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
1.
예빈과의 대화는 적잖은 소득을 안겨주었다.
에렐림 공작의 충복 코하브 백작이 만들어주었던 의수.
그 의수에 제대로 된 감각 연동이 되지 않았던 이유가 시우의 신체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까지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빈도 어디까지나 잡혀 온 몸.
향월루에 있는 기기로는 원인 파악이 어렵다고 한다.
정밀한 진단을 위해서는 게헨나에 있는 그녀의 공방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당장 심각한 건 아니죠?”
“네, 하지만 증상이 대놓고 보일 정도로 악화됐다면 이미 골든타임을 놓쳤을 가능성도 있어요.”
“주의하겠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들이 끝나자 피로감이 쭉 몰려왔다.
그도 그럴게 지금은 새벽 4시다.
이 24시간 동안 미궁에 들어가 수은의 마녀와 싸우고, 검의 마녀에게 대판 깨진 이후 헥센나흐트까지 잡혀 와 예빈에게 치료를 받고, 검의 마녀를 만난 뒤 향월루에 구금되었다.
한숨에 몰아 말하기도 벅찬 빡빡한 일정으로 하루를 살았으니 제아무리 영체라도 남아나질 않는 것이다.
“예빈 씨, 눈 좀 붙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 그게 좋겠네요. 많이 피곤하실 텐데.”
그러고보니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은 들었어도 어디를 방으로 삼으면 좋은지 따위는 듣지 못했다.
예빈의 눈이 힐끗 이부자리 쪽을 향했다.
“오늘은 이쪽에서 눈 붙이실래요?”
“네? 그럼 예빈 씨는….”
“앗, 이상한 의미는 없어요. 저는 오늘 밤새 약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러면 어차피 이불이 비니까요.”
그러고보니 언뜻 보기엔 가슴 빼고는 자기주장이 약한 그녀지만, 일전 원나잇을 보낼 땐 그녀의 유혹에 의해서였다.
그래선지 자꾸 시선이 간다.
편하게 올려 묶은 올림머리.
헐렁한 원피스 옆으로도 보이는 펑퍼짐한 골반과 큼직한 가슴.
나태방임타락 성녀였던 도로시와는 달리 매일 신을 향해 기도할 것 같은 온화한 분위기의 눈매.
같은 한국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잡티 없는 뽀얀 피부까지.
저 얇은 천 아래가 어찌 생겼는지, 그녀가 어떤 목소리로 우는지 전부 아는 입장에선 더욱 그랬다.
물론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방음이라곤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방에서, 그것도 적지에서 그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예빈도 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로 의식하게 되는 건 아마 두 사람이 진득하게 몸을 섞은 사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빈도 시우도 원나잇을 보내고 쿨하게 잊고 넘길 만큼 인싸남녀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잠깐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던 두 사람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시간 맞춰서 깨워 드릴게요. 편히 쉬세요.”
테이블에 앉아 등불을 켜는 예빈.
푹신푹신한 이불에 몸을 파묻은 시우.
하루의 고단함이 쭉 풀리는 포근함에 예빈의 체취가 흐릿하게 섞여 코를 간질인다.
체취에 약한 시우지만 베개에 묻어난 정도는 충분히 수비 범위 이내다.
“후….”
그녀가 불안하지 않게끔 한숨을 숨겼다.
실컷 허세를 부리고는 있다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군다나 스승님이 애타고 찾고 있을 텐데, 이 소식이 게헨나로 넘어간다면 걱정할 사람도 한둘이 아닌데.
불과 몇 달 전에 실종되었던 상태에서 똑같은 걱정을 끼치다니 크나큰 민폐다.
최대한 빨리 좋은 정보를 가지고 탈출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시우는 눈을 감았다.
2.
검의 마녀에게 오지랖을 부려 치료해주는 바람에 때아닌 엘릭서 제작에 열중하던 예빈.
뒤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서야 집중하던 시늉을 그만두었다.
“…….”
힐끗 뒤를 보자 세상 물정 모르고 잠든 시우의 옆 얼굴이 어스름한 스탠드 조명에서 빛난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안정감이지….”
이제껏 의지할 곳도 없이 홀로 살기를 하던 포로 생활.
그 동안은 의지할 상대는커녕 대화를 할 사람도 없었다.
검의 마녀는 예빈을 말하는 잡초 보듯 했으며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속 터놓고 얘기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를 납치한 장본인이 아닌가?
잠깐 산책하러 나갈 수도 없으며 미래는 불투명.
어쩌면 영원히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난 신시우.
엄밀히 말하면 잡혀 온 것이긴 하다만 지금 그게 중요한가?
게다가 그는 여기 온 지 반나절 만에 ‘탈출’이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그것만으로 숨통이 두어 개는 더 트이는 것 같았다.
“시우 씨.”
“…….”
뻔히 곤히 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소근소근 불러보았다.
“시우 씨.”
“…….”
이번엔 살짝 더 목소리를 크게 했는데도 여전히 꿈나라를 여행 중인 시우.
괜히 깨우지 않아 다행임을 느끼면서도 내심 아쉬운 걸 보니 그동안 많이 외로웠구나 싶다.
10년 동안 극지에서 혼자 생활하던 때도 있었는데.
“하긴 그땐 넷플릭스랑 여러 영상 매체 친구들이라도 있었지….”
여긴 절간이나 다름없으니.
그리고 예빈의 ‘외로움’은 정신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음이 분명했다.
“문예빈, 니가 미쳤구나.”
살짝 벌어진 이불 틈으로 쏙 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오랜만에 그의 탄탄한 신체와 투박하지만 거친 리드에 이끌리고 싶다.
위기의 상황으로 말미암은 강제 금욕 생활에 잠깐의 방심이 더해지자 그간 쌓였던 끈적끈적한 욕구가 흐르려는 것이다.
예빈은 제 뺨을 짝짝 때리며 미혹을 날려보냈다.
방심에도 정도가 있다.
아직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예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3.
달 속에 토끼가 보이는 듯하다 하여 묘시(卯時).
이른 새벽, 이라지만 사위는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군데군데 놓인 등잔불과 화강암 석등만이 어스름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제 모습 그대로 검무를 추는 린네가 보였다.
설마 어제부터 계속 저러고 있던 걸까?
“…….”
그런 듯 하다.
옷차림도 어제와 똑같고 서 있는 장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중간에 방해만 않는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저 자리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을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시우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동작을 멈추었다.
“따라와라.”
송골송골 턱까지 맺힌 땀을 수건으로 대충 닦은 청결의 마법을 사용한 채 앞장섰고 시우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연무장의 뒤편은 정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듯한 고즈넉한 길.
투박하게 놓여 있는 돌 바닥 사이사이로 겨울 벚꽃이 나뒹굴었다.
호젓이 이어진 길 끝에는 향월루의 화려함과는 반대로, 소박함과 탈속의 분위기가 묻어나오는 초가 한 채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쯤 되자 시우도 대충 이 건물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다실이었다.
허리를 숙여 낮은 문을 거쳐 들어서자 너무 어둡지도, 그렇다고 너무 밝지도 않게 등불이 일렁이는 다다미방이 보였다.
밖에서 보면 눈치챌 수 있었듯 다섯 명 정도 앉으면 번잡스럽게 느껴질 만큼 좁다.
“앉아라.”
다구를 꺼내 든 린네가 손짓하자 방 가운데 움푹 파인 화로에 불길이 일었다.
아무래도 차를 내어주려는 듯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얌전히 기다리며, 부글부글 솟는 증기 사이로 시우는 그녀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녀를 보고 시우가 제일 먼저 떠올린 인물은 위치포인트 광화문지부의 수아 지부장이었다.
옛스러운 말투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시대의 절세미인을 그대로 데려온 분위기라 해야 하나?
수려한 미모만 본다면 ‘과연 마녀’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비단처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반듯하게 다듬어진 일자 앞머리.
전반적으로 검은 색감과 대비를 이루는 설원 같은 피부.
선이 흐린 입술과 달리 고양잇과 같은 눈매만 어떻게 하면 규중처녀처럼 보일 법도 했다.
실상은 꽤 많이 다르지만 말이다.
신중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차를 우려낸 린네는 시우에게 찻잔을 건넸다.
“고맙게 마시지.”
컨셉에 충실하면서도 너무 건방져 보이지는 않게 찻잔을 받아든 시우.
거품이 부글부글 일어난 말차는 예상보다 떫지 않았고 향긋했다.
“창은 티페레트 공작에게 배웠나?”
그렇게 불쑥 시작된 대화.
동시에 마음을 다잡는다.
검의 마녀와의 관계 구축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예빈은 한 번도 와본 적 없다는 다실에서 차를 대접받고 있으니 제법 점수를 딴 것이긴 하겠지만, 대화 도중 뭔가 수틀린다면 돌변할 가능성도 0이 아니다.
“그래.”
“얼마나 배웠지?”
“1년 정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느긋이 차를 마시지만, 촉각은 린네를 향해 곤두서있다.
“티페레트의 가르침은 어떤가?”
분명히 날아올 줄 알았던 질문이자 얼추 대답을 준비해두었던 질문이었다.
스승님은 공적과 사이가 좋지 않다.
눈앞의 린네 역시 공적.
사실대로 말하려면 ‘정말 존경하고 멋진 분이며 사랑스럽다’가 되겠지만, 호감도작을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정이 있다 해도 크나큰 은혜만 받아온 스승님을 욕보이기엔 죄스럽다.
이 죄책감은 연기에도 지장을 줄 터.
때문에 약간의 진실을 섞는다.
“허술하지.”
침대에선.
“전투나 마법이라면 몰라도 다른 부분에서는 연약하기 짝이 없어.”
특히 성감대가.
“그녀의 가르침엔 한계가 있다.”
왜 린네가 시우를 이곳에 납치해 왔는가?
왜 연무장으로 불러내 차까지 대접하는가?
다양한 정황을 조합해 한가지 가설을 세웠다.
린네는 그를 대련 상대로 삼으려 하고 있으며, 어쩌면 그 이상.
제자로 두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티페레트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은근한 어필을 보냈다.
린네에게 비치는 시우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스승도 휙휙 갈아치우는 냉혹무비한 남자일 테니 컨셉에도 지장이 없다.
검의 마녀의 제자 포지션을 꿰어찰 수 있다면 앞으로의 계획도 창창해진다.
물론 훗날 뒤통수를 치고 배신해야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공적에게까지 미안함을 느낄 정도로 인의 넘치는 성격은 아니다.
“……."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린네.
아니, 저거 생각에 잠긴 표정은 맞나?
아무튼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린네가 마침내 입을 연다.
“묻겠다. 너에게 창이란 무엇인가?”
직감했다.
이건 답변에 따라 판별이 갈리는 일종의 시험.
다만 이렇게 선문답 같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던지라 입이 턱 막힌다.
더군다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한 칼날 같은 눈빛이 아까부터 사정없이 가슴을 후벼 파는 중이라 부담감이 가중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합격점이 나올지, 무협지 고수나 할 법한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없을지 고민하던 사이 시간이 너무 가버렸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내려놓은 답은.
“창은 그냥 창이지.”
라는 멍청한 답변.
면접을 조지고 온 입사지원자처럼 참담한 마음을 감추고 있자니, 린네는 우뚝 멈춰선 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길로 시우를 보았다.
설마 이거 통한 건가?
“그렇다면 무(武)란 무엇인가?”
“무 역시 그냥 무다.”
기세를 이어 답하자 린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건방질 자격이 있는 애송이다.”
어느덧 그녀의 입가엔 두 번째로 보는 웃음이 새겨져 있었다.
시우의 도발에 정면으로 응하던 그녀가 지었던 웃음과 모양이 흡사하다.
“그래, 검은 무엇이오, 무는 무엇이오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기꾼들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그럴듯한 단어에 갇히면 본질을 직시하지 못할 뿐.”
그 린네가 저렇게 많이 빠르게 말할 수 있을 줄이야.
그녀는 몸이 달았다는 듯 찻잔을 내버려 둔 채 벌떡 일어났다.
“연무장으로 간다.”
시우를 기다리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서는 린네.
“휴우.”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잘 풀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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