난감하다.
앨리스가 지금 하는 저 엉뚱한 생각처럼 말이다.
너무도 예상대로의 반응에 아무튼 안 그래도 쌓여있던 피로감이 쭈욱 올라간다.
“그러니까요….”
시우가 피로에 찌든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앨리스에게 차분히 설명을 이어가고.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못하는 앨리스가 솔직하지 못한 짝사랑남을 위해 못 이긴 척 고개를 끄덕일 무렵.
“의사, 날 속였구나.”
예빈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린네와 독대 중이었다.
“할복해라.”
"힉!"
그것도 술에 잔뜩 취한 린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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