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49화 (649/917)

#649

1.

세상에는 사회적 통념이라는 게 있다.

번거롭게 입에 올리지 않아도 어련히 동의하는 룰.

예를 들자면 힘들면 쉬고 있으라는 선임의 말에도 일을 거드는 것.

예를 들자면 술자리 끝나고 아이스크림 사준다는 친구를 따라 편의점에 들어섰을 때 하겐다즈를 고르지 않는 것.

이런 암묵적 규칙이 모여 인간관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우의 요구는 과도했다.

선물을 주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물건을 집어든 것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린네는 친구나 맘 좋은 선임이 아니었고,

시우가 고른 물건은 하겐다즈 따위와 비견될 만한 값의 물건이 아니다.

당연히 무리한 수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강행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런 좋은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헥센나흐트에서 탈출하려면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조력자는 확보해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다.

“어째서지?”

따끔따끔한 린네의 시선이 가슴팍을 찔렀다.

아무것도 눈여겨보지 않는 듯하지만, 실은 꽤 많은 것을 꿰뚫는 통찰안 앞에서 여러 요소를 고려했다.

호가를 거듭하며 껑충 뛴 앨리스의 가격은 어느덧 5세대 다목적 스텔스 전투기의 가격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막대한 지출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것이다.

“물론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소유주는 스승님이어도 좋습니다. 저는 그저 빌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시간이 많다는 보장도 없기에 빠르게 추가 설명을 덧붙인다.

“이 정도로 원하는 마녀가 많으니 훗날 비슷한 가격에, 혹은 웃돈을 얹고 팔 수도 있을 겁니다.”

“…….”

“여차하면 붉은가지를 처분해서 보태셔도 좋습니다.”

그제야 린네의 눈이 살짝 놀란 듯 치켜떠진다.

주무장으로 사용하던 예장을 선뜻 팔아치우겠다는 말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엔 두 겹의 담보가 깔렸다.

하나는 앞으로 어차피 차원이동식을 연구할 예정이라는 것.

시우는 이미 게헨나에서 아쿨라까지 붉은가지를 불러들이는 걸 성공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조금만 붙들고 있으면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부차적이고 진짜 담보는 따로 있다.

린네 본인의 체면이다.

어찌됐건 그녀는 제 입으로 선물과 투자를 약속했다.

그 와중에 시우의 물품을 팔아 치우면서까지 자금을 충당하는 것 낯이 서지 않을 터다.

마녀란 하나같이 자존심과 겉치레를 중시하니 말이다.

“흐음.”

원석의 가치를 가늠하는 듯한 눈초리.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 팽팽한 긴장감 위에서 껄끄러운 침묵이 구른다.

빌어먹을.

역시 이런 건 적성에 안 맞는다.

백 년 족히 묵은 능구렁이와 벌이는 머리싸움이라니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아직 내 질문엔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 마녀를 원하지?”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투에 시우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걸로 일차 관문은 통과.

린네의 의심을 일축하는 일만이 남았다.

“아…. 그건 말이죠…. 꼭 말씀드려야 하나요?”

“개인적인 흥미다.”

만약 추궁이 이어진다면 본래 목적을 들킬 수도 있다.

따라서 시우는 간청이 이뤄질 확률을 낮추되 의심을 살 확률도 함께 낮추는 것을 택했다.

“이상형이어서요. 사실 스승님과 함께 있던 그때도 작업 걸다 까였거든요.”

린네의 얼굴이 바삭바삭 굳었다.

조금도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살짝 황당한 모습이었다.

“…….”

“모처럼 노예로 살 기회인데 사고 싶습니다. 이 부탁 들어주시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시우의 두 번째 전략.

꿍꿍이를 빤히 보이는 어처구니 없는 변명으로 덮어버리는 것.

동시에 너무도 어처구니 없기에 그것이 변명으로 생각되지도 않게 만드는 일타쌍피의 전략이다.

일반적인 시점에서 본다면 허우대 멀끔한 놈이 맘에 드는 여자 한번 어떻게 해보겠다고 속없이 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시우는 다른 마녀가 보기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이해하고 있다.

보통은 100년에서 200년, 길게는 수백년의 기나긴 삶을 영위하는 것이 마녀.

그런 마녀의 시점에서 마녀 인생 2년 차 시우는 아장아장 걷는 응애나 다름없다.

어린애가 떼 좀 쓰는데 거기에 꿍꿍이가 있냐는 둥 신경을 쓰겠는가?

“추잡하군.”

흥미와 기대감이 급속도로 빠져나간 것인지 한숨을 쉰 린네.

“욕망은 훌륭한 동력원이죠.”

시우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태연하게 받아쳤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심정으로 되는대로 지껄이는지라 솔직히 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약속은 약속이다.”

다행히 린네는 올바른 남녀 관계에 대해 설파하거나, 강해지기 위해선 절제가 필요하다는 설교 따위를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종을 흔들어 급사를 부른 뒤 낙찰까지 계속 입찰하도록 지시했을 뿐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린네 앞에 시우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2.

상처 없이 생포된 20 위계의 대마녀를 원하는 마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미리 자본을 처분한 마녀도 있었고, 열댓 명씩 모여 돈을 함께 지급한 뒤 소유권을 나눠 가지려는 마녀도 있었다.

그러나 린네는 동아시아를 주름잡는 야쿠자 조직의 배후다.

동네에서 꺼득럭대는 깡패가 아니라 정치권과의 유착은 물론 연예 및 건설 사업에도 깊게 관여한 조직.

더군다나 원체 검소한 성향 탓에 상납금을 모두 돈다발째 처박아 놓은 린네의 현금 동원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가치를 자세히 헤아리려면 머리가 아득해지는 금액을 턱 입찰하며 수은의 마녀를 낙찰받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급사의 안내를 받아 경매장 뒤편 응접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큰돈이 오가는 거래이기 때문에 즉석에서 계약서와 비용지급을 처리하는 모양이다.

“기다리고 있어라.”

“언제 오시나요?”

“30분 정도 걸린다.”

아무리 갑부인 린네라도 그만한 현금을 지급하려면 시간이 필요한지라 시우 혼자 덩그러니 응접실에 남겨지게 되었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마녀는 없었다.

하긴 그만한 거래를 했으니 VVIP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하겠지.

시상식처럼 레드카펫을 멋지게 깔아놓은 응접실은 근사했다.

제머나이 저택의 응접실에 온 듯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어느 곳이나 부자들 취향은 비슷비슷한가 보다.

“담배 땡기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보자니 드는 생각이다.

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에멘탈 치즈처럼 변해버릴 일상을 담배도 없이 버티기엔 너무 버겁다.

그때.

“피울래?”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하얀 장갑이 끼워진 손가락 사이에는 희끄무리한 연기를 흩뿌리는 연초 한 대가 끼워져 있다.

필터 쪽에 둥글게 묻은 립스틱 자국이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싫음 말고.”

휙 뒤를 돌아보자 생글생글 웃음을 짓는 금발의 마녀가 있었다.

눈동자조차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단발이 무척 잘 어울리는 것과 동시에 어깨부터 윗가슴까지 훤히 내놓은 드레스가 인상적이다.

오늘 경매를 도맡아 진행했던 ‘금화의 마녀’는 소파 등받이에 기대던 팔꿈치를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반가워. 리디아 마그누스야. 안 잡아먹으니까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고.”

“…….”

“정말 안 피워? 좋은 건데.”

살가운 말투인데다가 케이스에서 담배까지 꺼내 권하는 리디아였으나 겉모습에 속아 넘어갈 용의는 없다.

비앙카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끔했지.

어딜 봐도 대마녀인데다가 태연히 인신매매를 자행하는 마녀를 두고 외모에만 정신 팔릴까.

“한 대 주시죠.”

하지만 얼추 견적이 나왔다.

아무리 공적이라도 같은 마녀고 사람이다.

이 도시를 살피며 시우가 느낀 감상이었다.

뒷일을 생각 않고 대뜸 개판부터 치는 마녀는 공적 중에도 극소수라는 것이다.

“공적이세요?”

“일단 클리포트 소속이었지.”

“저도 가져다 파실 건가요?”

“그것도 구미가 당기네.”

초대면부터 ‘범죄자세요?’ ‘네 범죄잡니다’ ‘납치하시게요?’ ‘고민 중이에요’ 같은 정다운 대화가 오갔다.

이미 린네와 잔뜩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인 지경이라 기가 쭉 빨린 상태다.

더 할애할 힘이 없었다.

리디아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단안경처럼 만드는 기행을 선보이더니 말했다.

“넌 얼마일까? 잘만 하면 나라 하나를 살 수 있지 않을까?”

“본론부터 말해주실래요?”

“배짱 두둑하네. 마음에 들었어.”

금화가 짤랑이는 듯한 명랑한 웃음소리.

그러면서도 기품과 강자 특유의 여유가 느껴지는 자태.

“까탈스러운 검의 마녀가 데리고 있다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나름 재간둥이였네. 린네가 그런 코드를 좋아하나?”

“그럼요, 제자로까지 삼아주셨는걸요.”

“…….”

라디오 코드를 뽑은 것처럼 웃음이 뚝 멎었다.

시시각각으로 뒤바뀌던 표정.

그다지 신기한 말도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유달리 숙고한다.

“명목상은 티페레트 공작이 스승이라고 들었는데?”

“옛날이야기죠. 중요한 일입니까?”

의도적으로 적당히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이곳은 야생이다.

만만해 보이는 사냥감에겐 도끼를 꽂으려 드는 풍조인 만큼 차라리 냉담해 보이는 게 형편에 좋았다.

다행히 레퍼런스는 차고도 넘쳤다.

이제껏 만나 왔던 인물 중에 범상치 않았던 마녀가 좀 많아야지.

내뱉고 보니 제 연기에 감탄 할 만큼 썩 그럴듯했다.

이 정도면 제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고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린 마녀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재밌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어.”

다소 거친 발언에도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금화의 마녀.

또 머리싸움이라면 사양이다.

오늘 쓸 머리는 다 썼다. 빨리 떼어내기나 하자.

단둘이 있기엔 껄끄롭기 짝이 없는 린네지만 이런 자리에선 그녀의 제자라는 지위가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이런 자리, 솔직히 불편하거든요? 담배는 고맙게 받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고객인데 편하게 있게 해주시죠.”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남자 마녀라니 신기하잖아. 구경 온 거야. 예상했던 이미지랑 달라서 곱절로 신기해. 조금 더 고분고분하고 비굴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피식 웃은 금화의 마녀는 굳이 소파를 넘어와 시우 쪽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껐다.

“재밌게 해줬으니 힌트 좀 줘볼까?”

“힌트요?”

난데없이 등장했던 리디아는 그보다 더 난데없는 말을 불쑥 꺼냈다.

“머리 굴리는 게 너만 있는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죠?”

“다들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을지 여러모로 고민 중이지. 그야말로 난세잖아?”

“그러니까 대체 그게….”

“린네는 보기보다 단순하지 않아. 하긴, 당연한 말인가?”

경고인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능에 경종을 울리기 충분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시간 나면 찾아와.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어쩌면 우리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고. 물론, 린네에겐 비밀로.”

의미심장한 말을 늘어놓던 리디아는 명쾌한 해몽 대신 명함 한 장을 올려놓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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