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
1.
예로부터 동양의 문화는 신비와 사치의 상징이었다.
전승자 대부분이 서구문화권에 걸쳐있는 마녀인 만큼 그러한 인식은 마녀에게도 이어진다.
부유한 마녀의 저택을 방문해보면 동양화가 한 폭씩은 벽면을 장식하고 자기 그릇을 따로 보관하는 ‘차이나룸’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고즈넉한 운치와 풍경을 자랑하는 향월루의 다실은 특별하고 신비로운 경험을 하기 적격인 장소였다.
과시하는 듯한 화려함이 아닌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미의식.
잠시 세속에서 멀어져 한적함 속 풍성함을 깨닫는 별세계.
겉보기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적이고 심원한 예술성까지.
이런 신비로운 다실이 있다면 누구든 차를 얻어 마시고 싶어질 테지만,
구태여 향월루의 다실까지 발을 들이는 마녀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원체 인연을 트고 있는 마녀가 적은 데다가 공적과 추방자를 가리지 않고 린네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자가 많은 까닭이다.
세간의 인식으로 검의 마녀는 어딘가 꽂히면 끝장을 봐야 하는 독종 중의 독종이었으며, 강함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수차례나 티페레트 공작에게 도전한 별종 중의 별종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헥센나흐트로 거처를 옮긴 이후 시우 외엔 발을 들인 사람이 없던 다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무릎을 꿇은 린네 앞에 간만의 손님이 있다.
헥센나흐트의 등장 이후 눈덩이처럼 세력을 불려 가는 솔리두스 상단의 주인이자 온건파의 핵심인사.
금화의 마녀 ‘리디아 마그누스’다.
기모노를 입고 꽤 예스러운 머리형태를 고수한 린네와 세련된 드레스를 입은 리디아가 다실에 나란히 마주 앉은 모습은 문화 교류회 같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좋은 향이네요.”
가벼운 찬사에도 린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저어 앞에 내어놓았다.
제 이명처럼 화려한 금발금안을 지닌 그녀는 린네를 따라 무릎을 꿇은 채 찻잔을 받았다.
가볍게 찻잔을 돌려 예를 표하고 세 번에 걸쳐 마시는 것까지.
세세한 부분에서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흠잡을 곳 없는 깔끔한 예절이었다.
“훌륭한 맛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제 입맛엔 떫네요.”
리디아가 솔직 담백한 혹평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자 린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지?”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소문을 듣고 나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그렇게 말한 리디아는 린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의중을 헤아리듯, 혹은 가치를 평가하듯 꿰뚫는 시선에도 린네의 무표정한 가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리디아도 겨우 이 정도로 검의 마녀를 간파할 수 있으리라 보지 않았다.
사방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기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 아닌가?
“남자 마녀를 제자로 들였다죠?”
“그렇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인하는 린네의 모습에 리디아의 눈매가 좁아진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죠?”
“나의 전리품이다.”
“확실히 그렇죠. 하지만 그를 데려오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티페레트 공작을 끌어들이기 위함인 건 잊지 않으셨죠?”
“…….”
“미끼를 제자로 삼다니 역시 이상하잖아요.”
헥센나흐트의 등장은 마녀 역사의 크나큰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전환점엔 언제나 다양한 파벌과 사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케테르 공작이 움직일 수 없다는 예언기관의 계시가 확정된 이후,
헥센나흐트 등장 초창기는 많은 공적에게 고취심과 야망을 안겨주었다.
그 간의 핍박과 설움, 자유를 제한하던 절대자가 사라졌다.
반년 남짓한 짧은 시간 만에 게헨나 전력에 필적하는 공적과 추방자가 한 도시에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되갚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케테르의 그늘에 숨어 세계의 질서를 쥐락펴락했던 게헨나의 마녀들에게.
마녀의 본분을 잊고 상생(相生) 따위의 안일한 사상에 젖어 동족을 핍박하던 그들에게 시대가 바뀌었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헥센나흐트 초기는 패권에 대한 소망과 전쟁에 대한 갈망으로 들끓었다.
클리포트의 잔당을 주위로 뭉친 매파이자 급진파가 도시의 정책을 주도했음은 자연한 수순이었다.
그들은 헥센나흐트를 거점으로 삼고 세계 곳곳의 위치포인트를 습격했다.
전쟁 준비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티페레트 공작의 구축할 계획을 세웠다.
속삭임의 마녀와 검의 마녀가 투입된 ‘토끼 사냥’도 그 격변의 시기 속에 발의되었던 계획이었다.
티페레트 공작을 죽이는 걸 제1안으로 삼는다.
결착이 불가능할 시 그 제자를 미끼로 공작을 헥센나흐트로 끌어들인다.
아무리 공작이 강할지라도 도시의 마녀를 모두 홀로 감당할 순 없다.
분노에 눈이 뒤집혀 제자를 구출하러 달려온 공작은 수백 명의 마녀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터였으나….
“일전과는 사정이 변했어요.”
사정이 변했다.
점점 많은 추방자가 헥센나흐트에 들어서고, 점점 체계적인 시스템이 자리 잡게 되면서 공적의 도시는 자연히 번영의 순풍을 타게 되었다.
게헨나에 속하지 못했던 마녀들에게 주어진 풍요.
집적된 편의시설과 유흥시설, 체계적인 규율 속 보장받는 안전은 해방의 흥분에 도취됐던 마녀를 진정시키기 충분했다.
투쟁심으로 범람하던 가슴 속에 스며든 미혹은….
‘굳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 패권을 양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아직 충분한 준비가 덜 되었지 않나?’
따위의 온건하며 다소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평화와 풍요는 감정적인 분노 대신 현실적인 안정을 선택하게 한 것이었다.
그 결과 솔리두스 상단을 위시로 온건파의 세력이 새로이 부상하며 작금의 헥센나흐트의 명운은 온건파와 급진파의 팽팽한 대립 위에 놓이게 되었다.
급진파는 티페레트 공작을 제거하는 것으로 위치포인트의 구심점이 사라지고, 강적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효과를 기대했고.
반대로 온건파는 섣불리 행동하는 것으로 평화가 깨어지며 도리어 게헨나 측 마녀의 공분을 살 가능성을 조망했다.
이처럼 전쟁의 개시를 알릴 ‘토끼 사냥’ 역시 명확한 기약 없이 보류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 티페레트 공작의 제자이자 미끼인 ‘신시우’에게 눈길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상대 진영의 의사에 관계없이 상황을 제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급진파가 그를 난도질한 뒤 그것이 헥센나흐트 전체의 의사인 양 포장해 티페레트 공작을 유인한다면 그대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온건파 입장에선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한다.
그런 와중 아무런 입장도 표방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린네가 덜컥 그를 제자로 삼았다니.
급진파에게도 온건파에게도 혼란스러운 선택인 것이었다.
아무런 문답 없이 길게도 흐르는 침묵.
리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칼자루를 쥔 건 린네 쪽이다.
말을 아끼고 유리한 협상을 이끌려고 해봐야 무의미할 것이다.
“좋아요, 원하는 바를 말할게요. 신시우를 저희 솔리두스 상단에 넘겨주세요.”
“거절한다.”
“사례는 넉넉히 하겠어요. 우선….”
“거절한다고 했다.”
리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제자 영입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가능성.
“…반대쪽에서도 같은 제안을 하던가요?”
“…….”
바로 급진파 쪽에서 리디아와 같은 제안을 했을 경우.
냉정히 말해 린네는 아주 현명한 선택을 했다.
파벌 싸움으로 혼란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사를 스리슬쩍 빼돌려 둠으로써 양측 모두에게 최고의 양보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섰다.
다소 억지스럽긴 해도 신시우를 ‘제자’로 들이며 단순히 미끼일 때보다 훨씬 큰 대가를 지급해야만 그의 신병을 양도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다.
“뭘 원하나요?”
“아무것도.”
이렇게 협상의 의지를 전혀 비치지 않으며 더욱 많은 양보를 유도하고 있다.
리디아는 혀 위에 꺼끌꺼끌한 감정이 도는 것을 느꼈다.
“솔직하게 말하겠어요. 솔리두스 상단에서 에렐림 공작 측과 비밀스러운 접선에 성공했어요.”
“…….”
“신시우의 신병을 양도해준다면 게헨나와 헥센나흐트 간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추진해 준다더군요. 꼭 그게 아니더라도 에렐림 공작은 마녀 간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 눈치에요.”
“…….”
“솔리두스 상단이 이끈 협상으로 타협안이 체결된다면 저와 상단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지겠죠. 그때가 되어도 저는 당신의 협력을 잊지 않을 거에요.”
솔리두스 상단에 소속된 대마녀의 수만 두 자릿수다.
힘으로 찍어누른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진해 검의 마녀와 생사를 다투려 들진 않으리라.
또한 온건파를 자처하는 솔리두스가 헥센나흐트에서 규율을 거스르는 일을 벌인다면 명분이 너무도 약해진다.
“나는 이미 답했다.”
“…….”
“거절한다, 라고.”
린네는 그것까지 고려하며 판돈을 올리고 있는 것이겠지.
분하지만 실로 찬사가 나오는 깔끔한 일처리였다.
“후, 좋아요. 오늘은 이쯤 할게요. 다음에 찾아올 땐 더 나은 보상안과 찾아오라는 의미로 알아듣죠.”
배웅도 없이 홀로 다실을 나온 리디아는 으득 이를 물었다.
힘으로 억지로 할 수도, 기책을 세워 기만할 수도 없는 상대다.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는 명분이.
하늘하늘한 드레스 자락이 차디찬 겨울 바람에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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