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
1.
거사를 치른 다음 날.
도로시는 약속된 이틀을 채우지 않은 채 빠르게 저택을 나섰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이렇게 힘들 걸 이틀 연속은 못한다’, ‘사업상 처리해야 할 업무가 밀려있으니 그걸 끝내고 다시 오겠다’ 였으나 실상은 다르다.
시우와 도로시가 합심하여 만들어 낸 감시의 공백으로 충분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생겼고, 그간 상의한 내용을 처리하기 위해 먼저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 어떤 대화가 오갔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선, 잠시 지난밤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죽을래?”
시우가 덮어준 이불 아래서 눈을 뜬 도로시.
잇새로 으드득 소리가 살벌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시간을 벌었어요. 의심도 떨쳐낼 수 있었고요. 모두 도로시 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 화가 풀릴 것 같아?”
역시 다소 강압적으로 민망한 꼴을 보이고 말았던 만큼 쉽게 화가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이렇게까지 할 생각만만이었으면서! 심지어 체취도 안 마셨잖니?”
한층 더 납짝 엎드려 아부해댔다.
“그렇지 않습니다.”
“또또, 거짓말을~”
“도로시 님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계획 이상으로 흥분한 것 같아요.”
같잖은 거짓말은 질렸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던 도로시의 눈가가 슬쩍 느슨해진다.
“잘 아시겠지만, 누님껜 약간 남자를 미치게 하는 요소가 너무 많잖아요.”
“흐음~ 그래?”
“네네, 가슴도 이렇게나 위대하시고…. 그냥 몸 자체가 약간 주체를 못하게 만들어요. 물론 미모는 말할 것도 없고요.”
“더해 봐.”
“그뿐이겠습니까? 성녀를 연상시키는 청순하고 농염한 눈웃음. 그런 도로시 님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능감에 취해 자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 피식 웃으며 꽁트를 찍는 두 사람.
“요고요고, 말만 번지르르~ 해 가지고.”
“아악!”
도로시는 시우의 뺨을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꼬집고 흔들었다.
입가에 실린 미소는 귀여우니 봐준다고 말하는 듯하다.
“뭐, 일단 속아줄게. 거짓말에 까다롭게 집착하지 않는 게 불륜녀의 미덕인걸.”
“속아주다뇨, 제가 거짓말한 것 같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어진 탈출 계획에 대한 대화.
“아까도 말했지만 나라고 곧장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야.”
“도로시 님은 이 도시에서도 꽤 배분이 높지 않은가요?”
“그렇긴~한데, 헥센나흐트 사업에서는 손을 뗀 지 꽤 됐거든. 발언권도 없고, 시민권 하나 들고 있는 게 고작이야. 너 하나라도 간당간당 한데 다른 사람까지 챙기기엔 손이 너무 많이 가지.”
“그렇게 힘든 건가요?”
“응, 엄~청.”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게 아니다.
가령 시우가 노예이던 시절 22 위계 마녀의 호의를 받았고 탈출까지 도움을 받았다면 게헨나를 탈출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가정을 한다면 그 정도는 아주 간단한 일인 것이다.
“게헨나와 비교하면 안 돼.”
시우의 의문을 간파한 듯 도로시가 먼저 말했다.
“헥센나흐트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도시야. 게다가 그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무법자들이잖아?”
“그렇죠.”
“천방지축의 마녀를 다루려면 규율이 까다로워야 해. 그중에서도 문에 대한 감시는 그 어느 곳보다도 깐깐하지. 게헨나가 공항 입국장 정도라면 여긴 교도소 급. 게다가 넌 어디를 가나 시선을 집중시킬 테니까.”
한마디로 도로시가 전부 해결해주는 낙관적인 기대는 버리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그건 포기하겠습니다. 도로시 님께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전가하는 것도 그렇고요.”
이 와중에 시우뿐 아니라, 예빈, 앨리스 및 두 사람의 탈출까지 도와달라 말하는 건 욕심이다.
따라서 빠르게 다음 논제로 넘어갔다.
시우가 차원이동식을 만들어 탈출한다는 제2안이다.
안 그래도 그걸 위해 린네와 함께 디그니티 타운의 ‘문’을 관측하러 갔던 것인데,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온갖 트러블에 휘말린 까닭에 거의 살펴보지 못한 것이다.
다시 거기까지 가는 핑계를 만드는 것도 문제고.
설령 어찌저찌 문을 관측할 장소까지 도달한다 해도 오늘 같은 일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다.
적어도 시우가 헥센나흐트에서 트러블 없이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듯하니….
그런 점에서 도시를 활보하고 다닐 수 있는 도로시가 대신 정보를 수집해 준다면 일이 편해진다.
“그거라면 도와줄 순 있어. 하지만 시간이 조~금은 걸릴 거야. 나는 너처럼 특별한 눈이 없는걸.”
위의 문제와 결부된 문제였다.
도로시가 말했듯 헥센나흐트의 출입국 규율은 까다롭다.
‘문’의 구조 역시 게헨나처럼 누구나 관찰할 수 있는 오픈 소스가 아니다.
정보를 악용한다면 백도어의 구축이나 밀입국에 악용될 소지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 명의 마녀가 문의 핵심 파트를 도맡아 따로따로 관리하고 있지.”
“문제네요….”
“아냐, 도와줄 수 있다고 했잖아.”
“정말요?”
“마침 얼추 안면이 있는 마녀고, 연구 목적으로 살피고 싶다고 말한 다음에 적당~히 사례하면 충분히 보여줄걸? 대신 일주일 정도 시간이 필요해.”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막막했던 계획이 도로시의 조력이 붙자 제법 숨통이 트였다.
“아, 그리고…. 이것도 부탁해도 될까요?”
“부탁이 조~금 많은데? 일단 말해 봐. 들어보고.”
“다른 게 아니라…. 게헨나에서 절 걱정하실 분들이 많아서요. 제가 무사하다는 소식만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건 가능하다면 정도로만 생각해주세요.”
“게헨나 쪽엔 핫라인이 없는 걸?”
“르뤼에를 통해 접선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도로시는 기쁜 듯 웃음을 지었다.
별안간 따스함이 감도는 눈동자에도 호의가 듬뿍 묻어 나온다.
“그래? 우리 공주님도 시민권을 얻었구나? 힘 좀 써준 모양이네.”
여전히 조카를 열심히 챙기는 누님이었다.
“네, 지금쯤 아쿨라에서 시련에 몰두 중 일 테니까요. 찾아가실 수 있죠?”
“그럼~ 물론이지. 오랜만에 공주님 얼굴도 좀 보고 해야겠네.”
“엄청 좋아하겠네요.”
“그러네.”
씩씩하게 시련에 도전을 들어가긴 했지만, 지금쯤 늘어져서 ‘재미없도다!’라고 투덜거리고 있지 않을까?
도로시가 얼굴을 비춰준다면 방방 날뛰며 활짝 미소 지을 게 분명하다.
잠깐 흐뭇한 감정이 되었던 두 사람은 마저 대화를 정리했다.
“그나저나. 예빈, 앨리스, 마냐, 말리샤? 이 사람들은 누구야? 또 애인이야?”
“아, 그분들은요….”
시우의 말을 들은 도로시는 오묘한 표정이 되었다.
“요즘에도 열심히 호구 짓하고 다니는구나.”
“왜 그렇게 되는 겁니까.”
“치유의 마녀는 뭐 은혜를 갚는다 쳐도…. 뒤에 세 사람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 아냐?”
도로시가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광경이었다.
몰래 탈출하는 데 있어 인원수가 늘어난다는 게 얼마나 큰 리스크가 될지 이해 못 할 멍청한 남자는 아니다.
“돈 뜯어낼 거 있어서 그렇습니다.”
고작 빚 80억에 탈출 보수 플러스알파를 뽑아낸다 해도 본전도 나오지 않는 장사인 상황에서 저렇게 나온다는 건….
“여전~히 사람은 좋아 빠져서.”
“돈 때문이라니까요.”
그냥 호의를 베푸는 셈이다.
누군가는 주제도 모르는 삽질이라 욕하고, 같잖은 영웅심리라고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도로시는 아니었다.
그 주체 못하는 오지랖과 본인의 위기를 자초하는 어리숙함에 은혜를 입은 또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도로시였으니까.
“그럼, 침묵의 마녀에게서 마냐와 말리샤를 먼저 빼내고 싶다는 거지?”
“네, 아무래도 옆에 두고 있는 게 탈출 준비가 됐을 때 즉각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본래는 차원이동식을 완성하자마자 앨리스의 안내를 받아 마냐와 말리샤가 있는 곳으로 이동, 합류 후 탈출을 하려 했다.
그렇지만 어차피 도로시가 밖을 떠도는 일주일간 시간이 빈다.
미리미리 옆에 두는 편이 함께 탈출할 때 변수도 줄어드는 만큼, 빈 시간을 알차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혹시 침묵의 마녀에 관한 정보가 있을까요?”
도로시는 시우의 뺨을 쓱 쓰다듬었다.
아까까지 험하게 당한 데다가 이미 몇 번이나 가버린 나머지 조금 식어있던 도로시의 눈에 다시금 사랑스러운 온기가 넘쳤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당장 제 안위가 걸려있는 만큼 조금 구질구질하게 나와도 될 일이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저라도 탈출시켜주세요!’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겠지.
도로시가 시우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과거 수술을 집도해준 의사나, 인연이 없다시피 한 세 마녀를 구하기 위해 안전한 선택지를 버리고 위험부담을 끌어안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럴 여유가 안된다, 당장은 안전한 선택지를 고른 뒤 후사를 도모하겠다 등등 그럴싸한 핑계를 찾기도 쉽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무르고 굳이 타인을 위해 위험한 길을 택한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됨과 동시에, 하나하나 직접 돌봐줘야 할 것 같은 모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침묵의 마녀에 관한 정보라면 있어. 하지만 그 전에 말이야….”
“네.”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면 린네가 의심하지 않을까?”
도로시는 시우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수줍게 키스했다.
“아, 괜찮습니다. 다실 쪽으로 간 것 같으니…. 기척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문제없을 거에요. 그보다 좀 더 나눠야 할 문제가…”
이 무해함이.
상황이 바뀌어도 변함없는 상냥함이 좋다.
그러나 도로시는 공적이고 신시우는 게헨나의 각종 고위 마녀와 연인인 관계.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도로시가 그의 곁에 떳떳이 서 있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새삼 그것이 아쉽고, 아주 조금은 씁쓸하다.
그러니까 지금 정도라면 마음껏 응석을 부려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도로시는 시우의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읍! 뭐하시는 거에요?”
“얄미워서.”
피가 날 정도로 깨물린 까닭에 아랫입술을 부여잡고 얼떨떨하게 있는 시우.
예전이라면 경멸했을 얼빵한 표정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니 이래서 눈에 콩각지가 쓰인다는 말이 있나 보다.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도로시는 이불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그의 앞에 허리를 들고 엎드렸다.
아까 그의 물건을 받아들이던 자세 그대로였다.
“건방지게 굴었으니까 따~끔하게 혼내 달라는 거잖아?”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도로시의 유혹은….
아주 잘 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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