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
1.
“천하의 도로시를 턱 끝으로 부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자기 말 한마디면 검의 마녀와도 척을 져 줄 거라고 보는 천진난만한 란다 양 이잖아.
그런 철부지가 욕먹었다며 얼굴 시뻘게져서 돌아왔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음성 변조를 해도 곧장 알아먹을 도로시 특유의 늘어지는 말투.
그 느긋함 속에는 송곳 같은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 있었다.
가시 끝이 향하는 곳은 란다.
방금까지 시우에게 사과하라느니 엄포를 늘어놓으며 펄펄 날뛰던 파란 머리의 마녀다.
“예?”
어리버리타는 이등병처럼 변해버린 린다의 표정.
“그렇잖아? 아니야?”
뇌정지가 온 것처럼 한차례 눈을 끔뻑이던 란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금방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란다가 헛된 선택을 했거나, 멍청했던 건 아니다.
애초에 바보였다면 19 위계라는 불안전한 위계로 공적 사회에서 높은 권력을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 흉악한 공적에게 잡혀가 평생 돈이나 빨래질하는 노예쯤으로 전락했겠지.
그녀가 금화의 마녀의 오른팔이자 ‘솔리두스 상단’의 중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던 건 특유의 정치적 감각과 빠른 손익 계산 덕이다.
돈세탁 능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이권과 파벌에 적당히 발을 걸쳤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쪽이건 너무 깊게 발을 들이지 않고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것.
이렇게 하면 파벌에 상관없이 ‘건드리면 뒤탈 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도로시에게 막무가내로 부탁할 수 있던 것도.
상대가 검의 마녀임을 알면서도 강짜를 놓은 것도.
확고한 자신의 포지션을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헥센나흐트가 생긴 이후 금화의 마녀와 검의 마녀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관계.
검의 마녀가 강하게 나온다면 란다 뿐 아니라 솔리두스 상단 전체에 구실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의 요소를 고려해도 타당한 판단이었다.
먼저 도로시와의 친분.
도로시와는 뜨거운 밤을 보낸 적이 있던 사이.
게다가 몇 번이고 돈세탁 자문을 맡아주었으므로 사업적으로도 연결고리가 있다.
도로시는 앞으로도 란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이 부탁은 상당히 강압적인 부탁이었던 셈이다.
남자 마녀 뒤에 있는 사람이 검의 마녀인 것도 큰 문제는 없다.
도로시는 린네와 같은 22 위계.
독고다이의 노선을 걷는 린네와 다르게 여러모로 발언권이 강하다.
거기에 남자 마녀는 고작 남창에 불과하지 않은가?
모욕에 대한 정식적인 항의에 남창을 감싸고 돈다면 검의 마녀는 제 얼굴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목숨을 빼앗지 않는 선에서 따끔한 체벌을 가하는 정도면 린네도 응할 것이며, 도로시 역시 심판자 역할을 대신해주리라 자신했는데….
“도로시.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죠?”
이렇게 대놓고 뒤통수를 칠 줄이야.
“검의 마녀가 그렇게도 무섭나요? 나름 실력에 자신 있는 마녀라고 들었는데…. 옹졸함에 웃음이 나오네요.”
“그치만~ 린네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건 너잖니?”
그건 그렇다.
그편이 협조를 구하기 더 쉬우리라 생각했으니까.
“차라리 얘기할 걸 그랬네요. 이런 식으로 꼬리를 말고 도망칠 걸 알았다면.”
도로시의 조소에 란다는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당장 도로시를 골치 아프게 할 수십 가지 방법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다.
그저 손을 떼는 것만으로도 도로시는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나오고도 앞으로 저한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흐음~ 그건 곤란한데.”
턱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는 도로시.
진지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것일지 궁금할 정도로 말이다.
“애초에 말이야~ 소식이 너무 늦어. 나 사업 접고 있단다.”
“…네?”
“그리고 너, 너무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제야 이해가 가지 않았던 조각이 맞춰진 란다.
왜 한창 잘나가던 사업을, 전쟁으로 돈을 복사해도 모자랄 시기에 접는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지만,
도로시는 더는 어른의 사정으로 란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그토록 든든해 보였던 도로시.
성녀를 연상케 하는 자애로운 미소가 무거운 중압감을 선사한다.
“귀여우니까 봐줄게. 저~기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가버리렴.”
“…….”
어설픈 꾀에 제가 걸린 셈이 된 란다.
도로시의 축객령에 란다는 이곳에 찾아올 때보다 붉어진 얼굴로 주점을 나섰다.
2.
“누구 신진 모르겠습니다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린네를 의식해 최대한 격식을 맞춰 인사했다.
도로시의 적당한 어시스트가 아니었다면,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도로시라고 해. 구도의 마녀라고 불리고 있지. 편하게 도로시 누나~라고 불러도 좋아.”
“…신시우입니다.”
두 사람은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대화를 나눴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앞에 린네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고주망태 상태가 되어 제정신이 아니지만 일단 주의해서 나쁠 것 없다.
“…….”
시간이 흘러 취기가 몸을 장악한 것인지 비틀비틀 걷는 린네.
슬쩍 다리를 걸면 요란하게 넘어질 모양새에선 언제나 잘 벼려진 칼날 같던 날카로움이 없다.
당장 제 몸을 추스르기도 버거워 도로시에게 신경을 쓸 여력도 없어 보인다.
이대로 그녀를 습격한다면 제대로 반응할 수 있을까?
그 이후 한없이 문에 가까운 타운인 만큼 도로시의 시민권을 통해 함께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각하다.
앨리스와 두 마녀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 쳐도, 아직 향월루에 예빈이 있다.
또한 이 주변을 둘러싼 마녀를 죄다 적으로 돌리기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아무리 도로시가 조력으로 있더라도 말이다.
“두 사람 어떤 관계야?”
“사제관계입니다.”
“언제부터?”
“한 열흘 됐죠. 지금은 향월루에서 묵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린네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게끔 적당히 정보를 교환했다.
은빛 눈동자로 쓰윽 린네를 훑는 도로시.
“뭘 얼마나 먹였길래 저래?”
“칵테일 반 잔 정도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도로시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시우와 같은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으리라.
아무리 술이 처음이고 태생적으로 약하다 한들 영체는 영체다.
더군다나 린네는 22 위계로 자율방어가 충분히 활성화되어 있을 대마녀다.
그런 그녀가 알코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쾅!
그나마 주변에 다른 마녀가 있을 땐 정신을 다잡던 린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는 승강기에 탑승한 때부터는 긴장을 끈을 놓은 모양이다.
승강기 문에 그대로 머리를 박더니 쓰러졌다.
“…….”
그리고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다.
“얼씨구.”
“하아, 약봉투 좀 들어주실래요?”
시우는 도로시에게 정력제 자재를 맡기고 린네의 코밑에 손을 대었다.
설마 죽기까지야 했겠느냐만 워낙 임펙트 있게 넘어져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숨은 잘 쉬고 있다.
“어쩌게?”
“어쩌긴요, 업어야죠.”
“여전~히 물렁물렁하구나? 너 잡혀 온 거 아니었니?”
“안 마시겠다는 거 제가 맥인 거라 그냥 두기도 뭐해요.”
린네가 완전히 정신을 놓은 듯하자 편하게 말하기 시작한 도로시.
“잠깐만 와 봐. 그거 냅두고.”
“네?”
잠깐 몸을 일으키자 부드러운 감촉이 전신에 안겨온다.
엇 할 새도 없이 시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단히 허리를 끌어안은 도로시.
특유의 볼륨감이 빠져들듯 몸에 얽혀들었다.
“뭡니까?”
“현지처 대접이 야박한걸? 우리 그렇~게 뜨거웠잖아.”
“아무리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데….”
누구는 혹시라도 린네가 깨어나거나 이 대화를 엿듣지 않을까 가슴이 철렁하는데, 도로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느낌으로 시우를 벽에 밀쳤다.
“내 도움 필요 없어?”
“도움이야 당연히 필요하죠.”
“그러면 가만히 있어야지. 조용히 하지 않으면 깨어나 버릴걸?”
그러더니 쫀득한 입술을 밀어붙이다시피 시우의 입술에 포갠다.
매끈한 혀로 입술 사이를 비집고 여는 도로시.
10초간의 키스가 끝나고.
도로시의 입가엔 도락가 특유의 스릴을 즐기는 대담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아~ 이 느낌이 그리웠어.”
“…남 일이라고 아주 막 나가십니다.”
“뭐 어때? 잘 자고 있잖아.”
그 말대로 린네는 쓰러졌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잘 엎드려 있긴 하다만….
“조심할 건 조심해야죠.”
시우는 도로시의 손을 풀어내고 린네를 들쳐멨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귓전에서 색색 꽂혔다.
“린네가 이 지경인데 곧장 도망가겠다고 하지 않는 건…. 챙겨야 할 사람이 또 있는 거지? 설마 린네야?”
“그럴 리가요.”
“너는 엄~청 바람둥이니까. 그 새에 린네도 꼬신 건 아닌가 했지. 만약 그랬다면 르뤼에를 대신해서 따끔하게 혼내줬을 테지만.”
“…도로시 님 도움을 받으면 지금 도망칠 수는 있는 건가요?”
"당장은 힘들지. 너는 움직이기만 해도 이목이 집중될 테니까~ 나도 준비가 필요한걸?”
도로시가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진 미지수지만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그녀처럼 헥센나흐트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조력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린네를 업은 채 향월루에 도착.
도로시도 제집인 양 은근슬쩍 따라 들어왔다.
“스승님, 스승님.”
이불을 꺼내 깔고 린네를 위에 올린다.
가볍게 뺨을 두드리며 이름을 부르자 힘겹게 들어 올려지는 눈꺼풀.
“…….”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지 가만히 누운 채 시우를 바라본다.
여전히 또렷한 이성이 첨가되지 않은 눈빛이었다.
“많이 취하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이불 깔아 드릴 테니 쉬세요. 물 좀 떠올까요?”
“…필요 없다.”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잠깐.”
일어나려던 시우의 손목을 린네가 붙잡는다.
찔리는 게 워낙 많은지라 찔끔한 시우.
그렇게 말하더니 린네는 허리띠를 풀었다.
처음엔 그저 갑갑한가? 싶었다.
설마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저런 말을 할 줄 몰랐으니까.
“오늘만 엎드려서 받겠다.”
그러나 시우의 예상을 뒤로하고.
린네는 숙취 탓인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관계를 요구했다.
아무래도 시우의 등에 가려 도로시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듯싶었다.
심지어 여기까지 도로시가 함께 왔다는 것 조차 깡그리 잊어버렸고 말이다.
“잠시만요! 스승님!”
설마 린네의 의욕과 블랙아웃이 그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 못 했던 시우는 뒤늦게 린네를 만류했지만….
불행히도 린네가 도로시의 존재를 발견한 건 엎드린 채 팬티를 내렸을 무렵이었다.
“…….”
“…….”
황망한 표정으로 시우와 린네를 바라보는 도로시.
엉덩이만 발랑 깐 채 도로시를 바라보는 린네.
어리둥절한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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