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
1.
기절한 채 끌려와 그대로 향월루에 구금되었던 시우와는 달리, 예빈은 ‘문’부터 의식을 지닌 채 도시를 지나왔다.
따라서 그녀에게 대략적인 헥센나흐트의 정경을 얼추 들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수평으로 넓게 뻗어진 게헨나와 달리 헥센나흐트는 수직구조의 지하도시라고 한다.
향월루는 가장 최상층에 위치한데다가 빽빽한 대나무숲에 둘러싸인 저택이었으니 주변 도시의 풍광이 제대로 보일 리 없던 셈이다.
사실 부실한 예빈의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다.
그도 그럴게 시우는 찬란한 영화와 불변의 도시, 게헨나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왔던 것이다.
당장 눈을 돌렸을 때 아무렇게나 서 있는 건물 한 채 한 채가 문화재급.
아르스마그나 타운까지 갈 것도 없이 말쿠트 갤러리만 보아도 현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화려함과 호화로움을 자랑한다.
판타지적인 풍경이라면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향월루를 둘러싼 죽림을 벗어나 도시 입구를 내려다본 시우는 상상력을 넘어서는 풍경에 압도당했다.
“와….”
흡사 대리석 채석장을 연상케 하는 널따란 공동.
현기증이 날 만큼 깊은 부경엔 디저트 타워처럼 층층이 쌓인 도시가 넘실거리는 안개에 가라앉아 있다.
까마득한 지면에서부터 뾰족하게 솟은 탑.
타운과 타운 사이를 이어주는 아찔한 도개교.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수식 승강기.
정체불명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대한 솥.
이 모든 것을 가동하기 위해 곳곳에서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와 증기 소리가 귀곡성처럼 울려오는 한편,
도시의 불빛을 머금은 안개가 깊은 바닷속 발광충처럼 빛나며 끝나지 않는 밤을 물려낸다.
지하도시라는 말에 그저 개미굴 정도를 예상했던 시우에겐 너무도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이 전부가 고작 1년 남짓한 시간 안에 만들어졌다는 것 아닌가?
수많은 마녀가 모여 힘을 합치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따라와라.”
린네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승강기.
엘리베이터라기보다는 건설현장 건물 외벽에 설치된 호이스트카에 가까웠다.
우선 제대로 된 벽이 없었고 외부가 훤히 내려다보였으니 말이다.
눈치껏 문을 당겨 닫자 몇 번 거칠게 덜컹거리던 승강기는 부유감이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도시를 향해 내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깊은 지하도시의 중간쯤 위치하는 아르카나 타운.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건 길게 줄을 지은 벽돌집과 집 사이를 가로지르는 가도, 음울하게 빛나는 가스등이었다.
막연히 내려보던 때도 거대하다고 느꼈지만, 그 안까지 내려가게 되니 한결 규모가 체감된다.
양옆이 막힌 공간임에도 밀폐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동그랗게 하늘이 잘려있는 천장을 올려보지 않으면 이곳이 지하도시라는 것조차 망각할 것 같다.
타로 타운이 르네상스, 레노먼드 타운이 벨 에포크 시대를 판타지스럽게 구현했다면 아르카나 타운은 딱 그 중간.
음울한 산업혁명 시대를 그려낸 듯한 풍광이었다.
물론 이곳에는 온종일 뗀 석탄으로 돌릴 방직기도, 하루 18시간이 넘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음….
후자 쪽은 존재할 지도 모르지만.
“여기에 전부 마녀가 사는 건가요?”
좌우로 늘어선 주택은 당장 보이는 것만 50채가량.
대부분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는 걸 보면 안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그도 그렇겠네요.”
하긴, 이 헥센나흐트가 아무리 크다 해도 게헨나보다 커다랄 리 만무했다.
이만한 너비에 그 많은 공적과 추방자를 수용하려면 필연적으로 거주면적이 빽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삼 최상층에 따로 저택을 마련한 린네가 이 도시에서 적지 않은 발언권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헨나의 상황에 맞춰 비유하자면 작위를 지닌 귀족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데 저희 어디 가려고 나온 건가요?”
“알막(Almack’s) 클럽이다. 시간은 넉넉하겠군.”
일반적인 현대인이라면 클럽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을 울리는 EDM과 레이저 조명을 연상할 것이다.
하지만 마녀 생활 짬밥이 좀 되는 시우는 그녀가 말하는 클럽이 사교모임을 뜻함을 짐작했다.
붉은 지붕 살롱처럼 마녀끼리 모여 노닥거리는 장소려나.
가서 무엇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
어차피 현시점에서 탈출하기란 아무리 용을 써도 불가능할 것이다.
최대한 주변 지형을 눈에 익혀놓고 있자니 슬슬 다른 마녀의 모습도 보였다.
대부분 현대 복식이거나 아주 간촐한 드레스를 입고 다녔다.
“어머.”
“어?”
시우와 린네를 본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먼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거나 멍하니 굳으며 제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 호기심과 욕망이 가득한 눈빛이 되었다가, 옆에 있는 린네를 다시 한 번 보고는 욕설을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쉰다.
이 정도는 예사고 창틀에 팔을 걸치고 담배를 피우던 한 마녀가 곰방대를 떨어뜨리기도 했으며, 가로등에 부딪히는 마녀도 있었다.
“…….”
이런 관심은 짐작하고 또 우려했던 바다.
마녀 사회에서 시우는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사.
시우가 처음 게헨나에 입성했을 때 달라붙었던 마녀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다.
심지어 옆에 스승님이 있었는데도 그 정도였으니 훨씬 물불 안 가리는 공적이라면 당장 흉악한 마수를 뻗어올 가능성도 있다 여겼는데….
놀랍게도 주택가를 벗어나기까지 그 어떤 추파도 없었다.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린네가 액막이 부적 역할을 해주었음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찍어낸 듯 비슷한 주택단지를 벗어나자 공중에 매달린 듯한 도개교가 시우와 린네를 맞아주었다.
겨우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비좁은 다리는 광장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위에 올라서자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울렸다.
“이 소리는 뭔가요?”
“소리?”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요.”
“헥센나흐트의 최하층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번 확인해도 될까요?”
린네의 허락을 받고 난간에 매달리듯 내려보자 최상층에서는 안개 탓에 볼 수 없던 나머지 절반 분의 풍경이 펼쳐졌다.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하자 지면 대신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는 도시의 밑바닥이 보였다.
헥센나흐트는 마치 우물과 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던 것이다.
컨테이너를 잔뜩 실은 화물선 몇 척이 둥둥 떠다니는 와중에 거대한 크레인이 증기를 뿜으며 인접한 타운으로 화물을 끌어올린다.
둥근 바다를 에워싼 건 보더 타운에 있던 것과 흡사한 커다란 원, ‘문’.
직경 2km 넘어가는 거대한 인조 구조물의 위용도, 찬란하게 빛나는 테두리도 다름이 없다.
놓여있는 방향이 수직이냐 수평이냐 정도의 차이가 끝이다.
애석하게도 마력의 흐름을 분석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더 정밀한 분석을 위해선 저곳까지 도달해 조금 더 자세히 그 구조와 모습을 살펴야겠지.
“운치 좋은 곳이네요.”
엄밀히 말하자면 염탐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감상을 말했다.
“나는 싫어한다.”
여기서 ‘그렇군요’라고 말을 끝내면 영영 대화가 끊긴다는 건 지난 경험으로 배운 사실.
그녀와 말을 잇고 싶다면 주도적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어째선가요?”
“시끄러우니까.”
나름 이해가 가는 답변이었다.
사방에서 들리는 시계가 딸깍거리는 소음도 그렇고 왕왕 들려오는 증기음도 그렇고.
이런 장소에서 숙면을 취하려면 방음 마법 정도는 필수일 듯했다.
도개교는 절벽을 파내 만들어진 광장과 이어져 있었다.
시우와 린네가 승강기를 타고 도착한 원반은 거주를 위해 따로 마련된 공간이고 절벽 안쪽에 자리 잡은 터널 같은 공간이야 말로 본격적인 아르카나 타운의 입구였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인기척과 소음이 더해졌다.
거주 구역에 있을 때는 10명 정도의 마녀가 전부였는데 이곳은 온통 마녀 천지.
게헨나처럼 옛것에 집착하는 풍조가 없는 것인지 갖은 현대 물품과 수많은 마녀의 개성 있는 옷차림이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가 도드라졌다.
“안녕? 예쁜이?”
“휘유~”
많은 인원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아니면 손에 든 술을 거나하게 들이켠 뒤였기 때문인지.
시우를 알아보고 휘파람을 불거나 추파를 던지는 마녀도 늘어났다.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무시했다.
그나저나 헥센나흐트에는 아직 ‘시민’이 없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제법 보인다.
길가에서 가판대를 펼쳐놓는 라틴계 남자나, 분홍색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관 앞에서 호객을 하는 흑인 남자가, 인력거를 끌고 있는 동양계 남자가 마녀일 리는 없으니 말이다.
예빈이 갇힌 지도 수개월이 지났으니 그 뒤로 점차 체계가 잡혀가는 것이리라.
아무튼 아르카나 타운은 성수기 명동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인파가 북적였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정신없는 발소리에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묘하게 타운 전체가 들떠 있는 듯 떠들썩하다는 걸 캐치한 시우가 물었다.
“경매가 있는 날이다. 우리도 경매를 위해 온 것이고.”
“알막 클럽? 그곳에서 인가요?”
“그렇다.”
시우는 경매는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딱 한 번 있다.
게헨나에 잡혀갔을 때 타카쇼와 나란히 단상에 서서 시청 소속 공무원에게 팔려갔었지.
“이쪽이다.”
린네는 성가신 추파를 던지는 마녀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정해진 길로만 나아갔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유독 인파가 붐비는 알막 클럽.
겉모습은 유명 포르노 회사가 매입한 병기창처럼 생겼다.
다른 마녀는 노예를 대신 대기줄에 세우며 순번을 기다렸지만 린네는 기나긴 줄을 지나쳐 다른 입구로 들어섰다.
“그쪽 신사분은….”
아무래도 멀끔히 옷을 차려입은 남자가 마음에 걸리는지 혼란스러워하던 남자 검표원도 ‘동행이다’라는 말에 경매가 진행될 극장으로 안내해주었다.
시우와 린네의 좌석은 정면 중앙의 2층 로얄 박스.
경매가 진행될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임과 동시에 린네와 시우 둘밖에 없어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장소였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필요할 때 벨을 눌러주시길.”
남자 급사는 어색한 몸짓으로 샴페인을 따르더니 문앞에서 대기했다.
그제야 시우는 완전히 안심했다.
경매란 말을 들었을 땐 ‘혹시 이번에도 팔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긴 해도 과거의 경험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1층 좌석도 거의 채워지고, 무대의 커튼 아래로 조명이 흘러나오기 시작할 무렵.
“선물이다.”
린네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원하는 것을 골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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