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51화 (651/917)

#651

1.

대련에서 부상을 입은 시우를 치료해야 하는 예빈.

마력을 충전하기 위해 온종일 강제 온천을 해야 했던 그녀는 문자 그대로 푹 익어 있었다.

얼굴은 물론 타월 위로 드러난 가슴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을 정도다.

“괘, 괜찮아요?”

“네에…. 참을 만해요….”

상당히 지쳐 보이는 그녀와 같은 탕에 들어간 시우.

현시점 시우에게 있어 절대 배신할 리 없으며 가장 믿을만한 조력자는 예빈이다.

그녀의 성품과 성향이야 익히 알고 있으며 이모저모 인연이 깊지 않은가?

“그런 일이….”

따라서 시우는 예빈에게 오늘 입수한 모든 정보와 경과를 전해주었다.

아르카나 타운의 생김새나 헥센나흐트 전체의 구조.

거짓말을 통해 수은의 마녀를 구매, 시종으로 삼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

금화의 마녀로부터 수상쩍은 경고와 제안을 받았던 것까지 말이다.

“그러면 수은의 마녀는 어디 있나요?”

“스승님이 잠시 데려갔어요. 곧 여기로 올 거에요.”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찰싹 달라붙은 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우를 올려보는 예빈.

두 사람의 거리가 유달리 가까운 건 혹시 밖으로 새어나갈 소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함이다.

“음….”

본래대로라면 수은의 마녀를 대탈출 팀에 영입한 즉시 정보 대부분을 공유할 예정이었다.

수은의 마녀는 마녀대로 입수한 정보가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 혹시 모를 안전고리로 마냐와 말리샤를 걸 생각이었다.

돈독한 그들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두 사람의 탈출까지 돕는다면 앨리스도 선뜻 도울 확률이 높았으니까.

경매장의 매대에 올라가 물건 취급을 받고 노예로 전락한 그녀라면 이해관계가 일치하겠지.

굳이 향월루 외진 곳에 있는 욕실로 부른 것도 그런 이유였다만….

“당분간은 전부 비밀로 한 채 상황을 엿봐야겠어요.”

“전부 비밀로요?”

“대부분은요. 아무튼, 그러려면 연기를 해야 할 텐데. 입을 좀 맞춰주실 수 있나요?”

“그럴게요.”

이야기가 달라졌다.

금화의 마녀.

분명 처음 만난 마녀이고 심지어 클리포트 소속이다.

하지만 그녀가 넌지시 던진 경고,

린네가 겉보기보다 심계가 깊다는 말은 충분히 주의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영문모를 호의를 내비치며 린네에게 비밀로 하고 찾아오라는 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물론 당장 최악이 아닌 상황에서 함정인지 뭔지 모를 초대에 응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허투루 넘기기도 뭔가 찜찜하다.

거기에 린네가 시우를 떼어놓고 앨리스와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모른다.

앨리스의 포지션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밑천을 까발리는 건 자칫 완벽한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수은의 마녀에게 끌렸었고, 시종으로 부리고 싶어 노예로 선물 받은 거 맞죠? 그리고 검의 마녀와의 관계는 우호적인 사제 관계고?”

“네, 아마 그런 느낌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예빈에게 한 가지만 더 당부한다.

가장가장가장 들켜서는 안 될 제1순위 비밀, 성교 시 발생하는 마력 증폭 및 낙인의 복사이다.

“절대 관계는 맺지는 않을 겁니다. 예빈 씨도 꼭 주의해주세요.”

이건 계획에 하등 도움이 안 되면서 걸린다면 아주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탈출하는 시점까지도 오픈할 생각이 없었다.

“네, 물론이죠.”

시간에 맞춰 대화를 끝낸 것 같다.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2.

승자는 잡아먹고 패자는 잡아먹힌다.

승자는 유린하고 패자는 유린당한다.

고대부터 인류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이 규칙은 마녀를 예외로 두지 않았다.

도리어 천상의 미색을 지닌 마녀이기에 추잡한 욕망을 지닌 이에 손에 떨어질 경우 겪게 될 일은 뻔했다.

당장 지난 며칠 간 침묵의 마녀에게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능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만 생각해도 속이 메슥거리는 앨리스였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어차피 예쁜 여자와 동침할 기회인데 그렇게 거부감을 가질만한 일이냐고.

여존남비의 사상이 강한 마녀 사회에서 나고 자라 레즈비언 성향이 있는 앨리스라면,

그것도 언제 어디에나 동성인 마냐 말리샤를 대동해 질척한 문란한 생활을 보냈다면,

그런 것쯤은 별일 아닐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레즈이기 전에, 마녀이기 전에 앨리스는 여자다.

하고 싶지도 않은 행위를 강요받고, 눈곱만큼의 친애도 느껴지지 않는 여자와 억지로 동침하는 건 강간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남자를 유혹해야 한다.

사흘 안에 그와 관계를 맺고 그 증거로 정액을 제출해야 한다.

일전에도 마냐와 말리샤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몸을 내어주려고 했었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우욱….”

갑자기 배 깊은 곳에서 왈칵 올라오는 구역질을 느꼈다.

어려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도 윤기 넘치고 아름답게 찰랑이는 나머지 은사(銀絲)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은발.

흑요석 거울처럼 검고 우아한 눈동자.

뽀얀 피부가 많은 마녀 중에서도 유독 하얀 편인 보드라운 피부.

동성 뿐 아니라 남성까지도 거뜬히 매혹할 자신의 매력을 믿었으니까.

그에겐 미궁에서 한 번 거부당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매력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명목상 티페레트의 제자였으니, 스승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런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남자 마녀라 해도 평소 바퀴벌레 보듯 멸시하던 남자에게 아양을 떨어야 하는 처지에 자괴감이 느껴졌다.

마냐와 말리샤의 안위가 앨리스의 처신에 달려있다는 점에 부담감이 가중되자 속이 뒤틀리는 것이다.

“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욕실로 구비구비 뻗은 정원을 걸으며 곱씹듯 되뇌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지?”

당장엔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요구에 머리가 멍해졌던 앨리스.

차분히 길을 걷다 보니 깨진 유리처럼 수상쩍은 조각이 밟힌다.

그 조각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눈다면 다음 세 가지.

둘은 어떤 관계일까?

왜 신시우는 자신에게 선물까지 해준 스승, 린네 앞에서 사소한 거짓말을 했을까?

왜 린네는 신시우를 마음대로 할 힘과 권력, 기반까지 갖고 있으며 그의 감시를 앨리스에게 맡겼을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꿍꿍이를 지니고 있다면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앨리스는 당분간 린네의 지시를 따를 생각이다.

발목을 잡아끄는 무거운 상념에도 어느덧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실에 도착했다.

질질 끌 필요 없다.

그가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욕조로 앨리스를 끌고 가려 했던 이유는 뻔하다.

앨리스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이제부터 더럽혀질 시간이다.

그녀는 옷을 벗고 가운으로 몸을 가렸다.

금방 거칠게 벗겨질 것이 뻔하리라 생각하며 말이다.

“어….”

그리고 발견했다.

가슴이 물 위에 둥둥 뜰 정도로 거유인 동양인 마녀와.

아주 찰싹 달라붙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신시우를 말이다.

3.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볼게요.”

“네, 이따 방에서 뵐게요.”

동양인 마녀는 멍하니 서 있는 앨리스에게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흐느적거리는 몸놀림으로 방으로 돌아갔다.

욕탕 안에 남은 사람은 앨리스와 시우뿐.

“들어오실래요?”

싱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욕조를 가리키는 시우.

이전까지는 린네와 시우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알력과 앞뒤가 어긋나는 그의 행보 탓에 알쏭달쏭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당당하게 혼욕을 자행하는 그의 모습에 앨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재평가가 시급했다.

역시 그냥 밝히는 남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저 심약해 보이는 여자도 그가 선물이랍시고 받아든 성노예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돼?”

“그럼요, 어차피 다 가리고 있잖아요.”

허리끈 한 번만 잡아당기면 훌러덩 풀려버릴 이 차림을 ‘다 가리고 있다’라고 말해도 좋은 건지….

하지만 어차피 선택지는 없다.

앨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조심스레 나무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마력 한 줌 사용할 수 없게 된 몸이다.

상품으로 올라가기 전 꼼꼼한 목욕을 받았다지만 긴장과 절망 속에 끈끈한 식은땀이 배어나 찝찝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한약 냄새와 긴장과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내리는 뜨끈한 온천수.

이런 상황인데도 마음이 푹신푹신하게 녹아내린다.

“네 시중을 들면 되는 거지? 뭘 하면 돼?”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전부 속으로 삼킨다.

괜한 짓을 하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검의 마녀가 지시한 것만을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거다.

요지는 그녀의 지시라는 걸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유혹하며 동시에 그를 감시할 것.

“고생 많으셨으니까 푹 쉬세요.”

욕조에 들자마자 목욕 시중을 들라느니 뭐니 변태적인 요구를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눈을 감고 등을 기대기나 할 뿐 별다른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신사적인 척이라도 할 셈인가?

한참의 침묵 이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험한 꼴 당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네요. 걱정 마세요. 저는 뭔가 강요하거나 실험을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언뜻 듣기엔 그저 안심시켜주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미 색안경을 쓰게 된 앨리스에게는 그다지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를 대하는 린네의 태도도 미심쩍지만 어찌됐건 신시우는 고작 며칠 만에 공적의 제자가 되었다.

마냥 선량하고 착한 인간이 그 짧은 사이에 공적 사회 속에 녹아들 수 있겠는가?

겉과 속을 철저히 분리할 수 있는 인종이라 봐야 한다.

따라서 제 밑에 시종으로 들어왔으니 걱정 말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으며.

뭔가 강요할 생각 없다는 말도 알아서 처신 잘하라는 완곡한 압력행사로만 들렸다.

“스승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그, 그냥 시중을 잘 들라는 말만….”

“그 외에는 없고요?”

“딱히 없었어.”

본심을 감추고 상황을 살피려는 시우.

본성을 알 수 없는 남자 마녀의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임무를 하달받은 앨리스.

서로 눈치를 살피는 와중에 원활하고 진솔한 대화가 오갈 리 없었다.

“…….”

괜찮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이성과의 혼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아까 그 마녀와 찰싹 달라붙어 있던 꼴만 봐도 그는 상당한 호색한일 것이다.

작정하고 유혹한다면 동침이 어려울 리 없다.

그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절망을 느껴야 할지 애매한 감정을 느끼며 앨리스는 깊은 한숨을 물속에 가라앉혔다.

다음화 보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