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61화 (661/917)

#661

1.

운이 좋았다.

금일 데이트의 행선지는 헥센나흐트의 최심부 디그니티 타운.

표면상의 목적은 데이트 겸 예빈이 작성해준 마법 작물과 약재를 구매하는 것이다.

좋은 기회였다.

문을 관측할 수 있을뿐더러 린네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앨리스와 예빈에게 저택 내에 숨겨져 있을 붉은가지 수색을 부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스승님, 들어가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린네의 방으로 향한 시우는 조금 놀랐다.

언제나 검은 연무복, 또는 유카타만을 고집하던 린네의 모습이 여느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인 건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는 기모노는 화려한 금실로 한 폭의 동양화가 장식처럼 수놓여 있다.

“옷이 잘 어울리시네요.”

여기까지라면 ‘아 기분 내는구나’라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걸.

린네는 무려 화장까지 한 상태였다.

특히 눈꼬리를 따라 이어진 붉은 눈화장이 매화가 핀 듯 아름답다.

매화는 절개의 상징이라는데 평소 조금도 꾸미지 않던 린네가 저런 화장을 하니 절개는커녕 묘한 색기가 묻어나온다.

“화장도 하셨네요…?”

“네가 욕구를 느낀다면 내게도 이롭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벌써 사흘째 마력 증폭은 실패 중.

린네는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 대안을 마련해 온 것이리라.

아마 시우가 그녀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면 꼭 ‘취향’에 맞추지 않아도 파동이 발현될 수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러려면 저 딱딱한 말투부터 어떻게 해야 할 성 싶긴 한데….

구태여 참견하진 않았다.

“뭐, 좋습니다. 고우시네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뒤.

향월루의 죽림을 빠져나와 승강기로 향했다.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지하도시의 끝까지 내려가는 만큼 승강기는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는다.

덜컹이는 철제 상자 속.

시우보다 약간 앞서 있는 탓에 린네의 자그만 뒤통수가 보인다.

“음.”

발기했다.

어쩔 수 없다.

파블로프의 개가 된 기분이다.

최근 이런 앵글에서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볼 때는 항상 같은 상황이었으니까.

바지에 손을 넣어 엉거주춤하게 장전을 다시 할 무렵 승강기 문이 열렸다.

시야를 가로막던 문이 없어지자마자 귀청을 파고드는 거대한 소음.

동시에 눈이 아플 정도의 광량과 마주한다.

시우는 입을 벌렸다.

일전 도개교를 건널 때 그 아래를 살핀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곧장 이만한 별천지가 마중을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아르카나 타운의 주택단지와 달리 광장과 곧장 연결된 터라 첫 풍경부터 광활했다.

탁 트인 광장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마녀의 솥.

다만, 스케일이 남다르다.

용광로를 연상케 하는 놋쇠 솥 밑에는 쉭쉭 거리는 바람 소리를 내는 풍로가 지옥불 같은 불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게 하나도 아니고 네 다섯 씩이나 존재하니 자연스레 일대는 해 질 무렵처럼 주홍빛으로 멍들어 있었다.

“나와라.”

우두커니 서 있던 시우는 린네의 뒤를 따랐다.

아르카나 타운이 최소한 산업혁명 시대 같은 정경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디그니티 타운은 현존하던 역사 속 도시의 전경을 탈피한 별개의 풍경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톱니바퀴와 곳곳에 덩굴처럼 얽혀있는 배관.

이따금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엉터리 관현악단처럼 불협화음을 연주할 때쯤, 시우는 스팀펑크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스팀펑크라 하면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시간성이 기조인 법.

그 분위기에 걸맞게 취객처럼 삐뚤삐뚤 광장을 둘러싼 건물은 크기도, 규격도, 건축 양식도 제각각이다.

어떤 건물은 보더 타운에 있을 법한 허름한 목재에 슬레이트 자재를 천장으로 올렸다면, 어떤 건물은 족히 10층은 되어 보이는 데다가 전면이 유리.

또 어떤 건물은 동화 속 ‘마녀의 집’처럼 생겨 거대한 증류 장치를 굴뚝 대신 얹고 있는가 하면, 어떤 건물은 뾰족한 탑 형태를 상위 타운까지 그 첨단을 드리우고 있다.

혼란하다 혼란해.

광장을 벗어나 가도로 눈길을 돌리면 그 혼란함은 배가 된다.

단단하게 다져진 아스팔트 위로 때로는 차가 굴러다녔고, 때로는 마차가, 때로는 가마꾼들이 가마를 얹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여기까지는 애써 그럴 수 있겠거니 받아들이려 해도 뜬금없이 깔린 철로 위로 돌아다니는 레트로 감성 넘치는 노면전차는 마녀의 도시라는 명칭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어찌나 마녀가 많은지 러시아워 지하철을 방불케 했는데 둘러본바 이 많은 인파 중 대마녀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하긴 게헨나에서도 보더 타운에 머무는 이는 소수였으니 당연하다 볼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연구를 위해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 마녀라면 이런 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마어마하네요.”

“이쪽이다.”

그래서인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시우를 바라보다가도 린네를 보고 고개를 돌리는 마녀들.

미련 철철 넘치는 눈빛으로 입맛을 다시는 마녀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직접 말을 걸어오거나 추파를 던지지 않았다.

첫번째 목적지는 약재상점.

광장 어귀에 세워진 표지판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자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소음이 잦아들었다.

“엄청 음침하네요.”

두 사람이 지나가면 꽉 틀어막히는 골목길.

디그니티 타운은 한줄기의 달빛조차 닿지 않기에 모든 불빛은 인공조명에 의존해야 했다.

그리고 골목까지 그런 인프라를 깔 여력은 없는 것인지 어스름하게 빛나는 녹색 불빛만이 시야를 발밑을 밝혀줄 뿐이다.

“…….”

린네는 시답잖은 잡담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은지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하고 좁아터진 골목을 배회하길 10여 분.

린네는 3층 목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주위에 바짝 붙은 다른 건물과 다를 것이 없다.

간판이라고 하기도 뭐한 나무 널빤지가 없었더라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여기인가요?”

-끼익

노크도 없이 먼저 들어선 린네.

문을 열자마자 뿌연 연기가 메케하게 눈을 찔렀다.

유학 생활을 보냈던 시우는 단박에 연기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식초에 절인 마른 풀을 태우는 시큼한 냄새.

대마의 부류연이다.

외관과 결을 맞춘 것인지 실내가구는 죄다 목재였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안쪽으로 늘어선 선반에는 말린 식물이 수북이 쌓인 유리병이 빼곡히 놓여 있었고, 무게를 측정하는 양팔 저울과 분동 따위가 테이블 위에 나뒹굴고 있다.

개중에는 제머나이 마도구 상점의 인증마크가 찍힌 마법작물도 있어 묘하게 반가웠다.

문에 걸린 종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었음에도 인기척이 없는 상점.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성의가 조금도 없는 간판을 보고 짐작했지만, 공방의 목적이 9할.

장사는 어디까지나 취미생활인 듯한 가게다.

기다리다 못한 시우가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나가요.”

커튼으로 가려진 실내 공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습을 드러낸 상점 주인은 라틴계로 보이는 마녀였다.

사이키델릭한 색상과 무늬로 장식된 히피룩이 인상적이다.

손가락 사이에는 대충 종이를 말아 필터를 끼운 것 같은 궐련이 들려 있다.

“흐아암, 한참 좋은 때였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푸념하던 마녀는 시우를 보고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총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린네를 보곤 벌레를 씹은 표정이 된다.

소문으로만 듣던 남자 마녀의 등장에 호기심과 흥미가 폭발하는데, 갑자기 검의 마녀가 찾아온 것에 대해서는 불안함 밖에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뭐, 뭐지? 너무 취했나?”

“물건을 사러왔다.”

“꺄악! 진짜잖아!”

눈을 비비던 마녀는 린네가 말을 던지고 나서야 이게 환각이 아님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비명을 지르며 기겁한다.

“검의 마녀…. 당신 여긴 왜, 왜 왔어?”

걸어다니는 자연재해로 악명이 자자한 린네.

아무리 무력행사가 제한된 헥센나흐트라도 그녀와 독대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네, 말씀대로 뭣 좀 사고 싶습니다.”

괜스레 위압적인 린네를 내세워봐야 좋을 것 없다 판단, 시우가 직접 대화에 나섰다.

그제야 다시 시우에게 의식을 돌린 마녀는 얼굴을 빤히 보더니 감탄을 내뱉었다.

“와…. 진짜 남자 마녀다.”

모처럼 되찾았던 총명한 눈빛이 다시 흐리멍덩하게 변하던 마녀.

입가로 흐르는 침을 쓰읍 삼키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남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곁눈질로 린네를 힐끗힐끗 경계하다가 정신이 없다.

“그래, 약을 사러 왔다고? 다른 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넉넉히 1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녀는 매대 안쪽에 들어섰다.

다시 궐련을 입으로 가져간 걸 보니 겨우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그래서 필요한 품목은? 참고로 말하지만 없는 것도 많아. 아직 자재를 한창 옮기고 있어서.”

시우는 품에서 예빈이 써준 쪽지를 건넸다.

가슴골에 끼워두었던 안경을 꺼내 들고 쪽지를 살피는 주인장.

“흐음, 붉은이끼, 아르테미스 쑥, 만드라고라, 벨란 고사리, 앙골담초, 고양이오줌풀…. 응?”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와중에도 훌륭한 직업 정신을 보이며 품목을 읽어내려가던 히피 마녀.

“응?”

먼저 쪽지를 보고 린네를 본다.

“응?”

다음엔 쪽지를 보고 시우를 본다.

“어어어?”

다음엔 시우와 린네를 번갈아 본다.

침착함을 잃고 흔들리는 동공.

시우와 린네가 처음 가게에 들어섰을 때보다 놀란다.

왜냐하면 쪽지에 적힌 물품은 누가 봐도 자양강장제 혹은 정력제를 만들기 위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클리포트 사이에서도 삭막하기로 유명한 린네와 단둘이 으슥한 가게를 찾은 남자마녀.

거기에 주문하는 약재 목록은 정력제의 재료?

초특급 스캔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얘얘.”

힐끔 린네의 눈치를 살피더니 상체를 기울이는 마녀.

손짓하기에 귀를 가져다 댔다.

“돈 안 받을 테니까 하나만 알려줄래?”

“네.”

“이거 정력제 만들려는 거지?”

생각보다 약제사로서의 소양도 뛰어난 히피 마녀였다.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실수였다.

소문이 퍼지면 좋은지 나쁜지조차 판가름할 수 없어 난처해하던 때.

“자유의 마녀.”

린네가 먼저 나섰다.

“나, 날 알아?”

“알고 있다.”

검의 마녀 같은 유명인이 자신의 마녀 명을 알고 있다는 것에 들떴던 그녀의 표정은, 이어진 린네의 말에 와그작 일그러졌다.

“얼굴도, 이름도, 출신도.”

뭘 뜻하지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이 사실에 대해 조용히 입을 다물라는 의미며, 이를 어길 시 찾아오겠다는 의미다.

그때는 수려한 검집에 담긴 칼날의 은빛을 감상할 수 있게 되겠지.

“맹세해. 절대 함구할게.”

사색이 된 자유의 마녀는 허겁지겁 물품을 챙겨주었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들리는 문 잠기는 소리에 시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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