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
1.
이 향월루에서 가장 넓은 장소를 꼽으라면 안뜰도, 정원도 아닌 바로 이 연무장일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중정(中庭)을 개조한 형태.
사각형 평지의 흙바닥이 먼지 한 폴 날리지 않게 단단히 다져져 있는 가운데 군데군데 벚나무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대련하지.”
시우의 의사 따위는 묻지 않고 툭 말을 던지는 린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럴 필요가 없다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시우가 연기 중인 신시우는 비슷한 수준의 무예가를 보고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할 것이니.
“좋지.”
그걸 알고 있었기에 시우도 흔쾌히 받아들이는 척했다.
‘척’을 했다고는 해도 애초에 못마땅한 건 아니었다.
린네는 근접전의 강자다.
대련이 얼마나 실력에 도움이 되는 수련인지는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린네의 호감과 신뢰를 사는 와중에 전혀 새로운 타입의 검사와 맞부딪치며 경지 상승을 도모할 수 있다?
꿩 먹고 알 먹고 인 것이다.
린네는 연무장 귀퉁이 석등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몸에서 중후한 마력이 피어나더니 석등 쪽으로 스며든다.
-쿠웅!
그와 동시에 딛고 선 지면 위로 마법식이 기어갔다.
석등으로부터 시작된 마력의 중후한 파동은 연무장 전체를 뒤덮고 나서야 멈추었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지하 감옥이 그렇듯 풍수지리를 활용한 진법식이었다.
효과는 직관적이었다.
먼저 그렇지 않아도 단단하게 다져져 있던 땅이 아스팔트처럼 더욱 견고해졌다.
중정 쪽을 향한 툇마루에도 일종의 경계 같은 것이 생겨난다.
또한 가용 마력 양이 단숨에 제한되었다.
제한 값은 평상시 활용할 수 있는 마력의 1할 남짓.
비교적 넓다고는 해도 두 대마녀가 격렬한 대련을 벌이면 연무장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 힘을 제한한 것으로 보였다.
애초에 린네가 원하는 건 창과 검의 대결이지 마법 대결은 아닌 듯했으니 말이다.
“잠깐 그 전에 몇 가지 물어도 될까?”
가타부타 설명 없이 검을 뽑아든 린네를 우선 제지한다.
시우는 아직 대화하고 싶은 내용도, 궁금한 것도 많았다.
기대하던 택배를 개봉직전에서 빼앗긴 것처럼 불만스럽게 움츠러드는 린네의 미간.
“말해라.”
“나와 함께 있던 마녀는 어디 있지? 이 도시로 함께 들어온 건가?”
앨리스를 비롯하여 마냐와 말리샤 역시 시우와 함께 잡혀 왔었다.
사실 먼저 습격해온 그들까지 신경 써줄 의리는 없으며, 시우도 박애 정신에 입각해 그들의 행방을 묻는 게 아니다.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이 도시에서 한 사람의 조력이라도 있는 편이 액소더스에 가까워지리란 합리적 판단 탓이다.
“내 소관이 아니다. 침묵의 마녀가 경매장에 넘겼겠지.”
얼추 예상대로였다.
추방자이긴 해도 납치당한 마녀에게 시민권을 줄 리가 있나.
“경매장에 넘겨지면 어떻게 되지?”
“중요한가?”
그래도 몇 마디 말해봤다고 이제 얼추 그녀의 감정을 짐작하라 수 있다.
물론 정확도는 보장할 수 없지만, 지금 그녀는 굉장히 성가셔하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노예로, 나쁘면 분해되어 재료로 팔리겠지.”
분해?
내색은 않았지만 사람에게 쓰기엔 살벌한 표현이었다.
두루뭉술한 은유 따위는 아닐 것이다.
도리어 평소 주워듣던 공적의 행실로 미루어 볼 때 너무나 현실감이 넘쳐서 문제다.
“왜 그런 걸 묻지?”
그대로 내버려 둬도 되는 게 맞을까?
적당한 변명을 대고 이쪽으로 데려올 방법은 없나?
그러나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가 검의 마녀의 의심을 사게 된다면 그것대로 문제다.
경매장에서 데려오고 싶다고 해도 내세울 구실이 없을뿐더러 들어 줄지도 미지수다.
우선은 단념하자.
“아니, 별거 아니야. 그보다 내 창은 어딨나?”
당장은 최고의 변수 메이커인 붉은가지의 소재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했다.
“보관 중이다.”
“창이 없으면 대련은?”
“나도 예장을 쓰지 않겠다. 필요할 일이 생기면 그때 돌려주겠다.”
덩달아 경매장에 넘겼다고 하면 속이 굉장히 쓰렸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대련에 사용하기에 붉은가지는 너무 위험하다.
평소 1할 정도로 제한된 마력으로는 통제조차 버거웠고 말이다.
린네의 불만이 한계에 달한 듯하니 더 시간을 지체하긴 어려웠다.
“좋아, 한 번 붙어보자고.”
팔을 옆으로 뻗자 검은 그림자가 길쭉한 창의 형상을 이루었다.
길이부터 무게중심까지 붉은가지와 완벽히 같게 연성된 창은 손에 감기듯 익숙하다.
-부웅! 붕!
몇번 창을 휘적여 보았다.
아무래도 마력 사용에 제한이 생긴 만큼 몸이 어디까지 움직이는지, 머릿속에 구상한 동작이 어디까지 따라주는지를 점검해야 했다.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스승님과 대련할 적에도 마력을 자체적으로 제한한 뒤 행해졌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어색한 말투로 린네 쪽을 바라보자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세를 취했다.
“시작하겠다.”
-챙
가볍게 맞닿는 창과 검 끝이 맑은소리를 내며 울었다.
링 위에서 글러브를 맞대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그와 동시에 시우의 의식이 전환되었다.
린네와는 이미 목숨을 걸고 붙어 보았기에 그 수준을 알고 있다.
마음이 콩밭으로 간 상태에서 감당할 상대가 아니다.
시우를 향한 그녀의 흥미는 불씨 같은 것이다.
여기서 어떤 결과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푸쉬쉬 꺼지느냐 더 뜨거운 관심의 불길이 되느냐가 갈린다.
즉, 사활을 걸어야 한다.
2.
빗발치는 창격과 유려하게 흩어지는 검날.
공연을 위해 합을 짜맞춘 것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격한 연무.
비록 제한되었다고는 하나 두 사람의 몸놀림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사이 다섯 번의 공방이 오가며, 귀청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파쇄음은 두 사람의 움직임이 음속에 근접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훅!”
한손으로 창을 내지르며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힌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린네의 검이 그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살짝만 늦었더라도 한쪽 입이 길게 찢어졌을 치명적인 일격은 살수에 가까웠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
만약 시우가 피하지 못했더라도 그녀는 검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 증거로 시우의 몸은 이미 울긋불긋한 창상과 자상으로 가득했고, 동작을 취할 때마다 핏방울이 연무장 바닥 위로 흩뿌려지고 있다.
그렇다.
린네는 대련 내에서 조금도 손대중을 두지 않고 있다.
모든 공격은 실전이나 다름없는 각도와 힘으로 들어왔으며, 유효타를 가하는 게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도 힘을 전혀 빼지 않았다.
이번 대련에 사활을 걸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지만 설마 정말 목숨을 다투는 사투가 되리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이딴 게 대련?
차라리 격투기 선수들끼리 하는 스파링 같은 종류라면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두 사람이 들고 있는 건 날붙이다.
엄한 곳에 정타 한 방을 잘못 허용했다간 자칫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건 질척한 살의 따위가 아니다.
순수하며, 깨끗하기 짝이 없는 정념과 이 놀이가 즐거워 마지않은 듯 입가에 새겨진 미소뿐.
“크윽!”
이번에는 허벅지 쪽이 찔렸다.
동맥은 빗겨갔고, 뼈에 닿을 정도의 깊이는 아니었지만 일순 허벅지 전체가 뻣뻣한 통나무처럼 굳어 버린다.
시련 때처럼 고통 감쇄도 없는 데다가 목숨을 잃으면 얄짤 없이 죽어버리는 현실.
그런 막중한 부담감은 시우를 몰아세운다.
-부우웅!
반사적으로 창대를 돌려 린네를 쳐내려 했을 때쯤 그녀는 유유히 간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분명 신체적 조건으로나 무기적 특성으로나 리치가 유리한 건 이쪽일진대, 그녀는 간격을 자유롭게 오가며 전투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후우…. 후우…”
언제 찢어졌는지도 모를 이마에서 피가 흘러 눈을 가린다.
허벅지는 방금 찔렸고 팔은 이미 대 여섯 번은 베였다.
치명상은 없지만 땀을 뚝뚝 흘리는 것을 제외하면 생채기 하나 없는 린네에 비하면 만신창이나 다름없다.
작은 상처가 차근차근 누적된 결과였다.
심판이 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TKO선언했을 상태.
불행히도 연무장에 심판 따위는 없었고 그녀 스스로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린네는 순수한 검술만이라면 엘로아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스승님이 인정사정없이 대련에 임했다면 비슷한 결과가 나왔겠지.
아무리 재능이 찬란하다 하여도, 아무리 만병지왕의 계약이 뛰어나다 해도.
세월을 거쳐 쌓아 온 연륜을 단숨에 따라잡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닌가?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설령 불의의 사고라도 일어난다 해도 ‘그것참 아쉽군’하고 말 것 같은 린네의 분위기다.
“벌써 힘든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감에 딱딱히 굳은 시우를 보고 린네가 말했다.
억지로 지어낸 웃음을 품고 이를 악문 채 답했다.
“그럴 리가.”
컨셉을 잘못 잡았다.
차라리 게으른 천재 같은 걸로 해서 적당히 꿀을 빨았어야 했는데….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3.
죽을 똥을 싸며 발악해보았지만, 격차는 견고했다.
시우가 걸레짝이 되어 바닥에 드러눕고 나서야 대련이 끝났다.
“하아…. 하아….”
죽을 것 같다.
토할 것 같다.
전신을 찌르는 듯한 고통은 물론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 까닭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위안을 느끼고 있었다.
목숨을 잃거나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최악의 상황은 피한 채 대련이 종료되었으니 말이다.
“의사, 치료해라.”
“이, 이게 대체….”
“치료해라.”
눈을 감고 누워 혼미해지려는 정신줄을 붙잡고 있자니 서늘한 린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 안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며 상처가 나아가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치료는 해주니 이게 어디인가?
“가라, 필요하면 부르겠다.”
등 떠밀려 쫓겨난 예빈.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2분 정도 뻗어있던 시우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을 때, 린네는 여전히 검을 쥐고 있었다.
설마.
설마….
“다시 시작하지.”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멍해진다.
물론 마력 보유량은 그대로 두고 출력만 제한된 상태로, 시우도 린네도 아직 넉넉한 마력이 남았다.
그러나 1시간 넘게 무기를 부딪치며 싸웠다.
조금은 쉴 줄 알았다.
그런데 치료하고 3분 정도 쉬더니 곧장 다시 대련하라고?
아까 그 살벌한걸?
“좋아. 덤비라고.”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한번만 더 견뎌보자.
제아무리 수련에 눈이 돌아갔다 해도 온종일 이 짓거리를 하고 있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우는 창을 움켜쥐었다.
그 시점까지도 시우는 린네의 가혹함을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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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원소 마법을 사용중인 샤론이입니다
lin선생님께서 제공해주셨습니다
벌써 세번째 팬아트인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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