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62화 (662/917)

#662

1.

시우는 소분된 약재가 담긴 주머니를 달랑달랑 들고 골목길을 거닐었다.

린네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한결같다.

그럼에도 아까 전 린네를 생각하면 조금 의외였다.

강해질 수 있다는 희망에 스스럼없이 뒤로 관계하는 것을 허락한 린네.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성격의 그녀라면 주위의 평판이나 소문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적극 입을 막다니….

그 말인즉슨 나름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말 아니겠는가?

또 그 말인즉 힘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뭐든지 한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이 데이트 아닌 데이트도 시우의 헐렁한 궤변을 듣고 어울려주는 것이었고.

그나저나 이 골목에서 볼일이 끝났다.

하지만 린네는 미궁을 배회하듯 골목 안에서만 발길을 옮기고 있다.

어딘가 목적지가 있나 싶어 잠자코 따랐는데 무심코 지나친 방금 그 길이 불과 5분 전에 거쳐갔던 길임을 깨달았다.

빙빙 제자리를 돌고 있던 것이다.

혹시 길을 잃었나 싶어 물었다.

“스승님, 이제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데이트다. 향월루로 돌아간 후엔 다실에서 관계를 가진다.”

뭐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하는 린네.

이 시점에서 한가지 간과하고 있던 게 있었다.

“스승님, 데이트가 뭔지 아시나요?”

“당연하다.”

“자세히 여쭐 수 있을까요?”

“지금 하고 있다.”

“아하.”

그렇다.

뭔가 자신감 있게 앞으로 슉슉 나서기에 행선지가 있으리라 판단했던 건 어디까지나 시우의 착각.

린네는 이 음험한 골목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데이트라고 여기고 있던 것이다.

“스승님, 데이트는 그런 게 아닙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는 린네.

“함께 쇼핑하는 것까지는 데이트의 일환이 될 수 있지만…. 여기는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요?”

“분위기?”

“네, 이를테면 카페라던가, 술집이라던가, 하다못해 극장이라던가 이런 곳이 분위기가 좋죠.”

“이곳은 왜 안 되지?”

오히려 왜 이곳을 데이트 장소로 삼으려 하는 지가 의문이었으나 막상 안되는 이유를 대려니 어렵다.

원래 한국인에게 김치맛을 설명하라고 하면 어려운 법이다.

시우에겐 상식이었고 린네에겐 아니었으니까.

물론 린네를 설득하는 건 데이트 나온 김에 으슥하고 좋은 곳 가서 린네의 엉덩이나 주무르려 함이 아니다.

아직 당초 목적인 문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처럼 골목만 뺑뺑이 돌다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조차 요원했다.

따라서 줄줄이 이유를 늘어놓았으나 린네는 그다지 납득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사실 뭐, 함께하면 즐거운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어디든 좋긴 하죠.”

결국 경험에서 나온 말이 이런 두루뭉술한 대답이라니.

좀 더 머리를 굴려볼 걸 그랬다.

“…….”

그때.

갑자기 시우의 말을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린네.

별안간 우뚝 멈춰서 눈동자를 굴리더니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포인트에서 납득이 간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말이다.

“좋다. 술집이면 되겠지.”

“네, 기왕이면 전망 좋은 곳으로요.”

어찌저찌 설득을 끝내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워낙에 마녀가 많아 바짝 긴장하고 있었건만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다.

아무리 인파가 붐비는 곳이라도 린네가 지나가면 홍해가 갈라지듯 마녀가 갈라섰으니 말이다.

적당히 골라잡고 들어간 술집 ‘스핀로드’.

광장의 끄트머리 절벽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독특한 입지의 주점이었다.

실외보다 소리가 울리는 까닭에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 코를 찌르는 담배 연기.

실내전체가 푸른 조명에 둘러싸인 와중 군데군데 네온사인이 눈 아팠다.

온갖 술이 진열된 중앙 선반을 포함해 전반적인 분위기는 1960년도 뉴욕 뒷골목에 있을 법한 술집인지라, 고급시설을 지향하기보다는 떠들썩함을 즐기기 위해 마련된 레트로 주점 같은 인상을 풍겼다.

게헨나 마녀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굳이 찾을 일 없을 것 같다.

일단은 같은 마녀임에도 이런 식으로 차이가 나는 건가 싶어 조금 신기해졌다.

“…….”

감상도 잠시.

시우와 린네가 들어온 순간 그 떠들썩하던 주점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흥겨운 노랫자락을 제외하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혹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입구를 쏘아본다.

마녀 사회 속에서는 어디를 가나 시선을 집중시키는 시우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위로 가겠다.”

또한 린네에게도 익숙한 광경이었나 보다.

술렁임엔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술 상자가 아무렇게나 쌓인 계단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간다.

시우도 재빠르게 따라 올라가 그녀를 앞질렀다.

근방은 죄다 주점이다.

시우가 구태여 이 주점을 고집한 것도 이유가 있다.

“창가 쪽으로 앉으시죠.”

시우가 안내한 테이블은 절벽 아래 즉, 화물선이 오가는 바다와 문이 훤히 내려 보이는 명당.

뷰를 감상하는 척하며 문의 구조를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보기보다는 푹신한 소파에 마주 앉은 시우와 린네.

그래도 2층은 1층보다는 사람이 적고 소란이 덜했다.

그 탓에 주위의 시선을 죄다 집중시키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럼 일단은 아래로 내려가서 술을 받아와야 할 것 같은데….

“평소 드시는 술이 있나요?”

“마셔본 적 없다. 네 것만 사오도록.”

린네는 주문 대신 달러 몇 장을 꺼내 시우에게 건네주었다.

살짝 아연해졌다.

시우가 아는 한 마녀 중엔 애주가가 많다.

기나긴 삶과 고독한 투쟁을 달래줄 소소한 여흥으로 신이 내린 물방울을 기꺼이 즐기는 것이다.

다시 한번 똑같은 궁금증이 도졌다.

그녀는 어떤 과거를 거쳤기에 이런 형태의 삶을 사는 것일까?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도로시도 나름의 사정이 있던 것을 보면, 이번에도 가능한 건 아닐까?

“일단 주문해 오겠습니다.”

확실히 사치스러운 감상이다.

이해하고 싶다느니, 이야기를 해보면 말이 통할지도 모른다느니.

적어도 납치당해온 사람이 할만한 생각이라기엔 지나치게 물렁하다.

어차피 조만간 뒤통수를 치고 탈출해야 하는 형식뿐인 사제관계 아닌가?

“아니지.”

그래도 마냥 쓸데없는 작업이라곤 하긴 어렵다.

육체적인 진도만을 놓고 봤을 때 시우와 린네는 아주 깊다.

낮에는 연무장에서, 밤에는 다실에서 몸의 대화를 나눴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정작 시우는 린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자고로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읽고 싶거든 과거를 들여다보라 했다.

기왕 자리가 마련된 거 린네의 속내를 털어놓게 하고야 말겠다.

“이런….”

잠깐이니 별일 있겠나 싶어 홀로 내려온 건데….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마주한 광경에 시우는 후회했다.

연극의 주인공이라도 출현한 것처럼 열댓 명의 마녀가 일제히 시우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린네를 대동해야 했나?

털북숭이 아저씨로 가득한 술집에 금발 미녀가 알몸으로 나타난대도 이 정도로 주목하진 않겠다.

“…….”

이럴 때일수록 태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차피 이 주점에 린네를 제외하면 시우보다 강한 마녀는 없었다.

최대한 싸늘한 표정과 사나운 눈빛을 유지했다.

진짜 미친년이 아니고서야 위에 린네가 있는데 난동을 부리겠어.

“어서오십쇼.”

이 주점의 유이한 남자.

말끔한 셔츠에 조끼를 입고 쉐이커를 흔들던 흑인 바텐더는 얼떨떨하게 인사했다.

이 상황이 무슨 일인지, 시우는 또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듯하다.

“제일 잘 나가는 거로 두 잔이요.”

“모스크 뮬로 추천 드리겠습니다.”

유학시절 마셔본 적이 있는 칵테일이다.

레시피도 매우 간단하다.

투박한 구리제 머그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보드카와 라임 주스를 넣는다.

이후 차게 식힌 진저비어를 부어 저어준 뒤 슬라이스한 라임과 민트 잎을 가니쉬로 얹어주면 끝.

잔 자체가 열전도가 잘되는 구리인만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잔 전체에 물기가 맺히기에 손바닥까지 시원해지는 칵테일이다.

입맛을 다시고 있자 한 마녀가 의자를 빙글 돌려 시우를 보고 앉는다.

“너 예쁘다. 어쩜 이리 곱상하게 생겼지?”

한숨이 푹 나오는 전개였다.

“위에서 기다리는 분이 있어서요. 잡담할 시간 없어요.”

“알아, 그냥 눈 호강이나 하려는 거야.”

이유는 단순하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중 한 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루루 움직이는 군중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슬금슬금 다가오는 마녀가 곁눈에 스친다.

“그런데, 오늘 밤 넉넉해? 위쪽 타운에 내 별장 있는데 구경 올래?”

“검의 마녀는 감당할 자신 있으시고요?”

“남녀가 논다는데 감당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

“일단은 자유의 몸이 아니라서요.”

단칼에 거절하는 게 고까웠던 건지 눈을 찌푸렸던 마녀는 비릿한 웃음을 피었다.

“아하, 그럼 남창이야? 검의 마녀가 이런 취향이었구나.”

상당히 간덩이가 부은 마녀였다.

반쯤은 허세인지 살짝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래도 린네 쉴드는 탁월한 효과를 자랑했다.

언급한 것만으로 다가오던 마녀 중 반수가 그대로 뒤돌아섰다.

시우와 린네의 관계가 뭔지는 모르지만, 괜히 괴물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다.

“말 잘 들으면 돈 두둑하게 줄게. 애교 좀 부려봐. ”

그런데도 이 마녀는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치근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야 뭔가 이 도시에 대해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초에 너무 게헨나 감성으로 접근했다.

헥센나흐트는 3할은 공적, 7할은 공적이 되어도 괘념치 않는 추방자가 모인 도시.

까놓고 말해 린네가 효과적인 쉴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신의 강함도 강함이지만 미친년이기 때문이다.

악의와 조롱을 담은 의미의 미친년이 아니라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

반대로 정중한 대응은 약육강식의 야생에선 얕보일 구실만 줄 뿐 불필요한 요소였다.

상대는 시우 혼자서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마녀.

이런 상대에게마저 어중간하게 대처해봐야 앞으로가 고단해질 뿐이다.

또한 지나치게 소란이 생겨 린네가 내려온다면 자칫 시우의 컨셉질이 간파당할 위기도 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신시우는 이 정도 불똥을 제 손으로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 테니 말이다.

“야.”

갑작스러운 반말에 멍해진 마녀.

“응? 야? 나한테 한 거야?”

“뒤지게 처맞기 싫으면 꺼져.”

흥미로운 해프닝에 주점 곳곳에서 실소가 터져 나오고, 모스크 뮬을 만들던 바텐더는 거의 졸도할 듯 숨을 컥컥 댔다.

멍해져 있던 마녀의 눈에 표독스러운 빛이 올라온다.

“이 개새끼 봐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턱을 덜덜 떨며 말하는 마녀지만 시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모르고, 관심도 없어. 그러니까 꺼지라고.”

얼굴이 벌게진 채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마녀에 맞서 시우 역시 그림자를 피워올렸다.

일대일로 붙어도 절대 질 것 같지 않고, 조금 양심 없는 발언이긴 하지만 이 자리만 모면한다면 뒷배가 있건 없건 린네가 잘 처리해 줄 것 같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짓던 마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냉담한 눈빛에 마력을 흐트러뜨렸다.

패를 까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싸움도 있는 법이다.

“두고 봐. 이 창피는 갚아줄 테니까.”

“올 때 메로나.”

이를 바드득 갈며 주점을 뛰쳐나가는 마녀.

“주주주주문하신…. 카카카카칵테일…. 나왔스스스습니다.”

때마침 바텐더가 고장 난 AI 말투로 시원한 구리잔 두 잔을 건네주었다.

다음화 보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