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56화 (656/917)

#656

1.

비로소 모든 추론이 하나로 연결된다.

시우와의 대련만으로는 티페레트가 그렇게 강해질 수 없다고 단언했던 린네가 ‘선물’까지 안겨주며 잠재력을 살피려던 이유.

앨리스가 린네에게 동침을 지시받은 이유까지도.

되짚어 보자면 간단했다.

시우를 미궁으로 잡아온 장본인이 린네와 침묵의 마녀다.

처음부터 시우가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판을 벌이고 함정을 파 놓은 것이 린네라면 분명 티페레트와 시우를 예의주시했을 것이다.

이유는 다음 둘과 같다.

첫번째.

23 위계의 전력을 지닌 공작은 계획의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위험인물이며, 이제껏 지켜본 바 린네는 티페레트에 대한 묘한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다.

두번째는 다소 간단한데, 그 전장에서 가장 희소한 전리품은 다름 아닌 시우인 까닭이다.

요주 인물 둘이 붙어 다니는데 잠시라도 시선을 뗐을 리가 있나.

두 사람이 지프를 타고 사막 한가운데서 운우지정을 나누는 모습도 감시하고 있었을 터다.

“스승님.”

일단 확실한 건 느긋하게 옛날 실수를 자책하고 시간이 없다.

사전에 알아챌 방도가 없던 사고였을뿐더러 해결을 봐야 할 급선무가 목전에 있다.

헥센나흐트에 잡혀 온 이후 최대의 위기.

시우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먼저 켕기는 거 하나 없다는 듯 뻔뻔이 굴었다.

“스승님께서 절 배려해 주신 듯하여 그다지 취향도 아님에도 품었습니다.”

“뭣…!”

“근데 스승님이 보시는 앞에서 두 번이나 해야 한다뇨.”

빈정대는 시우의 발언에 얼굴이 벌게진 앨리스.

허나 상황을 얼추 파악한 것인지 즉각 시우의 연기에 동조한다.

훌륭한 순발력과 적응력.

역시 추방자로 살아남은 짬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다.

“너, 너무한 거 아니야? 나도 나름 노력했다고!”

“근데 어쩌겠어요. 취향이 아닌데.”

“그게 방금 같이 뒹군 여자한테 할 말이야?”

“…….”

아무 근거도 없이 내미는 오리발이 아니다.

시우의 마력 증폭 및 낙인 복제는 어떤 마녀라도 탐낼 법한 전무후무한 능력이다.

만일 확증이 있더라면 강함만을 추구하는 린네의 눈이 처음부터 돌아갔어야 한다.

즉, 린네가 시우의 히든 스킬에 관해 모종의 낌새를 눈치채고 있다는 건 확인되었으나, 그것이 ‘확증’이 아니라 ‘의혹’ 정도에 그쳤다는 것이다.

왜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스승님의 기감이 극도로 발달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무리 칼날 같은 직관이라도 관계 중에는 상당히 느슨해지기에 제법 근접한 델라의 존재마저 놓쳤었지만, 린네가 그 점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런 저런 상황을 종합하자면 성교하는 모습을 지켜보긴 지켜보되, 굉장히 먼 발치에서 관측했음이 틀림없다.

그날 사정 회수는 2회.

그 중 질내사정이 1회였다.

린네 쪽에서 마법을 사용했다면 시우든 엘로아든 눈치를 챘을 테니 아마도 나안으로 관측했을 터.

그녀가 볼 수 있던 건 거칠게 흔들리는 차, 뿌옇게 김이 서린 차 문, 한 차례의 마력의 파동정도 였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잘만 둘러댄다면 아직은 외통수가 아니라는 의미.

“마음에 들어 구입해 달라 하지 않았나?”

시우가 내놓은 변명에 린네의 눈초리가 좁아진다.

“막상 벗겨놓고 보니까 별로더라고요.”

어차피 이쪽 스승은 모럴엔 관심이 없다.

따라서 덧붙이는 시우의 설명도 거침이 없다.

“정말 그런 이유인가?”

하지만 린네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로선 많이 양보했다는 것이다.

당장 옆에 있는 예빈이 아니라 마음에 들었다고 거짓을 늘어놓았던 앨리스를 내세워 확인하려 했다는 점도.

전혀 뜻밖의 인상이지만 나름 시우의 의사를 신경 쓴 게 아닐까 생각 중이다.

“이렇게 나오시는 걸 보니. 대충 짐작 가시는 게 있는 것 같네요.”

“그렇다. 네가 보유한 잠재력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티페레트와 동침하는 널 봤으니까.”

역시 일이 단단히 꼬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마냥 새카만 거짓말을 늘어놓는 건 악수다.

지금은 회색이 필요하다.

진실과 거짓이 섞인 교묘한 회색이.

“하고자 한다면 무력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네게 명령할 수도 있었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아뇨, 못하실 겁니다.”

뻔뻔하게 나서자 린네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그럴만했다.

지금 시우의 태도는 어느 때보다 오만불손하고 비협조적이었으니 말이다.

“착각하지 마라. 널 제자로 들인 이유는 하나다.”

인챈트 및 강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자로 들였지, 니가 예뻐서 그런 건 아니라는 말.

그 정도야 애진즉 알고 있다.

“솔직히 거기까지 눈치채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체를 들킨 실눈캐 흑막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회색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한 두 번째 방책, 초조하거나 조급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건방 떨지 마라.”

고드름처럼 푹 찔러오는 살기엔 등골이 오싹했지만 티내지 않았다.

정보의 격차는 무력과 권력에 상관없이 유효하다.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쪽이 적은 정보를 가진 쪽을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건 샤론의 최근 재태크 근황만 봐도 안다.

그러게 코인 하지 마라니까.

“전 분명 앨리스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백날 천날 반복해야 같은 결과일 거예요.”

“…앨리스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 역시 믿지 못하겠다.”

“그녀 다리와 가슴엔 음란한 장식이 달려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시우는 앨리스를 일으켜 린네 쪽으로 툭 밀었다.

린네는 앨리스의 가슴골에 손가락을 넣어 옷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살짝 눈이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같은 결과라는 건 무슨 의미지?”

또 한 번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게진 앨리스에겐 미안하지만 정액도 받아 갔겠다, 이 정도 증거면 ‘했다’는 사실 자체는 믿기로 한 모양이다.

여기서가 분기점이다.

대답을 잘 골라야 한다.

그럴싸한 회색 거짓말을 늘어놓고, 검증에 들어가기에도 까다로울뿐더러, 행여 직접 검증한다 해도 별일 없을 만한 거짓말.

“스승님의 예상대로 저는 아주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으면 마력의 파동과 함께 순수한 마력을 방출합니다.”

“…….”

“하지만 앨리스 씨로는 그닥 만족스럽지가 않았어요. 그러니까 반복한다 해도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말입니다.”

“만족?”

“그야 당연히 성적인 만족이죠.”

“…….”

이것이 정보의 격차다.

어차피 시우가 엘로아와 ‘성관계’를 했다는 정보까지 숨기기는 힘들 터.

그렇다면 차라리 왜곡된 정보를 던져 혼동을 주는 것이다.

“그런가.”

미심쩍은 기색을 보이긴 해도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린네.

의혹은 한 꺼풀 벗은 모양이다.

그러나 상황은 최악으로 흐르던 걸 멈춰 세웠을 뿐, 여전히 좋지 않다.

고작해야 지금 당장 앨리스에게 질싸를 강요받고 마력 증폭 작용을 들키지 않은 게 전부다.

“나가라.”

린네는 앨리스에게 턱짓을 해 보였다.

엉거주춤 서 있다 서릿발 같은 침묵에 조용히 방을 나서는 앨리스.

외로이 타들어가는 화로와 이불이 깔린 방엔 시우와 린네만이 남았다.

올 것이 왔다.

어찌됐건 시우는 린네에게 무언가를 숨겼다.

그리고 린네는 거기에 경지 상승의 계단이 놓여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고행을 거듭하는 수도승처럼 강함을 추구하는 린네가 순순히 넘어가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제가 만족스러운 관계를 해도 별일은 없습니다. 당연히 티페레트 공작이 그것 때문에 강해진 것도 아니고요.”

“믿을 수 없다. 넌 숨기는 게 너무 많다.”

역시 직접 해볼 생각 만만이다.

린네의 사제관과 가치관이라면 스승과 제자는 부모 자식과 진배없다는 논리도 통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즉.

“직접 확인해 보겠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는 말이지.

어디서 많이 본 시츄에이션이다.

분명 작은 장모님에게 처음 문안 인사를 드릴 때도 이런 식이었지.

예전이었다면 허둥지둥거렸을지도 모르는 난처한 제안.

그러나 허리케인 같은 여난에 휘말리길 2년 차.

시우는 어떠한 상황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만큼의 내공을 쌓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는 아시나요?”

“옷을 벗어라.”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널 만족하게 하면 그만인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복의 허리끈을 푸는 린네.

지금까지 밑밥을 잘 깔았다.

기다리다 못한 린네가 이렇게 나오는 경우도 예상한 기초 시공이었다.

이제껏 관찰한 린네는 분명 철저한 실리주의자이자 금욕주의자.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성적 경험이 있으리라 예상하긴 어렵다.

보란듯이 다시 한 번 발생한 정보격차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취향은 조금 유별난데요.”

“네 취향엔 관심 없다.”

“하지만 취향에 맞추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좋다, 취향을 말해라.”

시우는 린네의 귓가에 슬며시 다가가 속삭였다.

제아무리 강함에 눈이 돌아간 린네라도 주춤할 수밖에 없는 하드코어 플레이.

이제껏 경험한 모든 마녀가 경악을 금치 못했던 그 플레이를.

“……?”

바로 귓전에서 말을 제대로 전했음에도 화성 지구 간 무선 통신을 접한 듯 눈을 끔뻑이는 린네.

역시나 한번에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자 면요….”

속닥속닥속닥.

똑같은 말을 조금 더 풀어 설명해주었다.

오.

이번엔 확실히 변화가 있다.

씰룩이는 선홍빛 입술.

반듯한 앞머리 밑 난초 같은 눈썹이 비대칭으로 일그러진다.

시우가 그녀를 만난 이래 처음 접하는 생동감 넘치는 표정의 정체는….

“…….”

바로 구더기를 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이다.

말없이 허리띠를 풀어나가던 린네의 손도 우뚝 멈췄다.

“더러운 놈.”

헛바람을 들이켰다가 그대로 멈춘 나머지 들뜬 어깨가 마치 털을 잔뜩 부풀린 고양이를 연상케 한다.

“더러운 놈.”

오죽 인상 깊었는지 두 번 연달아 매도를 퍼부은 린네는 휙 등을 돌렸다.

해명이나 설명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완고한 모양새로 그대로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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