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78화 (678/917)

#678

1.

이쯤에서 다시 짚어보는 위치보드의 규칙.

1) 주어진 보드에서 하나의 모서리는 하나의 ‘패스’를 의미하며, 꼭짓점에는 마법식을 그리는데 필수적인 ‘룬’이 수정구 내의 난수 알고리즘에 의해 랜덤하게 배치된다.

2) 패스와 룬만으로는 마법을 완성할 수 없다. 따라서 각 플레이어에게는 3개의 ‘마력원(魔力源)’이 주어지며 이것을 원하는 자리에 배치하며 게임을 시작한다.

3) 이후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면 플레이어는 바둑을 두는 것처럼 번갈아 수를 이행해 꼭짓점의 룬과 모서리의 패스를 활용해 마법을 만들어낸다.

4) 만들어낸 마법으로 상대방의 마력원을 공격, 혹은 상대의 공격을 방어한다.

5) 상대의 마력원 3개를 먼저 탈취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측이 승리.

디아나를 놀아주기 위해 기보를 들추봤던 가락이 있는 만큼 예전 감각을 다시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우의 계산 능력과 마법적 사고력은 대마녀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며, 이는 위치보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연인들과 가끔 심심풀이로 해본 결과 아멜리아를 제외하면 대부분 시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따라서 로지와의 대결에도 나름의 자신이 있었다.

위치보드 내기로 마냐와 말리샤를 따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괜한 만용은 아니라는 의미다.

“와, 진짜 제법인데?”

어느덧 중반에 접어든 게임.

로지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 유심히 보드를 살폈다.

로지는 가장 정석적인 플레이 방식으로 게임에 임했고, 평소 기이한 전술을 즐겨 구사하는 시우도 근본에 가까운 전술을 채택했다.

적당한 넓이로 펼쳐 놓은 마력원, 마법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주요 룬을 선점하기 위한 소규모 난투, 만들어진 마법으로 센터를 점거하기 위해 펼쳐지는 대규모 회전(會戰)이 몇번이고 반복되며 파악한 사실.

로지의 실력은 확실했다.

디아나도 제법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플레이 타임에서 오는 격차가 있는 것이겠지.

훨씬 빈틈이 없고 능수능란하다.

고인물답게 생각지도 못했던 묘수나 꼼수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깜짝 전략에서는 전략적 원숙함이 배어 나온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유불리 양상은 시우 55 로지 45.

아주 미세한 차이로 시우가 앞서고 있다.

이는 전반적으로 시우가 치트를 사용하기 있기 때문이었다.

위치보드도 그 본질을 되짚자면 결국엔 마법 전투.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마안의 성능은 맵핵에 필적한다.

상대의 노림수는 물론이거니와 머리로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도 육안으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로지는 마안을 유감없이 활용하는 시우를 상대로도 거의 반반의 게임을 이어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져 줄 생각이다.

도박판에서 호구를 꾀듯 가능한 아슬아슬한 역전승을 연출하여 내기에 동참하게 할 심산.

솔직히 그녀의 ‘콜렉션’을 보고 난 뒤에는 게임은커녕 마주 보고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자신의 쾌락과 흥미를 위해 타인을 좋을 대로 희생하고, 또 거기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모습에서 기인한 생리적인 혐오감 탓이다.

어쩌면 너무 타성에 젖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로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뭔가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숨 쉬듯 내뿜는 악의와 비틀린 도덕관념.

원래 이런 게 스트레오 타입의 공적 아니던가.

“로지님.”

“응? 왜?”

그래도 대화의 물꼬를 텄다.

로지보다 두어 수는 뒤처지는 디아나조차 복기 단계에서 시우의 접대 보드를 눈치챘다.

그보다 몇 수나 위인 로지에게 자연스레 접대 게임을 하려면 주의를 산만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콜렉션 말인데요.”

“왜? 이제 와서 마마를 거절했던 게 아쉬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뭐든 물어봐.”

“나머지 두 방에 있는 것도 마녀인가요?”

시우는 로지의 등 뒤로 보이는 2개의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마마, 마냐 말리샤, 피나 이렇게 네 명이 내 수집품이야.”

예상대로 마냐와 말리샤도 저 안에 있었다.

앨리스가 팔려온 뒤 일주일 정도 지난 셈인데 검은 마녀를 보고나니 무슨 흉악한 짓거리를 당했을지 괜히 걱정됐다.

“엄밀히 따지면 마냐와 말리샤는 콜렉션은 아니지만.”

“네?”

“내가 대신 맡아서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이지 소유권은 린네에게 있거든. 일전에 앨리스랑 세트로 팔았어.”

앨리스의 입으로 직접 들었기에 알고 있던 정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내기 상품으로 적합하다고 여겼다.

못해도 수십억대는 호가할 마녀의 소유권을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여권만 받아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는 잘 지내? 많이 귀여워 해줬는데. 듣기로는 네가 린네에게 졸라서 사 달랬다며?”

“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하하!”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로지.

남자라면 잘 웃는 여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라지만, 그녀의 본색을 알게 된 시점부터 이 미친년이 또 왜 이래? 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왜 그러세요?”

“웃기잖아. 마냐랑 말리샤를 지키겠다는 둥 엄청 열심히 봉사하는 척하더니 정작 혼자 빠져나오니 잘 지내는 모양이네.”

“…….”

“이래서 여자들 우정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자, 네 차례야.”

보드를 내려본다.

각기 점거한 룬이 슬슬 일정한 마법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종전이 가까워지고 있다.

서로 격렬한 소모와 다툼 없이 일보전진 일보후퇴를 반복했던 만큼 대규모 난전이 예상된다.

실수를 가장한 봐주기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이었다.

“아, 이건 안 궁금해?”

“네?”

“마마가 어떻게 마마가 되었는지.”

사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눈을 돌리며 언급하지 않던 부분이었다.

앞서 말했듯 아마도 ‘마마’를 구출할 여력까진 없을 것이다.

운이 좋고 상황이 잘 풀린다면 몰라도 그만한 오지랖을 솔선하기엔 애석하게도 사정이 넉넉지 않다.

또한 로지가 떠벌떠벌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문제다.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을 내색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원래 마마는 ‘흑색의 마녀’였어. 17위계, 견습마녀랑 같이 구매했는데 걔 이름이 피나야. 저기 마마랑 반대편 방에 있어.”

시우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듣고 싶지 않은 자랑을 시작한 로지.

마마와 로지의 대화에서 ‘인질’이 잡혀있다는 것.

마마와 인질의 애틋한 관계가 사제 관계라는 것.

이 정도는 얼추 예상 내였다.

“마마가 원래는 엄청 거칠고 말도 잘 안 들었어. 광견병 걸린 라쿤도 아니고 막 이로 물어뜯으려고 했다니까? 그래서 잡아 온 지 3일 차에 계약을 했어.”

“그렇군요.”

“마마 역할을 잘하고 내 말을 잘 들어준다면 피나에게는 손대지 않기로. 그렇게 10년만 보내면 둘 다 풀어주기로.”

“…….”

본래라면 적당히 대화를 끊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눈이 3번째 방에 쏠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순간 쌍둥이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위치보드로 옮겨지던 손이 우뚝 멎는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끓는 타르처럼 걸쭉한 감정이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흘러들어 가고, 아까부터 간신히 억누르던 메스꺼움이 재차 역류하는 느낌.

“약속은 지켰나요?”

“어떨 것 같아?”

만약 로지가 태연하게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안 지켰지’라고 말하며 웃는다면 그대로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는 위험한 충동이 전율을 일으켰다.

정적을 즐기듯 말을 멈추었던 로지는 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나는 약속은 꼭 지키거든. 그 뒤에 피나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어. 뭐, 마마는 내가 말해도 좀처럼 믿어주지 않더라고. 하긴 서로 못 만나게 했으니까 별수 없나?”

“기한은 얼마나 남은 건가요?”

“음, 한 달 정도? 시간 정말 빠르네.”

“그때는 풀어 주실 건가요?”

로지는 눈을 끔뻑이며 무슨 당연할 걸 묻느냐는 듯 황당해했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그래야지. 마마는 약속을 잘 지켜줬는걸.”

자식을 볼모 삼아 어머니를 능욕하는 건 괜찮고 약속을 어기는 건 안된다?

어디서부터 비틀린 사람인지 당최 알 수 없다.

그래도 시우는 마음 한구석으로 안도를 느꼈다.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으나, 약속이 지켜진다면 굳이 시우가 무리해 손을 쓸 필요는 없겠지.

“내가 이겼네.”

“그렇네요, 뭘 해도 뒤집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추가로 50여 수를 주고받으니 드디어 첫 번째 게임이 끝났다.

각기 내실을 다지던 안정적인 초반전.

적당한 소모와 공방을 다투던 중반전.

지금까지 모아왔던 마법을 한 번에 맞부딪치는 후반전.

위치보드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정석적인 한판이었다.

시우는 실로 근소한 차이로 승부를 내어주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전까지 봤던 로지의 솜씨라면 한결 쉽게 역전하리라 예상했는데....

주고받던 대화가 그녀의 주의력을 앗아간 걸까?

날카로움이 한껏 무뎌지는 바람에 마지막에 마지막이 되어서야 간신히 로지에게 승리를 안겨줄 수 있었다.

“재밌다. 이런 명승부는 오랜만이야. 너 좀 치는구나? 질 뻔했잖아.”

“저도 이만큼 하시는 분은 처음 뵙는 거라 즐거운데요?”

보드를 리셋하는 중 시우가 툭 던진 밑밥에 로지가 관심을 보인다.

“그래? 그럼 한 판 더 할까?”

“좋죠, 그런데 음…. 저희 이렇게 하지 말고 내기는 어때요?”

“내기?”

“원래 승부에는 판돈이 좀 실리는 편이 재밌잖아요? 그렇다고 너무 무거운 건 말고 간단한 내기요.”

“난 좋아.”

진지한 내기가 아닌 어디까지나 친구 사이에 가벼운 술 내기 정도라는 느낌으로 말을 꺼내두었다.

로지는 낚싯바늘까지 삼킬 기세로 미끼를 물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뭔데?”

가장 좋은 건 지금부터 마냐와 말리샤를 빼돌려 두는 것이겠지만, 꼭 그게 아니어도 괜찮다.

가령 도로시가 마법식을 전달받아 차원이동식만 완성할 수 있다면, 딱 반나절만 둘을 빌리는 조건이라도 탈출 계획엔 지장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둔 채 입을 열었다.

“마냐와 말리샤를 향월루로 데려가 시종으로 삼고 싶습니다.”

“아하,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구나?”

본래는 조금 무거운 조건을 걸고 점차점차 낮은 공을 던질 생각이었는데.

로지는 단박에 사정을 알겠다는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아닙니….”

“에이 굳이 숨길 필요 없어. 딱 보니까 앨리스가 잘 구워삶았나 보네.”

과연 그런 식으로 상황이 이해가 된 건가?

덕분에 변명할 수고는 덜었다.

“뭐,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요.”

한동안 시우를 빤히 바라보던 로지가 답한다.

“뭐,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하기도 난감한 콜렉션이었으니까. 그 정도야 뭐.”

구구절절한 이유를 묻거나 판돈을 낮추려는 시도도 없이 수긍한 로지.

좀 전의 승리가 그녀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모양이다.

“로지 님은 원하시는 게 있나요?”

“당장은 팍! 이거다 떠오르는 게 없는데? 게임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봐도 될까? 이상한 억지 부리려는 건 아니야. 적당한 걸로 부탁할게.”

“…뭐, 좋습니다.”

애초에 시우가 상당히 억지를 부리고 들어간데다가 교섭의 결과가 상당히 좋다.

판이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로지의 요구는 나중에 듣기로 했다.

설령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게임에서 이기면 그만이다.

“시작해볼까?”

새로운 마력원 3개씩을 각각 점한 시우와 로지.

마냐와 말리샤의 명운을 건 2차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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