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
1.
어느덧 재떨이 위로 수북이 쌓인 꽁초.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은 채 핏발이 선 눈으로 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시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집중과 사고는 대량의 산소를 소모한다.
어느새 턱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이 거슬린다.
로지를 상대로 무난한 장기전을 간다면 뒤집을 수 없으리란 걸 파악.
상호 간 마력원 최적화가 끝나기 전, 세 박자 빠른 난전을 유도했다.
마침 중앙에 배치된 룬의 개수도 많았던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만약 중요도가 떨어지는 룬이 배치되어 있었거나, 숫자가 적었더라면 로지는 중앙 장악을 배제하고 최적화를 마무리하려 들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바꿔말하면 로지가 응하지 않고서야 반드시 손해를 보는 적절한 타이밍에 싸움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필연적으로 중구난방의 교전이 펼쳐지게 되고 로지가 ‘실수’를 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로지가 실수를 저질렀느냐, 라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이 미친년이 단 한 차례도 미끄러지는 일 없이 게임을 이어나가고 있다.
“…….”
로지는 묵묵히 다음 수를 두었다.
통상 보드 게임은 후반으로 갈수록 선택과 판단의 가짓수가 줄어든다.
그러나 모든 ‘점’이 ‘선’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선’이 룬과 결합하여 마법으로 변모하는 위치보드의 유기성은 그런 상식을 뒤집는다.
중반부로 갈수록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게임인 것이다.
물론 로지는 이에 대한 방비를 지니고 있었다.
경우의 수를 따짐에 있어 정말 하나하나를 수십 수 앞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슈퍼컴퓨터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무리다.
따라서 로지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계산 공식을 만들었다.
따지고 보자면 카드카운팅과 비슷하다.
많은 카드 게임에서 사용되는 카운팅은 모든 카드를 기억하고 계산하는 게 아니다.
범주화 및 간략화한 도식을 바탕으로 겹치는 계산은 일괄로, 불필요한 계산은 제거한 채 진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적화된 그녀의 알고리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자성마법이나 다름없었다.
수십 억의 상금이 딸린 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술자리 여흥 정도로 생각하는 위치보드에서 이런 반칙을 장착하고 있다면 승리를 가져가는 건 당연한 일인 와중에….
신시우는 여전히 빈틈을 내보이지 않고 있다.
게임이 중반에 이르렀음에도 초반의 격차로부터 조금의 진척도 없다.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요치 않다.
그가 노리는 게 뭔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신시우의 착수는 교묘했다.
로지가 어떤 방식으로 수를 두는지 미리 알고 있는 듯한 전략이다.
단지 난전을 유도하는 게 아니다.
매번 계산하기 까다로운 장소에 수를 놓는다.
말하자면 겹치는 계산이 없는, 생략할 수 없는, 전제를 다시 짜야 하는 공간만을 파고드는 것이다.
즉, 지금 그가 노리고 있는 건 게임의 승리가 아닌 현상유지.
한편 로지에게 어마어마한 계산부담을 떠넘기며 발을 헛디디길 기다리고 있었다.
파훼법이라면 있다.
굳이 맞불을 놓을 필요 없이 전투가 아닌 정비를 위주로 게임을 풀어간다면 로지에게 전가되는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
허나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전력 발휘한 로지의 기량을 받아줄 수 있는 상대는 오직 신시우 뿐이다.
이제 와서 도망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극한까지 집중된 의식과 사고.
뇌내 신경 다발을 말단까지 혹사하는 무리한 계산.
그리고 처음 만나본 흥미진진한 상대에 대한 흥분이 조합된 결과.
로지의 코끝에 후끈한 기운이 맴돌더니 코피가 흐른다.
“후릅….”
혀로 입술 위를 길게 핥으며 그것을 핥아내는 로지와.
그런 로지의 기행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게임에 몰두하는 시우.
중반전에서도 중반.
본디 가장 치열한 전투가 돼야 했을 국면이다.
두 사람 정도의 실력자라면 진작 마포의 포화가 전장을 수놓아야 했고, 그를 대비한 방어막이 전개되며.
숨 돌릴 틈 없이 공수를 주고받아야 할 터였다.
그러나 초일류와 초일류 사이에 펼쳐지는 대결.
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밀착한 채 펼쳐지는 교전은 겉보기의 화려함이 없었다.
만일 제3자가 이를 관전하고 있더라도 지루함에 하품이나 했을 것이다.
이제껏 두 사람은 한 번의 마포조차 발사하지 않고 룬을 선점하는 데만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허나 극한에 도달한 심리전과 계산전을 알아볼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에 땀을 쥔 채 이 경기를 지켜볼 것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위치보드라는 게임을 유희를 벗어난 영역까지 승화하고 있었다.
“…….”
“…….”
여태 보드 위를 벗어나지 않던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친다.
그리고 동시에 게임이 또 다른 페이즈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린다.
-탁!
시우의 한 수와 함께 은밀히 감춰져 있던 마력 포대가 셋이 일제히 고개를 들이민다.
노리는 건 로지의 마력원.
-탁!
로지가 미리 깔아두었던 포석이 연결되며 디스펠 핀이 포대 셋의 허리를 자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동력을 전달받게 된 마력의 창이 첨단을 빛낸다.
-탁!
이번엔 시우의 포석에서 날아든 디스펠 핀이 창을 부러뜨리며 외부 확장을 위한 트리거를 빛낸다.
잠잠했던 보드 중앙에 폭풍이 일어난다.
통상적으로 한 경기에 한 번을 보는 것도 힘든 디스펠 핀이 빼곡한 창날처럼 교차 난무했다.
심지어 평범한 디스펠 핀이 아니다.
상대의 수를 훼방 놓음과 동시에 별도의 트리거 기능을 하는 일거양득의 수.
이렇듯 마치 합을 짜놓은 것처럼 빗발치는 디스펠 핀의 격돌은 보드 위에 산산이 부서진 마법의 잔해를 한가득 쌓는다.
둘 중 하나라도 실수한다면 그대로 승기가 넘어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이 게임을 전쟁으로 비유하자면 두 사람은 물자 보급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히기 전에 전면전에 돌입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 덕에 양자의 마력원에 쌓여있던 마력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다.
허나 멈출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먼저 발을 빼는 쪽이 손해를 입는 치킨 레이스의 시작.
두 사람이 채택할 전술은 하나로 강요된다.
위치보드의 용어를 빌리자면 ‘데스페라도’.
손해가 확정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도 최대한의 손실을 주는 전술이다.
격렬한 디스펠의 연속 먼저 마력이 바닥난 쪽은 최초로 난장판을 일으킨 신시우다.
-탁!
하지만 시우는 이 상황까지 안배해 두고 있었다.
마력원 하나를 스스로 궤멸시킨다.
이렇게하면 대량의 마력을 가불받을 수 있다.
뒤가 없는 전술이었다.
위치보드는 자신의 마력원은 지키고, 상대의 마력원은 파괴하는 게임.
즉, 마력원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시해야 할 리소스다.
더군다나 마력원이 파괴된 그 시점부터 상대보다 정면 화력이 떨어지는 건 자명한 수순.
그러나 상관없다.
“…….”
무아지경에 빠져 수를 반복하던 로지가 수를 멈춘다.
많고 많은 게임을 거쳐왔던 그녀도 몇 번 본 적 없는 수법인 까닭이다.
잠시 고민하던 로지였으나 시우의 예상대로 그녀 역시 제 마력원을 파괴하며 일시적인 자원으로 삼았다.
앞서 말했듯 시우와 로지는 중앙에 과도할 만큼의 전력을 투입했다.
먼저 발을 빼는 사람이 피를 봐야 하는 이상 시우의 무모한 투자에 어울려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후의 양상은 똑같았다.
실수 없이 디스펠 핀을 주고받으며 이어지는 교전과 중앙에 수북히 쌓여가는 마법식의 잔해.
다시 점차 고갈되는 마력.
수많은 선택지와 경우의 수가 존재하는 위치보드가 루프에 들어섰다.
하나의 마력원을 통해 가불받은 마력도 동났다.
시우는 두 번째 마력원마저 해제해 마력으로 삼았다.
아까와 달리 로지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자신의 마력원을 따라 해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루프는 정착되었다.
첨예한 힘겨루기 속 순환 고리를 먼저 빠져나가는 쪽이 패배.
그런 와중 먼저 마력원을 소진한 것도, 해제한 것도 시우다.
먼저 마력이 달리게 될 사람 역시 시우일 터.
하지만 위치보드에 주어진 마력원은 단 세 개.
더 해제할 마력원은 남아있지 않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순간.
시우 진영에 너부러졌던 마법식의 잔해가 일제히 빛난다.
디스펠 핀에 의해 무력화되었던 마력 포대 혹은 방어막의 찌꺼기들.
그 너덜너덜한 잔해가 단 한 수로 포대를 만들어 낸다.
사실 제대로 된 포대라고 보기엔 어렵다.
간신히 마력원을 부술 수 있는 허접한 화력과 한번 쏘고 나면 부서질 엉성한 구조일 뿐이다.
통상 전투였다면 행동력과 마력을 낭비하기나 할 뿐 아무런 쓸모가 없었겠지.
이 포대가 승패에 직접 영향을 끼치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하다.
남은 마력원이 하나일 것.
상대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것.
그리고 로지의 남은 마력원은 단 하나.
더군다나 방금 시우를 따라 마력원을 해제하느라 가장 커다란 빈틈이 드러난 상태.
모든 요건이 충족되었다.
믿고 있던 것이다.
판 전체를 읽을 줄 아는 로지라면 반드시 시우를 따라 마력원을 해제해 줄 것임을.
부숴야 할 표적을 단 하나로 줄여줄 것임을.
이것이 바로 판짜기.
상대로 하여금 악수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설계하고 선택지의 범위를 줄인 이후 마지막 한 수로 게임을 뒤집는다.
그에 대한 로지의 반응은….
“응,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
입꼬리 끝까지 만개한 웃음이었다.
-탁!
로지의 응수와 함께 그녀 앞에 쌓여있던 잔해가 들썩인다.
고철더미를 쌓아 만들어 놓은 양 조잡한 방패가 유일하게 남은 마력원 앞을 가로막는다.
시우가 판을 짜는데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은근슬쩍 은폐해 놨던 안배.
이 역시 통상적인 마포를 막아내기엔 너무도 허접한 방패이다.
기껏해야 졸속으로 만든 견제용 마포를 막아내는 일회용 방패 수준일 것이다.
그렇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간파하지 못했다.
-파츠츠츠츠!
눈호강 그 자체였던 게임을 끝낸 건 조잡한 마포와 조잡한 방패의 격돌이었다.
마포는 무너졌고, 방패는 산산이 조각났다.
루프를 벗어난 최후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남은 건 다시 루프에 빠져 마력원의 마력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 반복하는 것뿐.
이제 변수는 없다.
더 게임을 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로지는 선공의 이점으로 만들어낸 미세한 격차를 유지했고.
시우는 그 격차를 좁히거나 뛰어넘지 못했다.
“와, 진짜 재밌네. 아, 코피 코피.”
그걸 아는 로지는 더 이상 위치보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품 안에서 손수건을 빼더니 ‘팽!’ 하고 코 안에 고인 피를 푸는 로지.
벌겋게 변한 코를 훌쩍이던 로지가 충격적인 패배에 망연자실한 시우에게 웃음을 내비친다.
“자, 그럼 뭘 요구해볼까?”
게임에 몰두하느라 아직 정해지지 않았던 판돈을 정산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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