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79화 (679/917)

#679

1.

굶주린 승냥이와 진배없는 기회주의자로 가득한 공적 사회.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얄팍함으로 따지자면 기름종이 수준으로만 보이는 로지 알루도 그 틈바구니에서 170년을 넘게 살아온 공적인 것이다.

느닷없는 신시우의 방문 그 자체만으로 로지는 많은 진실을 도출했고, 가설을 세웠다.

위치보드를 겨루고 싶어 찾아왔다니 너무도 빤히 보여서 도리어 다른 속임수가 있는 건 아닐지 의심되는 핑계였다.

얄팍한 기만으로 위장된 본 목적을 유추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마냐와 말리샤겠지.

정황상 유력했다.

그는 앨리스를 시종으로 삼기 위해 사갔고, 앨리스는 마냐와 말리샤의 맏언니 같은 역할을 자처했던 여자다.

남녀 간 까마득한 권력 격차가 생긴다면 그 사이에 성상납이 오가는 건 계곡 바위에 물이끼가 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이치다.

가뜩이나 태생이 아름다운 마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데 엉큼한 마음을 품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게 몇 번 맨살을 맞대다 보면 속정도 떡정도 무르익기 마련.

앨리스가 신시우를 잘 구워삶았다면, 린네의 비공식적 ‘제자’라는 입지를 이용해 자신의 옛 연인을 구출해달라는 부탁을 베갯머리에서 속삭이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다.

‘아아아, 한심하기도 해라.’

논리적 판단이라기보단 빼어난 직관에 기대어 사태를 파악한 로지는 두 가지 의미에서 실소를 머금었다.

하나는 린네의 제자라는 입지를 정말 뭐라도 되는 양 행세하는 신시우의 태도 탓이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허세를 떨어댔을 그에 보이는 비웃음이다.

뭐,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어차피 심심하던 차이고 남자 마녀에게도 관심이 있다.

같이 재밌는 위치보드를 하며 은근슬쩍 원하는 걸 받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가 위치보드의 묘한 집착을 보이는 순간 로지는 그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한 도구까지 파악에 성공했다.

위치보드를 활용한 내기.

첫 판은 어디까지나 유흥의 영역이나 이 판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이대로는 심심하다느니, 뭔가를 걸고 게임을 하자느니 말을 꺼낼 것이 분명하다.

판돈은 필경 마냐와 말리샤의 대여권이 되겠지.

로지에겐 되레 반가운 일이었다.

내기 종목으로 내세운 것이 하필 위치보드임이 재차 실소를 자아낼 따름이다.

신시우는 로지를 그저 위치보드에 환장한 마녀라고 생각하고 왔을 테지만….

단언컨대 그건 최악의 악수였다.

로지는 이제껏 자신이 이기고자 했던 게임에서 져 본 기억이 없다.

자폐증에 가까울 정도로 빠져든 것은 끝까지 파헤치는 로지는 다른 마녀에겐 놀이에 불과한 위치보드를 극한까지 공략하고 있었다.

흔히들 난수 알고리즘에 의해 배치된다고 생각하는 룬의 배치 패턴조차 모조리 꿰고 있을 정도이다.

자신이 사냥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대만큼 낚아 먹기 좋은 사냥감이 없다.

놈이 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내기에 응할 수 있도록 아무런 판돈이 걸리지 않은 모의게임은 져 주자.

‘만약 내기에서 이기면 무엇을 요구할까?’

벌써 그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최근엔 뭘 해도 시들시들하게 반응하는 마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거다.

그에게 피나를 범했다는 말을 하게 한 뒤 마마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다분한 헌신과 희생을 통해 지키려던 견습마녀가 해방 며칠을 앞두고 남자에게 범해져 그릇이 더럽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마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을 뒤집고 분노를 하는 마마에게 사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놀려댄다면 어떻게 태도를 뒤집어 비굴하게 굴지도 주요 관전 포인트다.

아랫도리가 후끈해지는 행복한 망상에 젖었던 로지는 첫 대전으로부터 약 30분 후, 자신의 평가를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요놈 봐라?’

신시우는 과연 자신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본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않은 로지였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마녀는 벌써 나가떨어졌겠지.

이제 슬슬 자연스럽게 패배해 주려고 했는데….

하지만 자꾸만 게임이 길어진다.

로지가 끝낼 타이밍을 몇 번이나 보여줬음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주의를 돌리며 승기를 잡지 않았다.

로지는 웃었다.

이만한 실력자가 이만한 판세를 읽지 못할 리가.

신시우는 로지와 한 판을 접대하여 내기를 이끌어내자는,

완벽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 당돌함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로지이나 결과만 놓고 보자면 달라지는 건 없다.

로지는 기꺼이 그의 내기를 받아들인 것이다.

2.

“…….”

“…….”

각자의 입에 물린 타들어 가는 담배의 끝은 폭탄의 도화선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말리샤와 마냐’ 그리고 로지의 ‘부탁’을 판돈으로 시작된 2차전.

50수가량 주고받았을 무렵.

시우는 낭패감에 젖어 있었다.

당했다.

이미 대단한 솜씨였기에 미처 상대가 여력을 남겨두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마안이라는 치트를 원 없이 활용한다면 다음 경기는 쉽사리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전판 로지는 시우와 마찬가지로 전혀 전력을 다해 임하지 않았다.

그 증거로 2차전이 시작된 순간 아이가 공을 가지고 노는 듯했던 중구난방의 플레이 스타일이 모든 변수와 가능성을 고려하는 완벽주의자의 것으로 돌변했다.

룬을 점거하기 위해 매달리는 공세는 노도처럼 매서운 와중, 역습을 취하려 들면 곧장 문을 걸어 잠그고 국지적인 굳히기에 들어간다.

아주 조금의 손해도 내주지 않는 철두철미함.

지뢰처럼 산발적으로 흩뿌려둔 디스펠 핀의 사전준비를 완성 전 단계부터 예측해 절묘하게 피해 간다.

잠깐만 빈틈을 보여도 피 냄새를 맡은 피라냐 떼처럼 파고든다.

공방일체의 초고성능 AI와 겨루는 기분이다.

단 한 차례의 허수가 없다.

그녀가 매턴 두는 것은 한 수에 불과했지만, 그 한 수는 마치 모든 변수와 확률을 미리 고려하듯 신중하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중반전이 아닌 후반전까지 이어진 보드가 비치고 있을 것이다.

“후우….”

그러나 승부는 여전히 팽팽하다.

로지가 힘을 숨기고 있던 사실이 상정 외였다 하여 시우가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시우의 마안은 정상 작동 중이었으며 심심풀이로 암기했던 기보집 역시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다.

온갖 복잡한 계산을 콤마 초 만에 소화해야 하는 마법 전투에 비하면 수백 장 규모의 기보집을 떠올리는 건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하다.

기억 속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유불리를 교차 검증한다.

앞으로 흘러갈 게임의 판도를 예견하며 아직 시행되지 않은 로지의 노림수를 짐작한다.

시우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중앙을 점유하기 위한 싸움터를 바라보았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위치보드에서도 중앙을 차지하는 건 중요하다.

이곳에 마력 포대를 구축한다면 가까운 거리에서 적의 마력원에 급습이 가능하다.

반대로 이곳에 단단한 방어체계를 마련한다면 적은 중앙을 우회해서 공격할 수밖에 없기에 장기적인 비효율을 강요할 수 있다.

따라서 초반전이 마력원 주위의 룬을 점거하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자원을 확보하는 단계라면, 중반전은 이 요충지를 다투는 페이즈라고 봐도 무방하다.

“…….”

생각한다.

아직 초반전이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중앙에 발을 딛기엔 피차 시기상조인 느낌이 강하다.

그러나 또한 생각한다.

플레이 스타일은 가면을 바꾸듯 바꿀 수 있다.

허나 그 저변에 깔린 기풍(碁風)마저 완전히 변조하는 건 불가능하다.

기풍엔 비단 방법론 뿐 아니라 승리를 대하는 사상이 녹아들어 가기 때문이다.

첫번째 대국으로 미루어 볼 때 로지의 기풍은 정석적인 스노우볼링 양상을 띠었다.

과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차근차근 제 할 일을 하고, 상대의 할 일은 방해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이득을 챙겨온다.

누군가 보기에 승부 전체에 0.001%도 기여하지 않는 이득이라도 좋다.

그렇게 따낸 반의반 수 정도의 이득을 굴려 반수의 격차를 만든다.

또 그렇게 따낸 반수의 이득을 굴려 한 수의 격차를 만든다.

이걸 게임 내내 실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가 여기에 있다.

만약 로지가 함정을 파거나 큰 그림을 그리는 타입이었다면.

소위 승부사 기질의 플레이어였다면 마안 앞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꼼꼼히 은폐했다 한들 황금빛 마안 앞에선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니.

하지만 거창한 한 방 없이 작은 실속을 챙기는 걸 우선시하는 상대로는 마안의 효력이 반감된다.

만약 이대로 초반 국면이 무난히 넘어가고 피차 준비 만반인 상태에서 중앙에서 격돌한다면,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미 선후공의 유불리에서 미세한 격차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대로 무난하게 흘러간다면 종국엔 머리카락 굵기의 틈새가 거대한 크레바스가 되어 있으리라.

그렇다면 절대로 무난한 게임을 해선 안 된다.

위치보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임이 아니라 상대가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게임이다.

이것이 시우의 승리철학을 관통하는 문장이었다.

-탁!

로지는 안정적인 싸움을 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판단한 시우는 예정보다 세 호흡 빠르게 중앙에 수를 던졌다.

이 앞에 펼쳐진 교전 양상은 처절한 개싸움이 될 것이다.

서로 충분한 베이스가 마련되지 않은 바 마력원을 쥐어짜다시피 활용해야 할 것이며, 교전의 사용한 마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회수하느냐에 사활이 갈리게 될 테지.

로지의 기풍이 수류탄 파편처럼 날뛰는 국지전의 연속에서도 발휘될 수 있을지.

그건 지금부터 시험해보면 될 일이다.

“…쓰읍.”

슬슬 초반전을 마무리 하려던 때.

로지의 예상보다 세 호흡 정도 빠르게 진출하는 그의 행마는 눈에 이채가 돌게 하기 충분했다.

게임 시작부터 이어지던 로지의 감상이 이 과감한 결단 앞에 한마디 말로 정리된다.

‘이 새끼 뭐지?’

로지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쓰라린 연기에 머리가 핑 돌며 달아오르던 사고에 한 줄기 휴식을 선사한다.

로지는 자신의 착수, 상대의 착수 한 번이 오갈 때마다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다.

약 50수 앞까지는 기본적으로 앞서 따져 보는 것이다.

아무리 애들 장난 같은 마법이 오가는 위치보드라 해도, 이 같은 소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마녀이면서 위치보드에 우스울 정도로 진심을 다한 로지의 기력(碁力)이 한낱 놀이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로지에게 초반전의 마무리 쯤까지 게임이 진행되었다면, 보통 승리를 확신해도 좋을 시기였다.

상대는 ‘아주 조금 불리하네? 나중에 뒤집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겠지만, 그 격차는 후반전이 갈 때까지 결단코 좁혀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신시우는 여태껏 상대해왔던 상대와 달랐다.

선공의 이점을 살려 이득을 보아두었거늘 그 이후엔 아무리 수를 거듭해도 공굴리기가 되지 않는다.

그건 그가 로지와의 격차를 인지했으며 경계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개미 더듬이만도 못한 미세한 격차를 말이다.

적어도 이 위치보드에서 로지는 항상 ‘최선의 수’만을 둔다.

격차가 벌려지지 않는다는 의미는 반대로 신시우 역시 ‘최선의 수’만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로지는 등골에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신시우는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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