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53화 (653/917)

#653

1.

“흣…!”

앨리스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간밤의 악몽으로 흘러내린 진땀이 차가운 방 공기와 맞닿자 서늘함이 배가 되었다.

두근대는 심장. 낯선 풍경. 밤새 타들어 가다 꺼져버린 화로. 휘영찬란한 달빛.

살짝 열린 창틈으로 들이닥친 찬바람이 소매 새로 날아들자 한결 정신이 들었다.

“아…. 맞아, 그랬지….”

여기는 로지의 저택이 아니다.

검의 마녀의 향월루이다.

그녀는 경매장에서 팔려 신시우의 시종이 되었고, 린네로부터 그를 유혹해 정보를 빼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숨을 고르며 현실과 꿈의 경계를 가르던 앨리스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이불을 휙 젖혔다.

몸 상태를 확인한다.

먼저 임시로 지급받은 실내용 드레스.

조금 흐트러져 있긴 하지만 잠결에 뒤척인 정도다.

속옷도 세이프. 그대로다.

딱히 하복부의 열감이나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아….”

지난밤 잠든 사이 덮쳐진 것은 아닐지 우려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에 안도를 느끼며 동시에 낙담을 느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의식이 없는 사이에 당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라는 상념이 낙담의 원인이다.

그러고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이부자리는 앨리스의 것을 제외하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가뿐한 몸을 일으킨 앨리스는 복도를 걸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한 복도.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걷고 있자니 저 멀리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챙! 채채챙!

음원지를 쫓아 걸어간 앨리스가 마주한 풍경은 격돌 중인 린네와 신시우였다.

신시우의 경우 창을, 린네의 경우 검을 뽑아든 채 연무장 한가운데서 맞붙고 있다.

서로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대련 혹은 훈련의 일환이리라.

두 사람이 진심을 다한다면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앨리스로선 그림자조차 눈으로 쫓지 못할 테니 말이다.

스승과 제자가 대련하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앨리스도 견습마녀 시절엔 스승님과 마법 전투를 하곤 했었다.

린네는 이명부터 검의 마녀로 유명한 검사이고, 일전 겨뤄본 바 신시우 역시 창술에 일가견이 있으니 둘이 사제관계가 된 것도 썩 이상하지 않겠구나 싶다.

잠시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두 사람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

그보다 신시우, 저 남자는 정말 강하다.

린네가 누구인가?

티페레트 공작과 같은 이단아, 다들 마법으로 싸우는 마녀 사이에서 칼춤을 추는 검귀이다.

아무리 서로 힘을 뺐다지만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그녀와 수를 나누는 신시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패배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뭐야….”

대련을 엿본 지 불과 5분 만에 앨리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빠악!

흉맹한 반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창대가 린네의 어깨를 때렸다.

인간의 피륙이 연주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가격음과 함께 휘청이는 린네의 신형.

그저 그런 시늉을 한 것이 아니라 본래는 관자놀이를 후려칠 생각으로 가해진 타격이 빗겨난 것이었다.

앨리스가 더욱 놀란 건 그 뒤에 이어진 린네의 반응과 시우의 태도였다.

저건 아마도 사고.

합의된 것 이상으로 힘이 들어가며 생긴 불상사일 터.

그렇다면 당장 중단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인데….

기우뚱 넘어질 뻔했던 몸을 탁월한 밸런스 감각으로 잡아챈 린네가 방금 일격의 빈틈을 틈타 신시우의 팔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핏!

정확히 어떤 공방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몇 차례 뒤엉키고, 서로를 걷어차고, 팔꿈치를 내지르고, 흉흉한 무기를 연거푸 휘두르던 두 사람이 갈라서자.

“후우…. 후우….”

신시우의 팔이 축 늘어진다.

고통으로 불만스레 찡그려진 미간.

걷어붙인 소매 아래론 전완근이 북 찢어져 있었다.

샘솟다시피한 혈액이 손끝을 타고 지면에 흩뿌려지는 와중에도 그는 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창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은 채 비스듬히 린네를 겨눌 뿐이다.

린네 역시 어깨의 상태를 점검하듯 몇 번 휘둘러보더니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검을 다른 손에 바꿔 쥐었다.

두 사람 모두 조금도 전의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붓한 사제간의 기술교류라기엔 너무나도 과격하게, 차라리 두 명의 검투사를 보고 있는 느낌으로.

유혈이 낭자하던 칼춤은 보이지도 않는 기술에 얻어맞은 시우가 흙바닥을 구르는 것으로 끝났다.

상식 밖의 풍경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동양계 마녀가 두 사람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졌던 살이 아무는 것을 봐서는 전문 치유사 내지는 조율사.

능숙한 손길로 처지를 마친 예빈은 나오던 길 그대로 앨리스와 마주쳤다.

2.

암울한 처지이다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도로 객실로 돌아온 앨리스는 자신을 예빈 스미르나라고 소개한 마녀와 대화를 나눴다.

얼마 전 잡혀 온 신시우와는 달리 그녀는 꽤 오랜 기간 향월루에서 머물렀다고 하며, 얼마 전부터는 치유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일주일간 시우를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인 만큼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방금 저게 대련이라고?”

“네.”

“대련 두 번 하면 사람 잡겠다. 서로 피도 났는데? 치료 마법 받을 정도로 다쳤는데?”

“그게 실전에 가깝다고….”

예빈의 말에 따르면 린네와 신시우는 저 대련을 하루 16시간 그것도 모자라 주 6회를 반복한다고 한다.

입에서 대신 단내가 느껴지는 정신 나간 스케줄이 아닐 수 없다.

하긴 그 정도 정신이 나가 있으니 공적이요, 공적의 제자로 떡하니 들어갔겠지.

“나머지 시간엔 뭘 하는데?”

“밤에는 한 시간 정도 마사지를 해드리는데….”

그녀의 입에서 마사지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앨리스는 옳거니 싶었다.

예빈에 대해서도, 그녀가 지켜봐 온 신시우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은 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본론을 터놓고 말하기도 어려운 형국인 것도 사실이다.

눈앞의 마녀가 맘 좋아 보이는 순한 인상이라지만 실제로는 어떤 성격일지 모른다.

앨리스처럼 린네에게 모종의 지시를 받았을지 모르고 말이다.

“어떤 마사지인데요?”

짐짓 물어보자 곧장 입질이 왔다.

“그냥 치유제를 몸 전체에 발라 드리는 건데요…. 그냥 그게 다에요. 지쳐서 바로 잠들거든요.”

점잖게 앉아있던 예빈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더니 곧장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렇지.

밤마다 야릇한 짓을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같은 방을 사용할 리 없다.

혼욕을 할 리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마땅히 할 일도 없이 치유사라는 어정쩡한 직책을 맡고 구류 당한 예빈과 명목상 제자인 시우 중 누구에게 권력의 추가 기울었는지도 불 보듯 뻔하다.

매우 높은 확률로 관계를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생이 많네.”

감을 따야 한다고 해서 굳이 나무 꼭대기까지 오를 필요는 없다.

이번에도 가지를 잡고 넌지시 흔들어 보았다.

“싫진 않아?”

“아뇨, 차라리 이렇게라도 역할이 생겨서 다행이에요.”

“응...?”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대화할 사람도 없이 있다가 할 일이 생기니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고요.”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경멸의 기색을 내비칠 뻔했다는 걸 알고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니까 몸이나 팔면서 얻은 안전에 ‘다행이에요’라고 말하고 있단 말이지.

이제껏 앨리스가 했던 일과 전혀 다를 게 없으며, 또 앨리스가 해야 하는 일과도 다를 게 없다.

그러니 예빈의 언행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건 앨리스 자신에 대한 혐오가 투사된 거겠지.

그 이후로 진행된 대화는 큰 실속 없이 끝났다.

시우에게 정보 유출을 자제해 달라는 귀띔을 받았던 예빈이 말을 조심했고, 앨리스도 괜스레 생각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3.

밤이 되었다.

헥센나흐트는 언제나 밤이니 시간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명목상 시우의 시종인 앨리스지만 정작 그가 온종일 대련에 매여있었기 때문에 할 일이 없었다.

예빈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치고 있자니 눈치가 보였기에 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마루를 깨끗이 닦았다.

손발톱도 저 혼자 깎아본 적 없는 앨리스로선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허드렛일이었다.

별장보다 작은 고택이 직접 청소를 하게 되자 어찌나 넓은지 예빈이 옆에서 거들었음에도 손발이 다 부르트는 것만 같다.

“그어어어….”

마지막으로 객실 앞쪽 복도의 뒷정리를 하고 있자니 저 끝에서 예빈과 신시우의 모습이 보인다.

“앨리스 님, 먼저 지나갈게요.”

“응, 나도 이것만 갖다 놓고 들어갈게.”

좀비처럼 늘어져 앨리스를 발견하지도 못한 신시우와 그를 부축하며 객실로 들어서는 예빈.

문 틈새로 슬쩍 보자 들어오자마자 옷을 훌러덩 벗고 이불 위에 눕는 신시우의 모습이 보인다.

얼추 알고는 있었지만 옷을 벗으니 몸이 꽤 흉악하다.

반반한 얼굴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무슨 살인병기 같은 근육질이었다.

“매번 미안하네요. 저만 편히 누워서.”

“괜찮아요, 마력도 빠방하고 또 이게 은근히… 핫!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래대로라면 양동이를 치우러 갔어야 했겠지만….

앨리스는 숨을 죽인 채 방 안의 분위기를 살폈다.

“별일은 없었어요?”

“네, 그냥 그렇죠 뭐. 아 오늘은 앨리스 님을 도와서 청소도 했어요.”

“어쩐지 좀 더 깔끔하던데요.”

“거짓말, 눈치도 못 챘으면서.”

“아하하….”

그의 등허리에 올라타 자연스럽게 어깨부터 등을 주무르는 예빈.

둘 사이 오가는 대화도 행위도 앨리스의 예상과는 달랐다.

섹슈얼한 토크는커녕 담백하기 짝이 없는 대화 로그.

마사지도 앨리스가 받았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그냥 마사지다.

특별히 은밀한 터치 따위는 없다는 말.

앨리스가 있으니 눈치를 보는 건가?

아니 그럴 정신이 있는 사람이 왜 굳이 앨리스를 시종으로 사달라고 떼를 썼으며, 왜 굳이 같은 방을 쓴단 말인가?

“뭐, 금방 벗겨질 가면이겠지….”

이제 머지않았을 것이다.

앨리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틀.

그 안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덮쳐 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앨리스.

그렇게 날이 밝고 다음날이 지났음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거 야단이네.”

남은 시간은 12시간.

그제야 앨리스는 뭔가 잘못 됐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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