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644화 (644/917)

#644

1.

대련이 끝났다.

소요된 시간은 총 18시간.

갖은 이유로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24시간 중 눈을 뜨고 있는 시간과 비슷했다.

그 중 휴식시간은 치료 시간을 포함 1시간 남짓.

그 이외에는 모두 대련을 빙자한 생사결이나 다름없었다.

진작 대련의 범주를 넘어섰을 뿐 아니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수련법이었다.

시우도 나름 단련된 몸이다.

아무리 격차가 난다 해도 맞고만 있던 건 아니다.

네번째 대련에선 힘껏 후려친 창대로 린네의 늑골을 부러뜨렸으며, 여섯 번째 대련에선 창끝으로 팔목을 길게 찢어냈다.

그리고 이는 치명적인 실수였음이 분명하다.

가만히 놔두어도 뜨거운 린네의 투쟁심과 향상심에 기름을 끼얹은 모양이 되었으니.

그 이후로 린네의 기백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한 쪽 팔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늑골이 부러지고, 체력이 떨어져도.

‘실전과 비슷해서 좋군’이라고 말하며 치료조차 받지 않고 덤벼드는 린네는, 시간이 갈수록 지쳐나가 떨어지기는커녕 점점 활기가 넘쳐났다.

연옥 같은 대련이 18시간으로 끝난 이유도 시우가 더는 창을 들어 올릴 체력조차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고했다.”

“그쪽도… 수고….”

땀투성이가 되어 옷 전체가 눅눅하게 변한 린네.

바닥에 녹아내려 슬라임화 되어가는 시우와는 달리 꼿꼿이 서 있다.

정신력의 차이라기보다는 부상의 정도가 덜한 까닭일 것이다.

“즐거웠다.”

“…….”

시우는 아주 조금도 즐겁지 않았지만….

저 린네의 입에서 ‘즐겁다’라는 말을 끄집어낸 것만 해도 크나큰 수확이 아닐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억울해 죽을 것 같다.

“내일 같은 시각에 연무장으로 와라.”

“네? 왜죠?”

너무 깜짝 놀라 존댓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린네는 존댓말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뭘 그리 뻔한 걸 묻느냐는 양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대련이다.”

대련 시작은 오전 6시, 대련이 끝난 건 오전 0시.

같은 시각에 연무장으로 오라는 말은 깨작 6시간가량만 쉬고 다시 그 고난의 행군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

어쩐지 일이 순순히 풀리는가 싶더니.

하필이면 이런 전투광에게 붙잡혀 생체 샌드백이 될 줄이야.

“인생….”

시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2.

마지막으로 린네와 시우를 치료해준 예빈의 부축을 받으며 객실로 돌아왔다.

“시우 씨, 괜찮아요?”

“아뇨, 뒤질 것 같아요.”

허세를 부릴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죽하면 청결 마법조차 예빈의 손을 빌렸으니.

“진짜 너무한 사람이네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항상 린네의 눈치를 보며 행실에 주의하던 예빈도 눈물을 글썽이며 원망 어린 발언을 냈다.

그도 그럴게 오늘만 11번 넘게 치유마법을 사용했다.

물론 린네 본인도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지만, 시우는 한결 심각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자상과 창상, 발길질에 얻어맞아 부러진 정강이뼈 골절, 출혈로 인한 수혈까지.

이미 그로기 상태에 있는 시우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린네의 모습은 의사까지 고용해 악착같은 고문을 자행하는 고문사 같았다.

“시우 씨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

“그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엄청 마음에 든 것 같아요.”

너덜너덜해진 옷자락을 보며 한숨 쉬던 시우는 부정했다.

처음엔 시우도 ‘티페레트의 제자라는 이유로 억하심정을 갖고 있나?’ 라는 의문까지 들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이 대련을 즐기고 있었다.

무를 향한 편집증적인 집착도 이쯤 되면 사랑으로 인정해줄 만하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난도질해놓는다고요?”

“그래도, 예빈 씨 덕에 아프지는 않네요. 지금 힘이 없어 보이는 건 좀 지쳐서….”

“그럴 만하죠. 전 18시간 동안 뛰기만 해도 쓰러질 텐데….”

원래는 남는 시간 틈틈이 마법을 재정비할 예정이었다.

한동안 손을 놓고 있던 차원이동식인만큼 보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하드코어한 일정이 계속된다면 과연 연구를 병행할 수 있을런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일단 오늘은 쉬어야 한다고 사지에서 보이콧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신세 좀 질 수 있을까요?”

“신세? 아, 이불요? 물론이죠.”

“그럼….”

시우는 반쯤 기듯 어기적어기적 움직여 갈아입을 옷을 찾았다.

아무리 청결마법을 사용했다 한들 절반이 넘게 찢어지고 한참 땀을 머금어 넝마 짝이 된 옷을 입고 남의 이불에 들어가기엔 미안했기 때문이다.

“갈아입을 옷이 없네요.”

“그러게요…. 이건 어떤가요?”

향월루에는 딱히 남성의복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별 수 없이 예빈에게 부탁해 목욕 가운을 받았다.

어깨가 조금 좁고 아랫단도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게 상당히 불편했지만 별수 없다.

남의 방에서 팬티 바람으로 잘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도 엘릭서 만드세요? 괜히 잠자리 뺏는 건 아닌가 싶어 죄송스럽네요.”

“아뇨, 엘릭서는 진작 완성해서 대련 전에 가져다 드렸어요. 저 때문에 시우 씨가 좀 더 고생했네요…. 좀 미룰 걸…. 그래도 괜찮아요. 저 원래 잘 안 자거든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꾸물꾸물 이불을 파고들자, 세상에나.

이렇게 아늑할 수가 없다.

눈을 감자마자 하염없이 꿈나라로 떨어지려는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꾸벅 존 사이에 예빈이 머리맡으로 다가온 것이다.

베개와 이불에서 나는 달콤한 향과 살 내음이 한결 짙게 코를 간질였다.

“시우 씨, 많이 힘들죠?”

“어쩌겠어요. 버텨야죠.”

“제가  마사지 해드릴까요?”

“마사지요?”

“엄밀히 말하면 마사지라기보다는…. 이걸 바르는 거거든요.”

난데없는 제안에 아리송해하고 있을 때 예빈이 소매에서 연한 옥빛이 도는 병을 꺼내 들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약이네요?”

“맞아요.”

시우도 병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예빈이 대련 중 상처를 입은 시우를 치료할 때마다 품에서 꺼냈던 치유제였다.

“이게 영체의 자가 회복력을 증진하는 포션인데요. 몸에 잘 바르고 잔다면 내일 한결 개운하실 거에요. 게다가 시우 씨 몸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잖아요. 무리하는 것보다는 추가적인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이 두려워지던 차였다.

“좋네요. 그런데 예빈 씨에게 해달라기엔 부담스럽고 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이게 그냥 바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치유 마법의 매개가 되는 거라서요. 제가 하는 편이 효율이 높을 거에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겠습니다.”

“이 정도로 뭘요. 고생하셨으니까 푹 쉬세요.”

뭔가 미안하고 부담스럽다.

그러나 사양하기엔 말을 나누기 힘들 정도로 고단했기에 잠자코 수긍했다.

“아, 가운은 저 주세요.”

퇴근한 남편의 겉옷을 받아드는 아내처럼 능숙하게 가운을 가져가는 예빈.

“엎드리면 될까요?”

“네네.”

요가 더러워지지 않게 아래 커다란 수건을 받치고 드러누운 시우.

온종일 고단했던 등 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예빈의 손이 얹어졌다.

“시작할게요.”

적당한 압력으로 눌러주며 등 전체를 어루만지는 예빈의 손길에 치유제 특유의 향기가 더해지자 무슨 아로마 테라피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마력수가 아닌 마력유를 정제해 만들어 낸 약품이기도 하고.

포근한 마력의 파동이 치유제를 매개로 온몸 곳곳에 스며들자, 팬티 바람으로 있는데도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대로 잘 것 같은데….”

“그냥 주무셔도 괜찮아요.”

“…….”

“시우 씨?”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영체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과로에 시달렸던 시우는 불과 1분 만에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이다.

3.

시우가 잠들어도 예빈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본래 고생했을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간호 겸 치유를 하려던 예빈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눈 호강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몸 자체는 처음 보는 게 아니다.

어제 치명상을 입을 그를 치료하기 위해 검진을 할 때 아주 정확한 데이터로 봤고.

오늘 대련 중 부상을 입은 그를 치료할 때도 봤다.

하지만 그때의 예빈은 의료인 모드였다.

육체미나 건강미에 맘 편히 평가를 할 만큼 느긋한 상황이 아니었다.

“와…. 무슨 몸이 이러지?”

그리고 급한 불을 끄고 어디까지나 재활 보조에 돌입한 지금.

예빈은 주책없이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세상에세상에세상에….”

전에 그와 원나잇을 했을 때도 몸이 좋긴 했다.

그때의 그는 아직 한창 영체화가 진행되던 시기로 ‘이상적인 육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근 2년 만에 다시 만난 그의 육체는 완벽해져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이 아니다.

모든 여자의 꿈이라는 맹수 같은 잔 근육.

굳이 말하자면 기계체조 선수 같은 몸이랄까?

“으아… 으으… 으으….”

목도리 도마뱀처럼 떡 벌어진 역삼각형 광배근.

엎드려 자고 있을 뿐인데도 울룩불룩한 등근육.

아무리 열심히 운동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코어.

돌처럼 딱딱한 허벅지와 드로즈 팬티 너머로도 보이는 탄탄한 엉덩이까지.

본디 인간 시절 예빈은 그렇게 성욕이 왕성한 편이 아니었다.

극지에서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할 때는 정말로 할 게 그것밖에 없어서 자위에 몰두했던 것이다.

시우가 떠난 뒤 건실한 생활을 살게 되자 딱히 수음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다른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는게 그 증거다.

“진짜, 미쳤다….”

그 모든 기질을 무색하게 만드는 매력이 그의 몸엔 있다.

미끈미끈한 치유제 너머로 손에 착착 감기는 근육의 감촉은 예빈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정신 차리자.”

이러면 안 된다.

아무리 보조 치료라도 치료는 치료.

또다시 의료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어서야 첫 치료의 경험을 온고지신한 보람이 없다.

잇몸을 꽉 깨문 예빈은 염동을 사용했다.

시우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고등어자반 뒤집듯 정면을 향하게 되었는데….

“아….”

예빈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두 뺨이 단숨에 화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울끈불끈한 가슴 근육 때문도,

당장 빨래하는데 써도 좋을 만큼 데피니션이 뚜렷한 복근 때문도 아니다.

지금 시우는 고된 운동을 끝내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상태.

노곤한 몸에 활력을 더해주는 사심 가득한 마사지는 수면 중 자연스레 일어나는 발기를 유도했다.

몬스터나 다름없는 시우의 물건이 대각선으로 우뚝 선 결과.

우람한 포신이 팬티를 잡아당기게 된 것이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지 손끝으로 고무줄을 살짝만 튕겨도 묵직하게 뛰쳐 나올 것 같았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남성성.

예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큰일 날 뻔했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잡아볼 뻔했다.

하지만 그가 잠든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해봐야 호의를 빙자한 성추행밖에 되지 않는다.

-으득!

거의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혀를 깨문 결과 조금은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거 없이도 잘 살아오지 않았던가?

“하으… 으으… 으으으….”

예빈은 다부지게 마음을 굳히고 그의 몸 앞쪽에도 구석구석 치유제를 바르며 주물러주었다.

정말이지 번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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