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
1.
제아무리 문란하고 막 나가는 마녀라도 여성의 주요 부위에 이런 장신구를 다는 이는 없다.
적어도 앨리스가 아는 한 한 명도 없었다.
자의로 한 것도 아니며, 이젠 로지에게서 벗어난 앨리스가 여전히 추악한 장신구를 달고 있는 것은 시우를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건 평생 빼낼 수 없어.’
잔학한 미소를 짓던 로지는 앨리스에게 피어싱을 달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앨리스의 마력 활용이 제한된 이상,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귀걸이나 다름없는 피어싱은 일종의 저주였다.
장착하는 순간 혈관과 결합해 상당히 험한 꼴을 보지 않는 이상 제거할 수 없는 기믹, ‘살아있는 금속’을 활용한 피어싱.
창녀도 하지 않을 법한 몰골로 남자를 유혹하는 앨리스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굴욕감과 수치심에 눈물이 흐를 것만 같다.
앨리스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울렁이던 심장이 차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
굴욕과는 별개로 앨리스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쪽 같은 남자라도 녹여낼 수 있을 것이며, 유혹할 수 있으리라 자부했다.
하지만 그를 보는 순간 계획에 착오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는 앨리스의 나신에 조금도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
음란하게 대롱거리는 장신구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진지한 표정으로 앨리스의 안색을 살피고 있을 따름이다.
의심받고 있다.
퍼득, 그런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안 할 겁니다.”
“왜, 왜...?”
“수상하니까요. 누가봐도 그렇잖아요?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건.”
예상대로 돌아온 것은 칼로 싹뚝 베어내는 냉정한 반응.
헤픈 정조 관념을 비웃는 듯한 조소는 없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 보인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이거 놓으세요.”
시우는 제 손목을 꽉 잡는 앨리스의 손을 뿌리쳤다.
정말 큰일이다.
이렇게 된 이상 유혹은 완전히 실패.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정액이라도 받아가자니 지시를 들키지 말라는 린네의 명령이 걸린다.
“내,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안 할 거야?”
원망할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건 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천박한 유혹을 했음에도 거절당한 수치심.
‘이미 글렀을지도 모른다’라는 사고에서 기인한 당혹스러움은 원망의 불씨를 엉뚱한 곳으로 튕겼다.
“사내새끼가 뭐 그래! 그, 그냥 한 번만 박으면 되잖아!”
눈물이 잔뜩 고인 채 시우를 윽박지르는 앨리스.
소리를 지르자마자 아차 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엉망이다.
멋대로 착각하고, 부랴부랴 어설프게 유혹하다 거절당하곤 화내는 모습까지.
전부 꼴불견이었다.
앨리스는 그만큼 많이 몰려 있던 것이다.
마법도 제한당한 채 공적의 도시에 잡혀 오고, 거의 일주일간 강간과 학대를 당한 것도 모자라 마냐와 말리샤의 목숨을 인질로 잡힌 채 맨살만 닿아도 소름이 돋는 남자를 유혹해야 했으니.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털썩 주저앉았고 말았다.
전부 물 건너갔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제 모습에 환멸이 난다.
“앨리스 씨.”
그런 앨리스의 어깨 위로 이불이 둘러졌다.
그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한쪽 무릎을 꿇어 앨리스와 시선을 맞췄다.
“진정하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앨리스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다른 사람이 개입된 일이죠?”
“아니야. 내가…. 내가 하고 싶어서….”
우선 고개를 저으며 부정해 보이는 앨리스.
마냐와 말리샤를 확보한 건 린네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는 한 앨리스는 그녀의 지시를 따를 셈이었다.
“절대 외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스승님이 시키던가요? 저와 관계를 맺으라고?”
그의 속삭임이 한층 더 낮아져 입술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차분하고 침착한,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한 목소리.
앨리스는 그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린네와 신시우는 새로이 맺어진 사제관계.
린네는 모종의 이유로 신시우를 감시하려 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린네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승님이 시키던가요?’라던가 ‘외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할 이유가 없다.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와중 앨리스는 드리워진 동아줄을 발견한 심정이었다.
그와 린네의 반목을 어떻게든 이용한다면? 이라는 새로운 선택지가 제시된 것이다.
물론 린네 쪽에 비하면 신시우는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줄이지만….
“어쩌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대신 설명해주세요.”
그에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중함이 있었다.
린네의 냉혹무비함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진중함이.
“사실….”
어차피 막다른 길이다.
앨리스는 훌쩍이며 자신이 린네로부터 받았던 지시에 대해 모두 털어놓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 어디 가는데?”
“증거 만들러요.”
꽤 충격적인 발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시우는 잠깐 자리를 비웠다.
2.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앨리스는 린네의 방에 발을 들였다.
그럴싸한 병풍과 장식품이 조금 더 들어서 있다는 걸 제외하면 린네의 방 역시 여타 객실과 다를 게 없다.
방석도 없이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채 명상 중인 린네.
앨리스가 언제 그녀를 찾아도 린네는 항상 저 상태 그대로였다.
게헨나에는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정통파 마녀도 적지 않지만 린네는 도가 지나치다.
하루 16시간 수련 이후에 휴식이나 여가를 보내는 게 아니라 명상이라니.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앉아라.”
앨리스가 앉고 나서야 린네의 눈꺼풀이 올라간다.
깊고 차가운 묵빛의 눈동자가 앨리스에게 쏘아졌다.
“그와 동침했어요.”
심장을 칼로 저미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에 피부가 따가워지는 걸 느끼며 조심스레 작은 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시우가 병풍 뒤로 돌아가 뽑아낸 정액이 있었다.
혹시 몰라 자신의 체액도 몇 방울 넣은 뒤 ‘일단은 관계한 것’으로 위장한 것이다.
그는 왜 앨리스를 돕는지 말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다 한들 앨리스가 염탐꾼 노릇을 했으니 그는 그대로 신중함을 기하는 것이리라.
다만 그의 도움을 받아 거짓 증거를 제출한 이상 시우의 줄을 타는 건 기정사실.
이것이 앨리스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두근거리려는 심장을 느린 호흡으로 억제한다.
아무리 향월루가 좁아도 린네의 방부터 다른 객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정말 관계를 맺었는지 말았는지는 소리로 판별할 수 없을 것이다.
시우와 입을 맞춰 두었으니 이어진 린네의 의심만 피할 수 있다면 완전 범죄가 성립된다.
“…….”
무섭다.
만약 거짓임이 발각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목을 잘라버릴 것 같은 저 무표정이.
“어땠지?”
이튿밤 간 그의 용태를 보고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린네.
그녀가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땠냐니….”
지나치게 두루뭉술한 질문이었다.
“남자는 처음이었는데…. 조, 좋긴 좋았어요.”
하지만 강제로 섹스시켜놓고 ‘어땠냐’라고 묻는다면 달리 답할 내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보고를 받은 린네의 입술이 미동도 없었기에 엉겁결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도 만족했고요…. 성공적으로 유혹한 것 같아요.”
“특이 사항은?”
“특이 사항…. 이라뇨?”
남녀 관계는 여자들끼리 할 때와 달리 뭔가 특이사항을 체크해야 할 게 있는 건가?
하도 진지한 표정으로 묻기에 살짝 어벙해진 앨리스.
“특이 사항은 없었나?”
게다가 두 번이나 물어온다.
앨리스는 침을 티 나지 않게 삼켰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물음에 답하는 건 역시 껄끄럽다.
하물며 그녀는 시우와 정말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니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특이사항 말씀하시는지….”
“마력의 파동 같은 것.”
“……?”
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된다.
섹스랑 마력 파동이랑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
린네의 침묵이 길어졌다.
3.
“좆됐네….”
오랜만에 자위로 한 발 빼냈다.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자위까지 했으니 몸이 죽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눈이 말똥말똥했다.
적어도 돌아온 앨리스로부터 린네의 반응을 확인하기 전까진 눈을 붙이긴 그른 것 같았다.
린네가 겉보기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앨리스가 사주받은 임무는 전혀 다른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린네는 구태여 ‘성관계’를 해 올 걸 지시했다.
물론 단순히 앨리스를 효율적인 감시책으로 쓰기 위해 소위 ‘미인계’를 강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한번 살을 포갠 남녀의 심리장벽은 극도로 내려가니 말이다.
“음….”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만약 린네가 마력 증폭에 대해 단서를 쥐고 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앨리스를 이용한 것이라면?
가뜩이나 제 발이 저린 형국이라 이쪽으로도 가설을 설립해 놓지 않을 수 없다.
그럴만한 건수가 있을까?
마력 증폭 현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꽤 되지만 하나같이 배신할 염려 없는 최측근 또는 연인들이다.
정보의 누설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린네가 낌새를 차릴만한 사건이 있던가?
“뭐지…. 뭐지….”
끙끙거리며 머리를 싸매던 중 뇌리를 스치는 섬광 같은 기억.
“어….”
있다.
분명히 아주 유력한 순간이 있다.
왜 그걸 아직까지 떠올리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삐걱 삐걱
그때 마루를 밟는 두 겹의 발소리가 방으로 가까워졌다.
하나는 앨리스의 것, 다른 하나는 린네의 것.
“꺅!”
린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앨리스를 시우에게 밀었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다 곧장 그녀를 부축한 시우.
뭔가 잘못됐나 싶어 린네를 보았으나 여상하다.
언제나처럼 가면 같은 무표정이었다.
“스승님?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앨리스가 거짓말을 들켰던 확증은 없었기에 우선 서로 입을 맞췄던 대로 연기했다.
즉, 두 사람은 관계를 맺었고, 시우는 아직 린네가 앨리스에게 지시한 바를 모른다는 설정.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리고 이어진 린네의 말에 깨달았다.
“내가 보는 앞에서 관계를 맺어라.”
역시 린네는 시우와 엘로아가 관계하는 모습을 봤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