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57화 (657/917)

#657

1.

“좋아, 내가 이겼다. 나의 승리다.”

막무가내로 나오는 린네를 더한 막무가내로 퇴치하는 데 성공한 시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자축했다.

혹자는 이것을 상처뿐인 승리라고 논하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구라를 친 것도 아니기에 시우의 명예는 더럽혀지지 않은 셈이다.

어찌됐건 현란한 말솜씨로 그녀의 관심을 돌려낸 것을 위안으로 삼자고 자위하던 무렵.

“…….”

린네는 방에 돌아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명상을 위해서였다.

시우가 없을 때도 린네의 생활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의 절반은 연무장에서 검을 휘둘렀고, 나머지 절반은 명상을 하며 보다 명료한 검로를 찾아 헤맸다.

대련 상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후우.”

마지막 호흡을 내뱉는 잔심과 함께 시작된 명상.

기나긴 삶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 행위인 만큼 린네의 명상은 완벽했다.

지나치게 긴장되지도 이완되지도 않는 신체.

코앞에 깃털을 대어도 일절 흔들리지 않을 느린 호흡.

눈을 감으면 마음을 흐리게 하던 허상은 흩어지고 잡념은 증발한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초월적인 심상 세계에 발을 들인다.

“…….”

그래야 했을 터인데.

평온한 무표정을 유지해야 했을 그녀의 얼굴에 실금이 잔뜩 가 있다.

불과 5분 전.

임시 제자에게 들었던 천박한 말들 때문이었다.

‘뒤로 하는 걸 좋아합니다.’

‘이해 못 하신 것 같으니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여자는 구멍이 두 개잖아요? 보지 말고 뒤에 구멍 하나 더 있습니다.’

‘거기에 박아 넣고 깔아뭉갠 다음에 쑤컹쑤컹 하는 게 역시 제 취향이죠.’

‘아, 그리고. 기왕이면 노예 취급하면서 암캐처럼 헐떡이게 하는 게 최고입니다.’

린네는 선악의 분별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실은 연쇄 강간마이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극악한 취향의 소유자건 나무랄 마음도 없었다.

린네 본인부터 여차하면 임시 제자와 몸을 섞을 생각이 아니던가?

정조와 순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삶은 나약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등 뒤의 어둠에서 아가리를 벌린 채 끝없이 속삭이는 저주.

그 끔찍한 올가미를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수단과 방법에도 정도가 있다는 걸 린네는 태어나 처음 확신했다.

고작 단어와 낱말의 연결에 불과할 뿐인데 귀에 꿈틀거리는 벌레를 쏟은 것처럼 불쾌했다.

“…더러운 놈.”

-찰팍 찰팍

참지 못한 린네는 대야에 물을 받아와 귀를 씻었다.

2.

지난 밤 예빈과 간단히 사건 진행 현황에 대해 나누고 잠에 들었다.

날이 밝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장 대련에 돌입.

새벽부터 연무장에서 마주한 린네는 상당히 꼬롬한 표정이었다.

뭐랄까.

그전까지는 그래도 같은 길을 추구하는 자에 대한 미미한 호의, 내지는 투쟁심이 잔잔하게 뒤섞인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오물을 잔뜩 뒤집어쓴 사람을 대하는 듯한 미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원래부터 이런 반응을 노린 것이긴 하다.

아무리 앞뒤 분간 않고 달려드는 린네라도 그 빡센 요구 조건을 감수하며 성행위를 강행할 것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창을 들어라.”

린네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린네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으로 블러핑을 쳤다 한들 불안요소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닌 말로 곰곰이 생각하던 린네가 눈이 돌아가서 요구를 들어주겠다 했으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노릇이다.

그럴 경우까지 대비하여 ‘뒤’를 집요하게 강조하긴 했지만 그 얄팍한 거짓말이 영원할까?

몇 번을 반복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당연히 다른 방법도 시도해 볼 것이고, 그건 아마 앞구멍이 되겠지.

즉, 애초에 아예 발단을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자칫 린네의 거부감이 어설프게 사라졌다간 에스컬레이트하게 행위가 진전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대련은 여느 때와 같았다.

아니, 조금 달랐다.

린네의 검은 평소보다 감정적이었으며 훨씬 흉맹한 파공음을 내며 붕붕거렸다.

아무래도 커다란 미운털이 박힌 모양인데….

시우로선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고 믿고 넘기는 것밖엔 방법이 없다.

그렇게 입에 흙이 들어갈 정도로 바닥을 구르고, 흠씬 두들겨 맞는 대련시간.

예빈에게 두 번 치료를 받고 다시 창을 만들어 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다.”

“네?”

린네가 어제 애널착정섹스 너무 좋아 선언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심정을 이젠 알겠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들었는데 뇌가 이해를 거부한다.

대련을 시작한 지 고작 10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사지가 잘려나간 것도 아니고, 예빈의 마력이 바닥난 것도 아닌데 그 린네가 대련 중 휴식 선언이라니.

“약속이라도 있으신가요?”

한박자 늦게 불안감이 엄습한다.

차라리 칼에 베인 린네가 ‘호~ 해죠….’라고 눈물을 글썽이다가  토끼 반창고를 붙여달라고 하는 게 더 현실성 있다.

“아니.”

떠오르는 가능성 하나.

“씻을 예정이다. 따라와라.”

설마 그걸 진짜 한다고?

그림자의 창을 흩어내고 멍하니 온천으로 향하는 린네의 뒷모습을 쫓는 시우.

아니다.

아직 확정 난 건 아니다.

암만 뇌내 그래픽카드를 완전가동해도 린네가 시우의 취향을 맞추는 건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스승님 이상으로 고지식한 그녀라면 아직 최악의 상황은 아닐 터.

잠자코 린네를 뒤따른 시우는 커다란 수건을 두르고 린네와 함께 입욕했다.

욕탕 안에서도 별일은 없었다.

청결 마법으로 한번 몸을 깨끗이 한 뒤, 샤브샤브 육수에 채소를 데치는 수준으로 담갔다가 나온 것이 전부다.

대화조차 오가지 않았다.

욕장을 나선 린네는 그대로 다실로 시우를 끌고 들어왔다.

하필이면 이 다실이 향월루에서 가장 외진 곳이라는 점이 신경 쓰인다.

밀회 장소로 제격이라는 생각은 시우만 하고 있는 걸까.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엉덩이가 따끔거리는 시우와 달리 린네는 어떠한 내색도 없이 물을 끓였다.

다시 한 번 봐도 다례의 교과서 같은 절제된 동작.

그녀의 집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마녀가 되기 전부터 어디 성 같은 곳의 따님이 아니었을까?

린네가 끓인 거품 가득한 말차를 받아들고 나서야 맥이 끊어졌던 대화가 재개되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밀랍을 얇게 떠내듯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후루룹 차를 마시는 린네에게선 대답이 없다.

어떤 의미에선 예상대로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상상을 초월한 답변이 나온 건,

그녀가 차 한 잔을 전부 비우고 나서였다.

“해보겠다.”

“뭘요?”

“성관계를 해보겠다.”

오해할 여지가 없이 또박또박 의사를 타진하는 린네.

설마도 세 번이면 사람을 잡는가 보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니, 아무리 강해지고 싶다거니와 일부러 극악하게 늘어놓은 취향에 맞춰줄 만큼 간절하다는 건가?

그것도 고작 하루만에 결심을 다잡을 정도로?

뻣뻣하게 굳은 시우 앞에서 린네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네 더럽고 추잡한 취향에 모두 어울려 줄 용의는 없다.”

지금껏 어떤 말보다 긴장되는 말이었다.

취향에 어울려줄 용의가 없다 함은 평범하게 섹스를 하겠다는 말이고, 시우가 자꾸 질내사정을 피한다는 걸 눈치채면 쉽사리 진실에 다가 설 것이다.

“의복을 벗어라.”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 린네는 연무복의 허리띠로 손을 옮겼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이젠 더 가져다 붙일 변명도 없다.

체크메이트다.

린네의 용기는 시우의 간사한 혓바닥을 넘어섰다.

온갖 헛소리와 현란한 무빙으로 피해왔던 종착의 때가 온 것이다.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려는 그 순간.

한 줄기 광명이 달빛과 함께 다실을 비추었다.

“뒤로 하는 건 용납해주겠다.”

“…….”

그러니까 정리.

고매한 스승님께선 추잡한 노예 플레이에는 어울려줄 마음이 추호도 없으나 뒤로는 하겠다는 말.

일단 체크메이트는 아니고 체크인 수준으로 선방한 셈이다.

-사르륵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옷자락이 흩어진다.

시우에게 등을 보인 채 비스듬히 선 린네의 나신.

반쯤 흘러내린 검은 연무복 사이로 매혹적인 살결이 빛을 발했다.

“또한 조건이 있다.”

슬쩍 돌린 고개.

가지런한 옆머리가 차양처럼 가리고 있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난 암캐처럼 헐떡일 생각도 아양이나 떨 생각도 없다.”

“…….”

그러고보니 저런 말도 했었지.

린네의 입으로 들으니 참으로 적나라하다.

“또한 네 아래 깔릴 생각도 없다. 이 자세 그대로 하겠다.”

이 자세 그대로라 함은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선 상태.

그렇다.

그냥 선 자세이다.

안될 건 없지만 과연 가능할까?

-툭

마침내 허물처럼 모든 옷가지가 벗겨졌다.

입욕 얼핏 보았던 새하얗고 탄력 넘치는 뒤태가 드러난다.

달덩이처럼 둥그런 엉덩이는 엉덩이보다는 옹도니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만큼 빵실거린다.

“그 전에, 저항하지 마라.”

린네의 손에 검은 마력이 맺혔다.

빛살 같이 뻗은 손이 시우의 몸 곳곳을 가격했다.

마력이 응축된 손끝이 피멍이 들 정도로 세게 찌른 곳은 마력 회로의 주요 부위.

“악!”

검은 마력 뭉치가 회로 곳곳을 가로막자 마력의 활용이 단숨에 억제된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풀어낼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 기미를 보고 린네가 대처할 수 있겠지.

아마 무방비 상태로 그녀 뒤에 서는 것을 막기 위한 보루일 것이다.

안전장치를 걸어 놓은 린네는 어서 옷을 벗지 않고 뭐하냐는 듯 시우를 바라본다.

“시작해라.”

“후우….”

남자로 태어나 예쁜 여자와 맘껏 섹스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담력이 좋고 밝히는 남자라도 이런 피 말리는 섹스는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삐끗해도 영원히 인생이 골로 가버리는 그런 섹스 말이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우는 바지를 벗고 린네의 뒤에 섰다.

다음화 보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