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45화 (645/917)

#645

1.

향월루에 구금된 것도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공적에게 납치되어 공적의 도시로 잡혀왔다, 라는 말만 들으면 피 말리는 모험이 펼쳐져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정작 향월루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간 본 적 없으며, 린네를 제외하면 다른 공적과 마주한 일도 없다.

최악의 상황, 이를테면 실험대상이 되거나 산채로 분해 당하는 일도 없었다.

하루 일과라 해봐야 새벽부터 저녁까지 대련.

이후엔 반쯤 기어서 방으로 돌아온 뒤 예빈에게 치료를 받고 기절하듯 취침인 생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린네와 검을 맞대며 실력이 늘고 있으니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있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곤란했다.

모처럼 야심 차게 ‘차원이동식’을 재정립해 언제든 탈출할 준비를 갖추고 여차하면 헥센나흐트의 내부 정보를 빼가는 첩보공작 계획까지 짜놓았거늘.

정작 대련이 끝나면 누운 즉시 기절하기 일쑤라 무엇하나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야 체류기간이 무한정 늘어간다.

당장은 주위 환경이 안정적으로 보여도 잊어선 안 된다.

시우의 처우는 오직 린네의 변덕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웨에엑….”

새벽같이 시작한 대련을 끝내고 시우는 연무장 구석에 엎어져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두말할 것 없고 마지막 대련에서 왼쪽 복부를 걷어차인 것이 치명타였다.

파이터들만 공감할 수 있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바닥에 엎어져 있자니 무심한 린네의 음성이 떨어졌다.

“내일은 휴식이다.”

“그엑?”

어안이 벙벙해졌다.

휴식.

기다리고 기다렸으나 린네의 입에서 나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 단어였기에 일찍이 단념했던 말.

“아쉽게 됐군.”

활짝 펴지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엄숙히 유지했다.

어차피 매일 같이 두들겨 맞는 나날에 이 이상 컨셉질을 연기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괜히 변화를 주는 실험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지?”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린네의 변화에도 주목하는 게 중요하겠지.

린네는 스승님과 다르다.

만약 그녀가 대련에서 더 이상 가치를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시우의 가치는 급락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없이 웃음이나 참던 제 모습이 우스워졌다.

“휴식은 중요하다.”

시우는 잠깐 멍해졌다.

교황이 공식 석상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는 기분이다.

차라리 일정이 있다거나 하면 이해가 가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빡세게 굴린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건 지당했다.

요즘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으니까.

“의사의 마력도 동났다. 나 역시 회복해 둬야 한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이어진 설명은 한결 납득가는 이유였다.

시우야 워낙에 거듭 증폭으로 자체적으로 마력을 복사하니 망각하는 일이다만, 일반적으로 마력은 사용하긴 쉽되 도로 회복하긴 어렵다.

편차가 워낙 크기에 콕 짚어 말하긴 어려우나 평균적인 마력을 지닌 대마녀가 완전 소모 후 자연 회복까지는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과정은 낙인 안에 남아있는 ‘자기화’된 마력이 중립 마력을 동화시키며 일어나는 작용이기에 남아있는 마력이 많을수록 회복 속도가 빨라지며 적을수록 더뎌진다.

시우와 린네는 연무장에서 출력량을 조절하며 싸워왔기에 회복속도도 그렇게 느리지 않았고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불려 와 린네와 시우의 부상을 돌보던 예빈의 마력은 먼저 동나버린 것이다.

“잠시 따라와라. 차를 내주지.”

시우는 잠자코 린네의 뒤를 따라 다실로 들어섰다.

그날 우연찮은 선문답 이후 린네와의 대화는 오직 뜨거운 몸의 대화뿐이었으니 이 다실도 겨우 두 번째다.

풍로에서 뭉근한 숯불이 피어오르며 가마를 달구자 어둠침침했던 다실이 조금 더 밝아졌다.

말 없이 능숙한 손길로 말차를 우려내는 린네.

차완에 말차를 넣고 거품이 일어날 때까지 휘젓는 일련의 동작은 다례의 시범조교로 써도 될 만큼이나 흐트러짐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외형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아마 이 장면만 찍어다 보여주면 다들 신부수업 받는 왕실 공주님쯤으로 생각하겠지.

‘그런데 여긴 왜 불려 온 거지?’ 라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신시우.”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엷은 호의가 묻어나기 시작했다는 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제자가 되어라.”

잠깐 멈칫했던 시우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답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스승님.”

2.

린네의 검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이한 검술.

숨어 있던 뱀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뻗어오면서도 녹아내린 타르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오는 참격은 인식 밖에서 뻗어지는 것처럼 난해하기 짝이 없다.

스승님의 정순한 무예와는 궤를 달리하기에 식견을 넓힐 좋은 기회였으며 새로 배울 것도 많았다.

하지만 시우가 린네의 제한을 덥석 받아낸 건, 아주 당연하게도, 귀염둥이 엘로아 스승님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도시에서 최저한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선 린네의 인정이 필요한 까닭이다.

검의 마녀의 제자라는 직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제껏 어울리지도 않는 반말을 찍찍 뱉으며 군소리 하나 없이 미친 싸움 개의 모습을 보인 것도 저 말을 듣기 위함이었다.

“좋아. 잘해보자.”

물론 고작 이것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일사천리가 되는 건 아니다.

이제껏 검을 맞댄 시간에 비해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다.

그래도 알 수 있다.

린네의 사제관이 적어도 엘로아처럼 애틋하고 끈끈한 건 아닐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우는 당분간 그럴듯한 제자의 모습을 연기할 심산이다.

린네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그녀의 대련 상대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모습을 보이고, 끝없는 투쟁심과 향상심을 내비칠 것이다.

“라고 해도 말이지….”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제자는 패면 강해진다는 그녀의 교수론에 마냥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분하게도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어지간한 실전보다 실전에 가까운 대련, 린네 선생님의 스파르타 검술 교실 속에서 시우의 창술은 월등히 증진되었다.

베껴 배울 것을 배우며 기존 창술에 부족했던 것을 채웠다.

속도와 힘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기교에 대해 습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했음에도 격차가 좁혀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성장하고 있는 건 시우뿐만이 아니었다.

린네 역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요지는 그녀보다 너무 뒤처져선 안된다는 것.

단물만 쪽 빨아 먹히고 팽 당하는 미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먹음직스러운 제자가 되어한다는 건데.

이 난이도도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저는 준비 다 됐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옷을 갈아입자 어쩌다 보니 한방살이를 하게 된 예빈이 퀭한 눈으로 다가왔다.

여담으로 린네는 시우가 예빈과 같은 방을 쓰건 밤에 뭘 하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켜본 결과 수련이 끝나면 언제나 다실로 돌아가 명상을 하거나 차를 마시는 듯하다.

아무튼.

언제나 치료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일정이 끝나면 정성껏 마사지까지 해주었다.

이보다 고마울 수 없다.

원래라면 사양해야겠으나 그녀마저 없었다면 요 사흘을 버티는 것도 무리였으리라.

“괜찮으세요?”

“괜찮죠….”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오늘 쉬는 건 예빈 씨를 위해서기도 하니까 푹 쉬셔요.”

“아뇨, 이렇게라도 도움이 돼서 기쁜 걸요….”

물론 예빈의 눈가가 쾡한 건 무리한 치료 때문도 마력의 지출 때문도 아니다.

매일 밤마다 고급 료칸 같은 방에서 선남선녀가 단둘이 지낸다.

더군다나 선의로 시작된 마사지를 할 때마다 이상향이나 다름없는 근육질 반 나신을 보고, 몸을 뒤집으면 그보다 더한 시각적 자극에 노출된다.

그런 와중에 아무것도 못 하고 침만 꿀꺽꿀꺽 삼켜야 하는 나날이 보태지자 정신적 피로도가 맥스에 달한 것이다.

“그나저나 온천이라니. 좋은 게 있네요.”

“저도 한 번도 못 써 봤어요.”

두 사람은 린네가 기다리고 있을 다실로 향하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일정은 크게 두 가지였다.

가장 먼저 온천에서의 간단한 약탕치료다.

게헨나의 레바나 대욕장에서나 유명한 줄 알았던 이 약탕치료는 의외로 전통과 역사가 오래된 듯하다.

온천수에 마력수와 린네가 손수 만든 약재를 왕창 들이부은 것으로 반나절쯤 요양하면 적잖은 마력과 영체의 부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온천욕 다음은 린네와 단둘이 향월루 밖으로 외출이다.

상대적으로 회복할 마력양이 많은 예빈이 온종일 온천욕을 즐기는 동안 시우와 린네는 ‘아르카나 타운’으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린네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만큼 뭘 할 예정인진 모르겠다.

그러나 도시를 살펴볼 좋은 기회다.

‘문’의 구조도 분석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

“스승님, 들어가겠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다실에 들어설 땐 겸양의 자세를 갖추라는 의미에서 낮고 좁게 설계된 문을 거쳐 엉금엉금 기어간 시우는 당혹감을 느꼈다..

“이것만 마시고 이동하지.”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있는 린네의 복식 때문이었다.

항상 국적 불명 동양풍 연무복을 입던 그녀다.

품이 넓고 활동성이 좋아 보여도 솔직히 ‘예쁘냐?’라고 묻는다면 애매했다.

태권도복을 보고 미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긴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명주에 금자수가 들어간 옷을 입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미인도 같았다.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내며 쪽진머리 그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비녀.

무릎 께에서 나뒹구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목도리까지 두른다면 한층 더 완벽한 그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예빈도 같은 감상인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기모노가 잘 어울리십니다.”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다. 시우는 때를 놓치지 않고 호감도작을 시전했다.

고대로부터 유서 깊은, 까칠했던 시절의 아멜리아조차 솔깃했던 칭찬 작전이다.

“이건 유카타다.”

“아.”

단칼에 잘라내고 후루룹 차를 마시는 린네.

어찌나 차갑게 잘라내던지 옆에 예빈이 일종의 농담으로 착각하고 리액션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방 찻잔을 비운 린네와 온천으로 동행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으니….

“네? 다 같이요?”

“현세에서 온천수를 들여오는 건 비싸다.”

당연히 가림막 같은 장치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약탕치료가 예산 문제로 인해 혼욕으로 확정되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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