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81화 (681/917)

#681

1.

게임에 있어 하나의 절대적인 법칙이 있다.

승자가 존재하는 이상 패자 또한 반드시 존재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하고 장절했음은 중요치 않다.

로지는 승자였고 시우는 패자였다.

더는 승부를 뒤집을 건수가 남아있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온 결과에는 승복하는 수밖에.

“…원하는 게 뭔가요?”

그다지 큰 걱정은 없었다.

애초에 가벼운 내기 개념으로 시작된 게임이다.

로지가 시우에게 요구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무리한 행위를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에 하나 로지가 지나친 요구를 밀어붙인다 해도 판을 깨고 거절하면 그만이다.

이 경우 로지는 화를 낼 것이고, 마냐와 말리샤를 구출하기 위해선 조금 돌아가야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명목상 시우는 린네의 제자이다.

로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위치보드를 리셋했다.

“엄청 재미있었지만 아쉽네. 네가 선공이었다면 이겼을 거야.”

뜻밖에 로지는 시우에게 솔직한 찬사를 던졌다.

그게 마냥 승자의 여유가 아님은 알고 있다.

실로 로지의 말대로였다.

체스도 그렇고 바둑도 그렇듯 본디 모든 턴제 게임은 별도의 밸런스 조치가 없는 한 선공이 유리하다.

위치보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입체적인 보드 구조의 특성과 ‘룬’이라는 변수가 존재하기에 여타 보드 게임만큼 압도적인 차이가 나진 않지만 통계상 승률로 보면 0.2% 정도 선공이 유리하다.

만약 시우가 선공을 잡고 루프에 들어갔다면 마력이 먼저 부족해지는 건 로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일격 이후 시우가 패배했던 방식과 같은 수순을 밟았겠지.

결국 그녀가 아주아주 미세한 차이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선공의 유리함에 힘 입은 것이다.

“내 부탁은 말이야. 내 부탁을 두 개로 늘려줘.”

“그런 건 안됩니다.”

“왜? 부탁 들어준다며.”

“초등학생도 아니고, 제대로 하세요.”

“열 내긴.”

진지하게 말한 건 아니었는지 낄낄 웃는 로지였지만 슬그머니 불안하긴 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예측 불허의 로지가 어떤 부탁을 해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은근한 스트레스였다.

특히 안에 갇힌 마녀를 괴롭히는데 동참하라는 부탁이거나 한다면 모처럼 하루를 비운 게 시간 낭비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좋아, 진지하게 결정했어.”

꿀꺽 침을 삼킨 시우.

“내일도 나랑 한 판 붙자. 오케이?”

이어진 로지의 요구는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문제없는 조건이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널널해서 의아한 조건이다.

이런 것쯤이야 굳이 내기의 대가로 넣지 않고 권해보는 게 보통 아닌가?

“…진짜 그게 답니까?”

“이만큼 재밌게 게임한 건 처음이라서. 게다가 찜찜하게 이기고 판돈을 가져가는 건 내 긍지가 용납 못 하지.”

혹시 호구를 꾀기 위한 전략?

실제로 로지는 게임을 봐주면서까지 시우가 ‘내기’라는 카드를 꺼내 들게 유도했다.

이대로 그냥 도망치면 더 털어낼 게 없을 것 같으니까 개평을 주며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억측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전판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던 게임이었다.

다음에도 반드시 로지가 이기리란 보장이 없다.

정말 순수하게 한 판 더 붙는 것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린네와 다른 의미로 짐작할 수 없는 기이한 마녀다.

“뭐, 저야 좋습니다.”

시우에겐 나쁠 게 없었다.

선공이니 후공이니 할 것 없이 패배한 게임에서 대가를 징수당하지 않은 것도 이득이고.

다시 마냐와 말리샤를 상품으로 노려볼 수 있다는 것도 이득이다.

“복기나 하고 갈래?”

“그건 시간이 너무 늦어서 힘들 것 같네요.”

“그건 그러네.”

한 판에 거의 8시간을 할애한 까닭에 두 판을 할 시간도, 힘도 없다.

고작해야 게임에 머리가 이리도 후끈거릴 수 있다니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로지는 놀이방을 벗어나 저택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어지간히도 시우가 마음에 든 것인지 히죽거리는 입가에서 호감이 뚝뚝 떨어진다.

시우는 전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위치보드에서 펼쳤던 교전만으론 최악으로 치달았던 그녀의 인상을 희석하기에 부족했다.

모녀를 잡아다 고문하는 걸 즐기는 사이코가 게임 좀 잘한다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비정상적인 잣대이지.

“오늘 하루 즐거웠습니다.”

“아. 깜빡했다.”

시우가 뒤돌아서자마자 들려오는 로지의 탄식.

설마 괴팍한 성격답게 이제 와서 요구를 바꾸려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내일이랑 모레는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사흘 뒤에 봐야겠는걸?”

위치보드를 할 때는 그렇게나 팽팽 돌아가던 머리가 현실로 돌아오면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처럼 변한다.

딱히 문제 될 건 없는 일이었다.

“상관은 없습니다.”

“응, 편지 보낼 테니까 맞춰서 와.”

용무는 정말 그걸로 끝이었다.

팔을 휘휘 휘둘러 인사하는 로지를 뒤로 하고 향월루로 향했다.

2.

로지의 저택과 향월루는 정말 가까웠다.

느긋하게 걷기 시작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향월루로 이어진 죽림에 발을 들일 수 있었으니.

“하아….”

어째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겁다.

그도 그럴게.

로지의 저택을 방문 허가받기 위해 생떼 반 어거지 반을 써가며 빠져나온 탓이다.

인맥을 넓혀두고 싶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말리샤와 마냐도 맛보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도 같이 댔으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린네가 허락해준 게 신기해질 정도다.

짚이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잡혀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온종일 두드려 맞기 바빴지만 그 뒤로 린네와 지내며 느낀 것이 있다.

“의외로 널널하단 말이지.”

린네는 생각보다 사제관계를 중시하며, 그 탓인지 시우에게 대단히 관대하다.

임시로나마 그녀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많은 편의를 봐주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자.

아무리 감시책을 붙이고 싶었다 해도 엄청난 금액의 앨리스를 선물해주었다.

망나니 그 자체를 연기하는 신시우를 떫은 시선으로 보긴 하지만 대부분의 억지를 수용해준다.

처음엔 시우의 존재 자체를  ‘강해지기 위한 도구’라고 인식하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고려해도 시우를 대하는 린네의 태도는 이례적이다.

수개월 전부터 잡혀 와있던 예빈과 비교해본다면 한층 쉽게 알 수 있었다.

몸을 바쳐서라도 시우의 마력 증폭을 유도하려는 점이나 대련만 하면 뼈가 부서지도록 두들겨 패는 점은 특이하지만, 결국 제아무리 유별나다 소문난 린네라도 마녀 사회의 사제관을 완벽히 벗어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었지만 말이다.

“벌써 도착했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덧 향월루 입구에 닿았다.

돌아왔다는 인사를 올리기 위해 린네의 방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린네가 얼마나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볼지 떠올리니 기대감마저 들었다.

어쩐지 신기록 세우기 같은 느낌이 있단 말이지.

“다녀왔습니다, 스승님.”

하얀 장지문에 서린 그림자로 그녀가 방안에서 정좌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사를 건넸음에도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린네.

“…….”

그 주접을 떨고 나갔으니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걸까?

인사를 하면 으레 답해주는 목소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물러나 보겠습니다.”

한참 대답을 기다렸던 시우가 돌아서려는 순간.

린네의 답변이 마침내 돌아왔다.

“다실로 가라.”

“예?”

“다실에서 대기해라.”

잘못 들었던 게 아니었다.

놀라면서 반문했던 이유는 두 사람에게 다실의 용도가 하나로 정해져 있던 까닭이다.

하루 대련 일정이 끝나면 온천에서 간단히 몸을 씻고 다실에 입장.

린네 내어준 말차를 한 잔 마시고 뒤로 섹스.

여기서 차만 마셨던 건 딱 두 번밖에 없다.

즉, 이 시간대에 린네가 시우를 다실로 보낸다면 그다음에 이어질 일도 자연스레 유추가 가능하다.

“…네.”

혼란 가득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실로 향했다.

살짝 얼이 빠질 만큼 의외였던 감상은 다실로 이어진 호젓한 징검돌을 밟는 순간 긴장으로 색채를 바꾼다.

“뭐지?”

린네는 분명 어제 도로시와 관계를 지니던 시우의 모습을 보았다.

젖소처럼 울부짖던 도로시와 난폭하게 날뛰며 도로시를 타던 시우의 언행까지 들었다.

인형처럼 무감정해 보이는 린네가 실상은 은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이미 확인된 일.

어제 연출한 쇼 정도라면 그녀를 잠시 주춤하게나 의욕을 아예 꺾어버리는 것까지 가능하리라 보았다.

오늘 아침 문안을 드렸을 때도 상종도 하기 싫다는 시선을 보내오지 않았던가?

고작 몇 시간 만에 그 불쾌감을 극복해냈다는 건 믿기 어렵다.

“…일 났네.”

다실에 들어서 문을 닫고 앉아있자니 스멀스멀 곰팡이 같은 불안함이 피어난다.

그렇다면 뭘까.

뭐가 어떻게 된 것일까.

가장 합당한 추측은 린네가 시우가 한사코 지키려던 비밀을 간파했다는 것.

즉, 뒤가 아니라 앞에 싸기만 하면 굳이 취향의 충족없이 마력 증폭이 일어남을 알아차렸다는 경우다.

어쩌면 린네를 너무 띄엄띄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양 볼에 각기 ‘무방비’ ‘허술’이라는 단어를 써 붙인듯한 로지 알루조차 머리 회전이 이루 말할 필요 없는 수준인데 린네라고 다를까?

한숨을 쉬고 싶은 걸 참고 바르게 앉았다.

곧장 뒤따라온 린네의 인기척이 느껴진 까닭이다.

-달칵

“마셔라.”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시우의 옆에 작은 병 3개가 놓인다.

묘한 분홍빛이 도는 묘약은 아마도 예빈이 만들어 놓은 정력제일 터.

린네의 손이 허리께로 향한다.

차를 대접하지도 않고 별다른 말도 없다.

목적성이 뚜렷한 그 행동이 시우에겐 확신의 증거로만 보였다.

리본처럼 쉽게 풀려나간 허릿대와 훌러덩 벗겨지는 옷자락.

은은한 달빛과 조명 아래 드러나는 건 린네의 나신.

그런데 이제 팬티스타킹을 곁들인.

“…….”

팬티스타킹이라니.

그것도 살결이 은은하게 비치는 20데니아 검정 스타킹이라니.

그것도 일본 전통 의복 말고 다른 옷을 걸치는 걸 본 적도 없는 린네의 팬티스타킹이라니.

시우는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읊조렸다.

눈치 못 챘네.

“준비해라.”

그렇다.

린네는 전혀 눈치 못 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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