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64화 (664/917)

#664

1.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도 몇 분이면 알게 되는 현대에 비해 마녀 사회는 여전히 소문이 늦은 편이다.

먼저 마녀 간 확실한 커뮤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

SNS니 기사니 온갖 방식으로 다양한 소식을 접할 수 있는 현세에 비해 마녀는 최신 기술을 배척하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소문이 전해지는 방식은 편지 혹은 입에서 입 정도로 과거의 방식을 선호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우와 헤어진 뒤 한적한 무인도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던 도로시는 열흘이 지난 뒤에야 그가 헥센나흐트에 잡혀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클리포트 중에서도 나름 입김이 센 도로시가 이토록 늦게 정보를 접했을 정도니, 게헨나 측에서는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으리라.

그동안 도로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업무에 치여살고 있었다.

비취색 바다가 보이는 우아한 집무실.

도로시는 전화기를 턱과 어깨로 받친 채 서류 더미를 펄럭이고 있었다.

“전량 매도해.”

[예? 이 가격에 계약을 체결하시겠다고요?]

“뭐 어때?”

[두 번만 거절해도 발당 2만 불은 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는 부하 마녀에게 도로시는 태연히 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수십년 전부터 핵잠을 취급했던 걸 보면 알겠지만 도로시의 사업은 규모가 남다르다.

당장 이 전화조차 그녀 소유의 통신위성으로 이뤄지는 암호통신이었다.

탁월한 직감과 철저한 계획의 사업가이며 한 푼도 허투루 손해를 본 적 없는 도로시인 만큼, 이번에 벌어진 전쟁을 잘만 이용한다면 단숨에 재산을 불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 속.

방금 전화 한 통으로 최소 천만 달러 정도의 손해를 봤다.

도로시가 아니라 르뤼에를 이 자리에 앉혀둬도 하지 않을 바보 같은 선택이었다.

“아아~ 귀찮아.”

전화기를 내려놓은 도로시는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서류를 내팽개쳤다.

“그냥 누가 인수해주면 안 되나?”

공방으로 돌아온 이후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이유는 전쟁 덕분에 사업이 분주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무기 중개업을 그만두고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손이 갈 곳이 워낙에 많아서 그랬지.

부하로 두고 있는 마녀들은 다들 미쳤느냐는 듯 도로시를 만류했지만, 그녀의 결정은 확고했다.

그간 멀쩡히 잘 해오던 사업을, 이런 최고의 성수기에 접는 이유.

도로시는 그저 변덕이라 얼버무렸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과 변명에 속아 넘어가기엔 너무 똑똑했다.

“우습기도 하지.”

그렇다면 이유는 뭘까?

과거 신시우가 무기 중개업에 대해 불만을 표했기 때문이다.

방을 치우지 않아 혼난 어린아이가 열심히 방을 청소하고 칭찬을 기대하는 것처럼.

언젠가 그와 재회하고 ‘나 사업 정리했어~’라는 말을 했을 때 그가 짓는 기쁜 표정을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헥센나흐트에 들어가 있던 투자금도 회수했다.

불과 몇 달 전 도로시가 봤으면 어이없어하며 혀를 찼을 법한 결정과 이유.

“순진한 처녀 같긴.”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2.

분주히 하루하루를 보내던 도로시는 보고를 하던 부하 마녀로부터 깜짝 놀랄 만한 소문을 접했다.

신시우가 헥센나흐트에 잡혀갔다는 소식이었다.

투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근사한 저택과 작위는 받지 못했으나 도로시가 클리포트의 중역이었음은 변함이 없다.

시민권을 들고 곧장 헥센나흐트로 향해 추가적인 소문을 귀동냥했다.

다행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이미 관심이 한 꺼풀 꺾인 게헨나에 비해, 헥센나흐트는 남자 마녀의 이야기로 북적거렸으니 말이다.

이에 남자 마녀와 검의 마녀는 연인 관계다.

경매장에서 서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다, 사제 관계다.

남자 마녀 측이 검의 마녀를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다, 사제이자 연인 관계다.

밖에서는 사제이지만 안에서는 음탕한 밀회를 즐기는 것이 분명하다 등등 무성한 추측과 소문이 난무했다.

그 중 자극적인 조미료가 팍팍 쳐진 가십거리는 거르고 사실만을 조합하자면.

검의 마녀에 의해 포획되었다는 건 사실.

어찌 된 영문인지 포로나 노예 대우가 아니라 태연하게 함께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

향월루에서 함께 머무는 것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게 대체 뭔 조합이야….”

다른 건 몰라도 한가지 확실한 점은 있었다.

일단 그가 자의로 헥센나흐트에 머무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도로시가 아는 한 신시우는 이 도시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다.

침대에서 빼고는 순둥순둥한 순둥이가 좋다고 공적들 사이에서 뒹굴고 있을 리 없지.

그에게는 빚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를 구출해 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럴 때 갚지 않으면 언제 갚겠는가?

“일단~ 두고 봐야겠네.”

하지만 도로시는 섣부르게 그와 접촉하지 않았다.

세간에선 린네를 그저 검에 미친 검귀 정도로만 판단한다.

검의 마녀와 어느 정도 교류가 있던 도로시인 만큼 그녀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린네는 겉보기와 달리 의심이 많고 눈치가 빠르다.

갑자기 도로시가 접근한다면 한껏 경계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할지 고민할 무렵.

“도로시 님!”

얼굴이 시뻘게진 채 도로시를 찾아온 청발의 마녀는 ‘돌풍의 마녀’.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도로시는 머릿속 그녀에 관한 정보를 주르륵 나열했다.

본명 란다 실피드.

위계는 19 위계.

대마녀도 아니고 위계도 낮지만 ‘금화의 마녀’가 이끄는 ‘솔리두스 상단’의 핵심 인사다.

한창 사업을 활발히 하던 도로시도 몇 차례 신세를 진 적이 있다.

더불어 꽤 옛날이지만 술에 취해 침대에서 몇 번 뒹군 적도 있는 것 같다.

“란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니?”

“마침 잘됐어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부탁?”

“혼내주고 싶은 괘씸한 놈이 있어요.”

말로는 부탁이니 뭐니해도 반쯤은 당연히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

위계로 따지자면 도로시보다도 한참 낮은 배분이면서도 말이다.

고작 19 위계에 불과한 란다가 스스럼없이 도로시에게 ‘부탁’을 해올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 덕분이었다.

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돈세탁 솜씨.

양지의 것이 아닌 음성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활용하려면 돈세탁은 필수이다.

공적과 공적 성향의 추방자일수록 이 과정은 중요했다.

10%, 20% 하는 수수료가 아깝다고 게을리했다간 하룻밤 만에 계좌가 동결되거나 금고에 압류가 걸리는 일도 흔했다.

발끈해서 뒤집어엎자니 티페레트 공작을 위시로 위치포인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참 뭣 같은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위계와 힘이 깡패인 마녀 사회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사회다.

돈깨나 있는 공적 중 란다의 자문이나 세탁을 마다하는 자는 드물었다.

쉽게 말해 란다는 정치적인 빽과 돈이 많은 마녀라는 의미다.

“그러니까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손짓 발짓을 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란다.

성가신 부탁인 줄로만 알았던 란다의 생떼는 뜻밖에 좋은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었다.

바로 신시우와 자연스럽게 접촉할 기회를.

3.

“이거 아~주 건방지게 생긴 놈일세?”

아까 드잡이를 벌였던 마녀가 시우의 부탁대로 메로나를 사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뜬금없이 도로시를 데려올 건 더더욱 상정 밖이었다.

“…….”

하긴 이상할 건 없다.

헥센나흐트는 공적의 도시가 아닌가?

그 많은 마녀 중에 빽이랍시고 데려온 마녀가 도로시라는 건 아무리 봐도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말이다.

“주위에서 남자 마녀라고 신기해하니까? 뭐라도 되는 것 같니? 혼 좀 나야겠어~.”

반갑다는 듯 인사를 하지도 않고 아는 척을 하지도 않는다.

짧은 언행이었지만 시우는 즉각 그녀의 의도를 짐작해냈다.

아예 면식이 없는 시늉을 할 셈이다.

“어때? 내가 두고 보자고 했지? 위계가 낮으니까 만만해 보였어?”

벙찐 시우의 얼굴을 낭패감으로 해석했는지 날뛰는 파란 머리 마녀.

기고만장한 채 콧김까지 뿜는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울고불고 온정을 구걸하도록 해.”

도로시는 린네에 뒤처지지 않는 끗발을 자랑한다.

한낱 남자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시비를 걸어댔으니 응당한 처벌을 가할 심산이었다.

“무슨 용무지?”

그때 소주 반병도 먹지 않고 인사불성이 되었던 린네의 서슬 퍼런 음성이 들려왔다.

“검의 마녀, 나는 이 남창 새끼한테 공개적으로 모욕당했어. 응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바야.”

대책 없이 판을 벌이는 게 아니다.

이곳이 다툼이 엄격히 금지된 헥센나흐트이기 때문에 당당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란다의 신상에 위기가 생기면 곤란해질 마녀만 한 바구니다.

아무리 검의 마녀라도 란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경우 정치적 압력과 빈축을 감당할 수 없으리란 계산하에 나온 정면돌파였던 것이다.

“상황을 설명해라.”

“린네, 그동안 잘 지냈어?”

린네의 말에 응대한 건 도로시였다.

“보다~시피 이 남자 마녀가 우리 귀여운 란다 양에게 아주 심한 폭언을 가한 모양이야. 갑자기 날 찾아오더니 항의해 달라고 부탁하더라고. 그래서 왔지.”

“사실인가?”

“…맞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습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할 수야 있지만….

상황이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지.

위계도 변변찮은 마녀가 어떻게 도로시 같은 거물을 시답잖은 다툼에 이용할 수 있는 건지.

애초에 둘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가기에 적당히 대처했다.

“아무튼 간에, 나도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당장 뛰어왔지 뭐야?”

“그래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시우는 위기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린네가 테이블 밑으로 칼집을 쥐었기 때문이다.

취기 탓에 떨리던 손은 어디 갔는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엄지로 조용히 검을 뽑아 올린다.

저 파란 머리 마녀가 뭘 믿고 저렇게 까부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우가 지켜본바 린네는 상식 이외의 면이 있다.

바로 옆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갈무리된 살기가 이를 증명한다.

뽑을 생각이다.

그리고 어디든 벨 생각이다.

린네의 입지가 흔들리면 그녀의 포로로 있는 시우의 입지도 덩달아 흔들린다.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그녀를 만류하려는 순간.

“천하의 도로시를 턱 끝으로 부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자기 말 한마디면 검의 마녀와도 척을 져 줄 거라고 보는 천진난만한 란다양이잖아.

그런 철부지가 욕먹었다며 얼굴 시뻘게져서 돌아왔는데 오지 않을 수가 있어야지~”

도로시가 화살 끝을 묘한 곳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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